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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쨍그랑!"

 

일곱 살 둘째 아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자신이 직접 만든 밥그릇이 예닐곱 조각으로 부서졌기 때문이다. 밥상에서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 미워 몇 마디 잔소리를 했더니만 몸을 이리저리 비틀다 결국 밥그릇을 깨트리고 말았다. 아빠가 파편을 모두 수거할 때까지도 아들은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 똑같은 그릇을 다시 구워보자고 약속한 것은 아들의 눈물을 그치게 하기 위한 임시방편 고육지책이었다.

 

아들은 아침저녁으로 밥그릇을 떠올렸다. 언제 공방에 갈 거냐고 보채기도 했다. 큰 아들도 옆에서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되는 거 아니야?"라며 거들었다. 형제의 '협공'을 더 방치하다간 가장의 신용등급이 추락할 듯하여 서둘러 도예공방을 찾았다. 아들은 고사리 손으로 진흙을 주무르며 새로운 밥그릇을 빚었다. 아빠도 아들 곁에서 사발과 술병을 만들었다. 아들은 그릇 밑에 이름을 적었고, 아빠는 사발 표면에 문양을 새겼다.

 

지난 5월 어린이날의 일이다. 아들은 야구방망이를 사달라고 했다. 인터넷을 살펴보니 3만 원이면 그런대로 쓸 만한 야구방망이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뭔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만한 물건을 주고 싶어 목공공방을 찾았다. 물푸레나무 원목 값과 공구 사용비용으로 2만 원을 지불했다. 대패로 세 시간을 깎고 사포로 한 시간을 문지르자 그런대로 야구방망이 생김새를 갖췄다. 방망이 위에 아들의 이름을 쓰고 야구공 그림을 그려 선물했다.

 

언제부터인가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가게에서 돈을 주고 사는 걸로만 알게 됐다. 무엇이든 새 것을 선호하고 비쌀수록 좋은 것이라 여겼다. 그런 생각은 나도 모르는 사이 아이들에게도 전해진 모양이다. 내가 문방구가 아닌 재활용품 쓰레기통에서 미술시간 준비물을 구할 때면 아들은 놀라곤 한다. 어쩌다 이런 저런 중고품을 끼워 맞춰 장난감이라도 만들면 무슨 '발명왕'처럼 추켜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우리는 그렇게 자랐다. 지금이야 당연히 가게에서 팔고 사는 물건이지만 그때는 어지간하면 동네에서 조달했다. 찰흙은 개울가에서 파내고, 곤충은 숲에서 채집하고, 물감은 이웃에서 빌렸다. 다 같이 준비하고 공동으로 쓰면서도 모두 자기 물건처럼 아낄 줄 알았다. 비록 제 이름 붙은 물건이 없더라도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나는 그 시절 배운 것이 많다. 자투리땅을 일구어 이웃과 나누는 인심을 엿본 것도 그때였다. 얼마 전까지 그들의 마음을 기억하며 청계산 밑에서 텃밭을 가꾸기도 했다. 어깨 너머로 농사일을 배운 덕분에 지인들과 더불어 봄여름 채소를 제철에 맛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장마가 시작되고 텃밭 출입이 줄어들면서 텃밭은 순식간에 풀밭으로 변했다. 가을이 오면 크게 한턱 쓰겠다던 약속도 허언이 되고 말았다.

 

지난겨울 폭설이 내리자 아들은 눈썰매장에 가자고 했다. 추운 날씨에 30분 이상 줄을 서야만 30초 남짓 미끄러지는 기회를 얻는 모양새가 아쉬워 아예 눈썰매를 하나 사들고 동네 뒷산에 올랐다. 아침부터 점심까지 아무도 없는 산길을 오르내리며 수십 번 뒹굴면서 아들은 새로운 재미를 맛보았다. 돈이 없어도, 화려한 시설이 아니라도, 재미있게 놀 수 있다는 걸 체험한 것이 가장 큰 소득일 듯하다.

 

그날 아들의 웃음을 보며 어린 시절 고향 마을의 동네 아저씨를 떠올렸다. 연장통 하나 들고 온갖 물건을 다 만들던 아저씨는 그 시절 나의 우상이었다. 내가 가지고 놀던 팽이, 새총, 썰매, 방패연도 다 그분의 손을 거쳤다. 뭔가 하려고 해도 마음만 앞설 뿐 좀처럼 몸이 따르지 않는 요즘 나는 자주 아저씨를 그리워한다. 올 겨울엔 나도 썰매와 방패연을 만들어야겠다.


#공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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