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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바다 위에서 새해를 맞은 적이 있다. 딸이 대학에 합격하고 나서 고맙다고, 3학년 선생님들을 새해맞이 요트에 초청했었다. 요트는 새벽바람을 헤치고 바다를 달리더니, 시야가 탁 트인 곳에 닻을 내렸다. 해를 기다리는데, 그날 떠오른 그 해는 여느 해가 아니었다. 붉은 감격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런 가슴 뛰는 새해를,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한 번 더 맞는다. 양력으로 1월 1일 신정에다, 음력으로 정월 초하루인 설 덕분이다. 그런데 교사는 새해를 한 번 더 맞는다. 봄과 함께 시작하는 3월 새 학기 첫날 때문이다. 그날도 설이다.

"밤낮 스타트만 고쳐 하는 단거리 연습/ 아아, 인생은 즐거웁다"

한 시인 용아가 이 마음이었을까. 드디어 새 학기 첫날, '2학년 4반'이라고 선명하게 찍힌 교실로 들어갔다. 앞으로 이 반에서 1년을 살겠구나, 약간의 설렘과 두근거림으로 문을 열었다. 교사로 산 지 내년이면 30년. 그런데도 이 순간이면 늘 가슴이 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어떨 때는 밤잠도 설치고 뒤척인다. 아이들과 '만남'이 '맛남'이 되게 해 달라고, 국어 교사 버전으로 기도하기도 한다.

그런데 웬걸, 아이들은 하나같이 표정을 숨기고 있었다. 속내를 드러낸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이미 알아 버렸을까. 아이들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었다. 물론 웃지도 않았다. 눈을 보면 분명히 할 말이 있는데, 말을 해 보라고 해도 묵묵부답. 혹시, 데스마스크.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나도 그랬다, 저 나이 땐. 찍히면 일 년이 괴로웠으니까.

그런데 아이 하나가 없었다.

"유학 갔어요."

첫 반응이었다. '유학! 그래, 잘했구나. 등교하자마자 '영어 듣기'로 하루를 시작하는 나라에서, 하루종일 '영어 듣기'를 할 수 있는 나라로 갔다니, 잘했구나. 서울로만 전학 가도 부러워하던데, 먼 나라로 가는 친구를 보면서, 남은 너희 가슴은 얼마나 서늘해졌느냐.' 그런 말을 하고 싶은데 입을 닫았다. 혼자 머쓱해질까 싶어서였다.

십여 년 전에 시골 중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다. 한때는 아홉 학급이나 된 꽤 큰 학교였는데, 내가 있을 때는 이미 한 해에 한 학급 모집하기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돈 많은 아이는 서울로 광주로 떠났고, 이도 저도 없는 아이들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모두 긴 그림자를 끌고 다녔다.

그때 나는 '문제아' 뒤에는 반드시 '문제 부모'가 있고, '문제 사회'가 있다는 말을 그곳에서 절감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건강했다. 몇몇은 짓이겨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살아남았다. 같이 학교신문을 만들던 아이는 이제 회사에 다니며 자기 글을 쓰고 있고, 어떤 아이는 지금도 우체국에 가면 창구에서 알은체한다. 이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고 심드렁하게 반응할까 봐.

오늘 임시 반장은 영민이다. 아이들 앉을 자리를 다시 배치하랬다. 했다. 청소 지도를 하랬다. 했다. 남은 책·걸상을 인쇄실 옆으로 옮기랬다. 했다. 교실에 컴퓨터를 설치하랬다. 먼지를 뒤집어써 가며, 했다. 그리고 오후 9시 50분. 친구들 다 가면 문 잠그고 가랬다.

혹시 싶어서 어디 사느냐고 물었다. '돌산'이랬다. 버스 시간 늦으니 그냥 가랬더니, 괜찮단다. 그러고 10시에 학급에 가 보니 자물쇠를 찾고 있었다, 혼자 남아서. 내가 처리하마고 보내면서 한 마디 건넸다. 영민아, 고맙다. 그랬더니 영민이는 어둠 속에서 활짝 웃어 주었다.

덧붙이는 글 | 글을 쓰면서 교실 혁명을 꿈꾸다.



#학교가는길#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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