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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향교 명륜당 향교의 명륜당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집이다.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집은 대성전이다.
▲ 의성향교 명륜당 향교의 명륜당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집이다. 공자의 제사를 지내는 집은 대성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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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향교(유형문화재 150호)는 의성읍 중심부에 있다. 문화재를 방문할 때마다 하듯이, 이곳에서도 안내판부터 읽는다. 안내판은 이 향교가 "1394년(조선 태조 3)에 처음 지어졌고, 1745년(영조 21)에 대성전과 명륜당, 1762년(영조 38)과 1910년에 광풍루를 증축, 수리하였다"고 알려준다. 그래서 그런지 건물 중에서 광풍루(光風樓)가 특히 두드러지게 . 

향교마다 있는 대성전(大成殿)은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만든 집이다. 물론 의성향교에도 대성전이 있다. '대성'은 공자를 높여서 부르는 말이며, '전'은 '큰 집'을 가리킨다. 그리고 명륜당(明倫堂)은 '윤리를 밝히는 집'이라는 그 이름이 말해주는 것처럼 학생들을 가르치는 집이다.

의성향교 의성향교의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큰 광풍루(왼쪽), 조선 시대의 큰선비 장현광을 기리는 비석
▲ 의성향교 의성향교의 건물 중 가장 규모가 큰 광풍루(왼쪽), 조선 시대의 큰선비 장현광을 기리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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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원장도 싫다며 공부만 한 장현광

의성향교에는 광풍루와 명륜당 사이에 눈길을 끄는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다. '縣令(현령) 旅軒(여헌) 張先生(장선생) 淸德碑(청덕비)'이다. 비석의 '장선생'은 퇴계 이황, 다산 정약용과 더불어 조선 시대의 손꼽히는 거유(巨儒)로 인정되는 장현광(1554∼1637)을 가리킨다.

그는 의성군수(縣令)를 지내기도 했다. 봉양면에 서원이 생길 때 '덕을 쌓고(藏) 때를 기다리라(待)'는 뜻의 장대(藏待)서원이라는 이름을 지었던 장현광은 광해군과 인조 시절 대사헌(지금의 감사원장 정도) 등 높은 벼슬이 주어졌으나 맡지 않고 학문에만 열중했다. 그러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전국에 격문(檄文)을 보내 군사들이 일어나도록 독려했다. 하지만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산으로 들어가 불과 여섯 달 후에 별세하고 만다.  

충효당 <정만록>을 써서 임진왜란의 생생한 실상을 후세에 남긴 이탁영의 집
▲ 충효당 <정만록>을 써서 임진왜란의 생생한 실상을 후세에 남긴 이탁영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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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란의 실상을 후세에 생생하게 전한 이탁영

향교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곧 삼거리가 나온다. 거기서 왼쪽으로 꺾으면, 도로가 나오는 데 갑자기 넓어진다. 도로 오른쪽은 집이 거의 없는 산비탈이다. 충효당(忠孝堂)은 그 산비탈에 있다. 그러나 넓은 도로를 따라 굵은 돌들로 쌓은 축대가 이어지는 특이한 광경이 눈길을 끈다. 충효당을 비롯한 여러 채의 기와집들이 길에 바로 붙어 있기 때문에 찾기는 아주 쉽다.

와가들 중 가장 앞에 있는 집이 예부터 내려온 충효당 본채이다. 충효당 뒤 산비탈 쪽으로 놓여 있는 집들은 대문 모양으로 미루어 보아 가까이 가보지 않고도 제사를 지내는 사당인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집 왼편에는 근래에 건립된 듯한 비석도 우뚝 서서 답사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가까이 가서 보니 비석에는 한자로 '孝思齋(효사재) 李先生(이선생) 事蹟碑(사적비)'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곳은 보물 880호인 <정만록>을 남겨 임진왜란의 실상이 후세에 알려지는 데 공헌한 이탁영(1541∼1610) 선생 유적지이다.

홍술 순절비 견훤군과 싸우다 전사한 문소군 성주 홍술을 기려 왕건은 문소군의 이름을 의성부로 바꾸었다.
▲ 홍술 순절비 견훤군과 싸우다 전사한 문소군 성주 홍술을 기려 왕건은 문소군의 이름을 의성부로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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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술 장군 전사로 문소군이 의성부로 승격

충효당 일대를 둘러본 뒤에도 차는 그 자리에 계속 남겨두어야 한다. 차로 갈 수 없는 답사지가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까닭이다. 홍술 순절비(殉節碑)와 충렬사(忠烈祀). '무당골'이라 부르는, 충효당 왼쪽의 깊은 골짜기 안에 있다. '의성(義城)'이라는 지명(地名)이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 한 홍술 장군 유적지이다.

929년, 견훤의 5만 대군이 문소군에 쳐들어온다. 현재 의성군 전체의 인구가 6만 명인 것을 고려하면, 당시의 견훤군은 5만 명에 해당한다. 문소군 성주 홍술은 의성 지역에 쳐들어온 견훤군과 싸우다 전사했다. 군사의 수에서 워낙 차이가 컸으므로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던 것이다. 홍술의 죽음을 들은 왕건은 '나의 팔 하나가 떨어져 나갔구나!' 하고 슬퍼하면서 문소군을 의성부로 승격시켰다. '의(義)로운 땅(城)'이라는 뜻의 이 이름도 왕건이 직접 지었다.

