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는 안내견 슬기의 시각에서 쓰여진 기사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안내견 시민기자 김슬기입니다. 제가 겪은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들려 드릴게요. 무거운 발걸음과 마음을 추스릴 길 없어, 무너지는 가슴으로 아빠 옆에 웅크려 누웠습니다. 지나간 오늘 하루가 악몽 같습니다.
"불렀는데 왜 안 쳐다봐, 똥개 새끼가..."오늘 오후, 아빠를 모시고 프로그램 참여 차 약속 장소로 갈 때였습니다. 오후 두 시밖에 안 되었는데, 전철역엔 사람들이 제법 많았습니다. 요즘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자주 피로를 느낍니다. 지하철을 기다리면서 플랫폼 바닥에 누워 쉬었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난데 없는 취객의 고성 섞인 욕설이 날아듭니다.
"야... 야, 이 새끼야! 오? 요게 쳐다보지도 않네."설마 이게 저를 향한 막말은 아니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에 저는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습니다.
"야, 이 새끼야. 부르면 대답을 해야지, 쳐다보지도 않아? 어, 저 새끼가..." 악을 써가며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그게 저를 향한 욕설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이쪽을 쳐다봐야지. 내가 부르는데도 고개 한 번 안 돌려? 저런 똥개를 보았나."계속 악을 쓰는 취객의 주정을 뒤로하고 우린 때마침 달려온 전철에 몸을 실었습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가슴이 또 먹먹해집니다. 다시 전철 바닥에 널부러져 누웠습니다.
갑자기 지난 5월 28일의 아픈 기억이 생각납니다.
대학로에서 '댄스 페스티벌(dance festival)' 촬영을 마치고 멘토 일행들과 맛있게 점심 식사를 하고, 커피도 한 잔씩 나눈 후 집으로 돌아올 때였습니다. 경인선 지하철이 만원이라, 동행한 멘토 오빠를 따라 제일 한가하다는 맨앞 칸에 탔습니다. 승객들로 발 디딜 틈도 없는 전철은 그야말로 '지옥철'이었습니다.
그렇게 부대끼며 한참을 가고 있는데, 구로역 쪽에서 취객 두 명이 비좁은 인파를 비집고 제 옆으로 탔습니다. 술 냄새는 진동을 하고, 두 취객의 큰 소리로 귀청은 떨어지는데, 잠시 있자니 한 취객의 발이 제 꼬리를 사정없이 밟아옵니다. 처음엔 깜짝 놀랐지만, 잠시 그대로 참으려 애를 썼습니다.
"아버지를 주먹으로 때리고... 무섭습니다"그런데도 취객의 거친 발은 치워지지 않으니, 제 꼬리는 끊어질 듯 아팠습니다.
"아빠, 저 좀 살려주세요. 누가 제 꼬리를 밟았어요."아픔에 겨워 질러대는 제 비명을 듣고 아빠가 제 꼬리를 만져봅니다. 그때까지도 치워지지않는 취객의 발을 만져본 아빠가 기겁을 했습니다. 그리고 놀라 소리칩니다.
"저리 비키세요. 제 안내견 꼬리가 밟혔잖아요.""응? 뭐야, 이건?"잠시 비틀거리던 취객의 주먹이 아빠의 얼굴을 향해 날아옵니다. 놀란 대학생 멘토 오빠가 중간에 막았지만, 가세한 다른 취객의 완력에 뒤로 밀리고 말았습니다.
"제가 뭐라 그랬기에 때려요? 전 그저 꼬리를 밟았기에 비키라고 한 것뿐인데."아빠의 울먹이는 소리가 제 가슴을 난도질합니다. 심장판막이식 수술을 두 번이나 받으셨기에, 저렇게 놀라거나 흥분하면 안 되는데... 아빠가 비명처럼 멘토 오빠를 향해 외칩니다.
"준형아, 우리 다음 역에서 내리자."그런데 이번엔 젊은 취객이 아빠에게 엉겨붙습니다.
"뭐? 내려서 한 판 붙어보자는 거요? 그래요 다음 역에서 내려 한 번 해봅시다.""누가 선생님 보고 그랬습니까? 그냥 우리 일행한테 다음 역에서 내리자는 거였지."아빠의 겁 먹은 음성이 떨리며 거의 울부짖는 것 같았습니다. 다시 취객의 비틀거리는 주먹이 아빠의 얼굴로 날아들고, 잠시 사람들 틈에서 뒤엉켜 지옥 같은 난투극이 벌어졌습니다.
