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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하지 못하면 도태된다. 자연에서건 사회에서건 마찬가지다. <나꼼수>의 '정봉주 나와라' 비키니 시위 논쟁 중에 페미니스트 단체들의 지지 철회 성명도 나왔고,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의 '진보남의 마초성'이 문제라는 진단도 나왔다. '마초이즘'이라는 이상한 문자까지 써 가면서 말이다. ('마초이즘'에 대해서는 이글 맨 끝의 사족을 보아 주시라.)

20세기는 자본주의, 민주주의와 함께 여권(女權) 신장의 시대였다. 특히 여권운동은 참정권 확보를 시작으로 교육, 경제 등의 거의 모든 영역에서 남녀간 기회와 성취 격차를 현저하게 좁혔다. 대단한 진보다. 역사상 그만큼 크고 오랜 불평등이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 정도로 줄어든 것은 유래가 없다. 아직 배가 고프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양극화를 낳고 독재가 민주주의를 사칭했듯이, 여성운동도 짙은 그림자를 남겼다. 성간 격차를 좁히기 위해 성대결을 부추겼기 때문이다.

20세기 여성 운동의 성공은 두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페미니스트'와 '마초'가 그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자'나 '여성' 같은 평범한 말을 제치고, 있어 보이는 라틴어 어원의 '페미닌(feminine)'을 정체성으로 삼았다. 그리고 역시 평범한 남자나 남성 대신 '마초(macho)'라는 스페인어로 남성을 낙인 찍는 데에 성공했다. '마초'는 "짐승의 수컷"을 가리키는 말이다. "짐승 암컷"을 가리키는 '엠브라(hembra)'와 짝을 이루는데 스페인어권을 제외하면 '마초'는 알아도 '엠브라'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마초'라는 말은 영어 사전에도 외래어로 올랐고 스페인어 사전조차 "나대는 남자"라는 뜻을 추가해야 했다. 페미니즘의 영향력이 이 정도다. 게다가 이 낙인은 효과가 크다. 수컷이 아니라 '남성'으로 대접을 받으려면 페미니즘에 동조하지 않으면 안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요즘 '마초'는 '좌빨'이라는 말과 쓰임새가 비슷하다. 빨갱이가 아니어도 그렇게 낙인 찍히면 쪼그라들게 되듯이, 일단 '마초'로 찍히면 대화는 물론 운신의 폭까지 좁아든다.

인정하자. 남자들 중에는 허세를 부리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평소 얌전하다가도 한 번씩 나대보는 남자들도 있다. 이런 남성들을 모조리 마초라고 불러도 좋다. 그런데 그 마초들은 왜 그렇게 나대는 것일까? 그건 혹시 암내 풍기며 공작처럼 단장하고 기다리는 튼실한 암컷, 엠브라 때문이 아닐까? 동물의 세계에서는 당연히 그렇다. 그런데 인간 사회에는 마초만 있고 엠브라는 없는 것일까? 혹시 연간 8조2천억 원에 달하는 화장품 시장, 그리고 물 건너 뉴욕타임스(2011년 11월 4일)까지 소개됐던 19-49세 한국 여성 5명 중 1명이 성형수술을 받았더라는 조사 결과가 한국의 엠브라들과 상관이 없는 것일까?

오해마시라. 나는 엠브라의 암내에 비판적이지 않다. 화장품과 성형 수술이 자신감을 주고, 괜찮은 직장을 얻고, 좋은 짝을 만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내가 왜 그걸 반대하겠는가. 다만 나는 엠브라의 암내에는 관대하면서 마초의 허세에만 비판적인 페미니스트들이 불만일 뿐이다. 암내와 허세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또다시 오해 마시라. 나는 페미니스트들이 앞으로 마초 뿐 아니라 엠브라도 비판함으로써 균형을 맞추라는 게 아니다. 엠브라는 엠브라대로, 마초는 마초대로 그냥 놔두라는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어떤 페미니스트들은 마초보다 훨씬 더 마초적이라는 점이다. 마초를 비판하다 보니 그들보다 더 마초스러워져야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런 페미니스트들을 마초 페미니스트라고 부르는데, 남성에게 마초 낙인을 남발한다는 특징을 공유한다. 이들과의 대화는 가급적 피하는 게 좋다는 게 그간의 경험이었다. 서로 기분만 상할 뿐 남녀평등 구현에 별반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말이 나온 김에 마초 페미니스트들에게 한 말씀 드리자. 남자들에게 '마초' 낙인 좀 찍지 마시라. 여자들을 '엠브라'로 낙인찍으면 기분이 좋겠는가? 비록 그들이 진짜 엠브라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입장 바꿔서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남성을 적으로 삼아서 남녀평등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해도 앞으로는 그러기 어려울 것이다. 남녀평등을 더 진척시키려면 인제 남자들의 도움이 필요할 단계가 아닐까? 적이 아니라 파트너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아직도 '마초이즘' 운운하면 어떤 마초가 동조하고 싶겠는가. 마초 페미니즘은 그만 졸업하고 인제 남녀평등 동반운동으로 진화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이다.

암튼, 당분간 내 꿈은 소박하다. 나는 누구한테도 '마초' 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 더이상 남에게 엠브라니 마초 페미니스트니 하는 소리도 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나꼼수>를 '마초이즘'으로 몰아붙이는 세력이 있다면 나는 더더욱 화가 날 것 같다. 그래서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하다못해 이렇게 글질이라도 계속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한 느낌을 갖고 있는 중이다.

"마초 소리 좀.... 그만 해. 씨바. 끝"

덧붙이는 글 | 아참, 사족..., 영어 사전에는 '마초이즘(machoism)'이라는 말이 없다. <메리엄 웹스터>에도 없고, <옥스퍼드 잉글리시>에도 없고, <아메리칸 헤리티지>에도 없다. 다만 이 사전들은 스페인어 machismo(마치스모)를 같은 뜻의 외래어로 싣고 있다. 포르투갈어도 같은 스펠링이다. 영어판 위키피디아나 어번 레전드 사이트들을 보니까 아마도 일부 미국인들이 스페인어 마초(macho)에다가 영어식 어미(-ism)를 붙여서 제멋대로 만들어 쓰고 있는 중이 아닌가 추측될 뿐이다. 어째서 한국인이 일부 미국인의 일탈적 언어 관행까지 따라 하는 것일까? 차라리 '마초주의'라고나 하던지. 외국 것이라면 틀린 것까지 베껴 쓰면서 잘난 척하는 습성은 '어륀지'나 '마초이즘'이나 같은 과(科)가 아닌가 싶다.



#페미니즘#나꼼수#민주통합당#마초#엠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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