의성읍 독립운동기념탑 독립운동기념탑, 충혼탑 등이 있는 일대를 '義苑'이라 한다.
▲ 의성읍 독립운동기념탑 독립운동기념탑, 충혼탑 등이 있는 일대를 '義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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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에서 가장 먼저 3·1 만세운동을 펼친 의성

홍술장군비와 충렬사를 둘러본 다음, 의성 종합운동장 뒤편에 가서 '항일 독립운동 기념탑' 일대의 잘 꾸며지고 깨끗한 모습을 본다. 의성읍에 이처럼 독립운동을 기리는 답사지가 번듯하게 마련되어 있는 것은 의성군이 그만큼 뜨거운 항일 정신을 불태운 고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의원(義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와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함께 펴낸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는 모두 60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이다. 그 중 1919년 3월 만세운동을 다룬 제20권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의성은 12곳에서 7,400명이 독립 시위에 참가했다.
안동은 14곳에서 7,100명이 독립 시위에 참가했다.
고령은  7곳에서 3,800명이 독립 시위에 참가했다.
경산은  8곳에서 3,000명이 독립 시위에 참가했다.
영일은  9곳에서 2,900명이 독립 시위에 참가했다.  
상주는  4곳에서 2,300명이 독립 시위에 참가했다.
영덕은 15곳에서 2,200명이 독립 시위에 참가했다.
영천은  3곳에서 1,800명이 독립 시위에 참가했다.
경주는  3곳에서 1,700명이 독립 시위에 참가했다.
(이하, 생략)

의성은 경상북도의 시와 군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독립 만세" 시위를 벌였다. 역시 의성은 '의로운 고을'인 것이다.

우곡서원 정몽주의 제자 오국화 선생을 기리는 서원
▲ 우곡서원 정몽주의 제자 오국화 선생을 기리는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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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 제자 오국화, 세상 인연 끊고 의성으로

의성읍에서 5번 국도 아닌 지방도로를 따라 고개를 넘다 보면 단촌면 경계에 거의 닿을 무렵 길가 왼쪽에 '愚谷書院(우곡서원)' 네 글자가 뚜렷한 화강암 푯말이 나타난다. 의성읍 업리 1133번지에 있는 이 서원은 정몽주의 제자인 고려말의 오국화(吳國華) 선생을 기리는 곳이다.

스승인 포은 정몽주가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李芳遠, 뒷날 태종) 일 파에게 살해당할 때 제자인 선생은 영남 지방 안렴사(安廉使, 지금의 도지사)로서 순찰 중이었다. 비보를 받은 선생은 그 자리에 안렴사 직인을 파묻고, 사흘 동안 통곡을 한 끝에 세상과 인연을 끊었다. 이성계가 왕이 된 후 여러 번 불렀지만, 선생은 "더러운 말을 들어 귀가 더러워졌다"면서 맑은 냇물에 귀만 씻었다. 물론 이성계의 부름에는 따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 냇물을 세이천(洗耳川)이라 불렀는데, 지금의 단촌면 세촌리의 이름도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돌에 새겨져 있는 그의 시 두 편이 답사자의 눈길과 마음을 끈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들기 이전이었으므로, 그가 남긴 시는 당연히 한시(漢詩)이다. 후손들이 세운 유시비(遺詩碑)에는 한시는 물론 우리말로 옮겨진 글도 새겨져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젊은 후손들도 그렇고, 웬만한 답사자들도 그 뜻을 읽어내지 못할 터이니, 우곡서원과 유시비를 건립한 이들의 세심한 배려가 돋보인다.

淸風懷靖節 黃花祭夷齊 
맑은 바람은 전원생활을 즐기던 도연명을 생각하게 하고
가을의 황국화는 백이 숙제의 높은 절개를 그리워하게 하는구나

한시를 읽고 나서, 그 아래에 적혀 있는 한글 번역시도 읊어본다.

樹含紅色繡紋如 可惜丹心日送虛
世上深情樽有酒 性中近思道遺書
나무는 붉은빛을 머금은 듯하건마는
나의 일편단심은 날로 허송함이 애석하구나
세상에 깊은 정을 풀기에는 술독에 술이 있고
내 마음속에 지닌 상념은 도덕의 글이 끼쳐 있네

더러운 말을 들었으니 귀를 씻어야겠다 이성계가 벼슬을 하라고 하자 오국화 선생은 "더러운 말을 들었으니 귀가 더러워졌다. 귀를 씻어야겠다"면서 시냇가로 내려갔다.
▲ 더러운 말을 들었으니 귀를 씻어야겠다 이성계가 벼슬을 하라고 하자 오국화 선생은 "더러운 말을 들었으니 귀가 더러워졌다. 귀를 씻어야겠다"면서 시냇가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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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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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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