너무도 놀란 아빠가 반대편 쪽으로 피하고 복잡한 사람들 사이에서 거리가 좀 떨어지자, 취객 일행은 분을 삭이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부천역에서 그들은 내렸습니다. 놀란 가슴을, 그 아픈 설움을 어떻게 한 두 문장으로 다 담아낼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우리 부녀는 그저 방바닥에 쓸어져 울고 또 울었습니다.
휘파람 불고 쫓아오고... 눈물이 펑펑 났어요이런 쓰라린 기억을 간직한 우리이기에, 전철역의 취객이 두렵습니다. 그런 아픔을 회상하며 두 눈을 감고 가슴을 가만히 진정시키는데, 이번엔 또 누군가 저를 향해 혀를 차고 휘파람을 불며 관심을 유도합니다.
그러나 놀라고 화가 난 뒤라 두 눈만 감고 가만히 엎드려 있는데, 그 승객이 곧장 제게로 와 큰 박수를 치며 발로 바닥을 두드립니다.
"그러지 마세요. 애가 놀랍니다."아빠의 점잖은 한마디에 그 승객이 물러가며 "그 개는 애기 때부터 데리고 다니는 겁니까?"하고 묻습니다.
"아니요. 애는 안내견이라, 훈련을 다 마친 뒤에야 제게로 왔지요."그제야 조용해진 승객이 물러갑니다. 그 승객이 잘못한 건 별로 없지만, 우리 부녀는 그저 모든 것이 짜증스럽고 서럽기만 합니다. 피곤한 몸과 마음으로 힘겹게 전철역으로 나오는데, 또 어떤 아줌마의 이야기가 제 뒤를 계속 따라옵니다.
"이쁘다. 이쁘네. 잘 하지.....""이그! 아줌마가 말 안해도 할 건 다 하니까 이제 그만 먼저 가 주세요."그러나 끝장을 보고말겠다는 듯, 아줌마의 수다성 잔소리가 이어집니다. 참다 못한 아빠가 제 견줄을 단단히 감아쥐고 "멈춰"를 외칩니다. 저도 너무 힘들어 멈춰서는데, 그 아줌마가 저를 만질 듯 가깝게 다가옵니다. 질색한 제가 방향을 바꾸고 우리는 다시 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너무 피로에 지치고 약속 시간이 늦어 버린 까닭에 아빠가 장애인 콜택시를 불러 탑니다. 택시가 도착하기 무섭게 재빨리 올라타고 다시 차 바닥에 눕습니다. 잠시 그렇게 시체처럼 누워 있으니 약속 장소에 이내 도착합니다. 얼른 내려 아빠를 안내하려고 급히 돌아서자니 '삐끗' 제 발이 놀라 꺾이고 맙니다.
'깨갱' 아프기도 했지만, 오늘 하루가 하도 서러워 큰 소리로 울부짖습니다.
"어, 그 개 짖기도 하네요?"의아한 듯 묻는 기사님에게 아빠가 대충 얼버무려 말씀하십니다.
"원래 안 짖는데, 발이 크게 삐었나봐요."얼마나 아플까 걱정하기보다, 놀라 짖어대는 제 소리가 더 이상한가 봅니다. 기사님의 한마디가 또 서운하게 목에 가시로 박혀옵니다. 제 기분을 알아차린 아빠가 황급히 요금을 계산하고 내려섭니다.
"슬기야, 많이 아팠니? 오늘 참 힘든 하루다, 그치? 그렇지만 네가 옆에 없었다면 아빤 아마 그냥 쓰러지고 말았을 거야. 그래도 네가 있어 앞에서 안내해 주고, 아빠의 아픔을 함께 해주어서 이렇게나마 살아가는거지. 슬기야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순간, 뜨거운 무언가가 제 볼을 타고 흐릅니다.
"뭔, 그런 서운한 말씀을. 저도 아빠가 있어 행복하고 얼마나 아빠를 사랑하는데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에겐 '고맙다'는 말 안 하는 거래요. 알았죠?""그래, 알았어."다시 힘을 가누고 걸음을 북돋어, 앞으로 나아갑니다. 안내견의 본분을 다 하려. 사랑하는 아빠의 딸로 살게 된 운명에 감사하며.
덧붙이는 글 | www.noulpoet.kr 제 홈피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