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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최고 조사관으로 손꼽히던 강모 직원의 '계약해지'에 항의해, 인권위 직원 80여 명이 1인 시위, 언론 기고, 자유게시판 게시, 탄원서 제출 등을 진행했다. 인권위는 이 중 11명에 대해 9월 2일 자로 정직 및 감봉 1~3개월 등의 징계 처분을 내렸다.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를 앞장서 보호해야 할 인권위에서 발생한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징계자들은 공무원의 정당한 표현의 자유를 인정받기 위해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정직' 처분을 받은 직원의 '정직한 일기'를 싣는다. <편집자말>
 정직한 동행 - 지리산 천왕봉
정직한 동행 - 지리산 천왕봉 ⓒ 육성철

네 명의 중징계 정직자와 한 명의 '사실상' 해고자가 지리산을 찾았다. 백무동을 떠난 일행은 어느 도인의 12년 수행이 마지막 고비를 넘지 못했던 '가내소폭포'에서 첫 숨을 골랐다. 폭포의 양끝에 밧줄을 묶고 눈을 감은 채 줄 위를 건너던 도인은, 마고할매의 셋째 딸인 '지리산녀'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해 끝내 물에 빠지고 말았다. 도(道)의 길을 버린 수행자가 떠나면서 던진 말, "에이, 나의 도는 실패했다. 나는 이만 '가네'"가 이 폭포 이름의 유래다.

 

12년간 도를 품었던 사람의 내공마저 그리 허무하게 내치는 지리산이다. 백무동에서 세석으로 뻗친 물길 곳곳에 그처럼 처연한 전설이 가득하다. 지리산은 속인들에게 겉모습을 슬쩍 내비칠지언정 쉽사리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다만 찾아오는 이들을 깊숙이 품어주고 그들이 제 길로 돌아갈 수 있도록 인도할 뿐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가 산에 들면 달라져서 돌아온다"는 뜻의 지리산(智異山)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지리산을 찾은 것이 60여 회. 혼자 이 길을 따를 때는 숨 한번 고르지 않고 지나치던 바위에서 20여 분 넘게 탁족의 후련함을 즐겼다. '정직한 동행'에 나선 다섯 나그네는 여러 고장의 막걸리를 차례로 맛보며 일상의 탈출을 반겼다. 남들이 일할 때 노는 재미는 미안함과 동시에 묘한 위안을 주기도 한다. 지인들에게 보내는 지리산발 메시지는 부러움과 원망이 뒤섞인 채 끝없이 되돌아온다. 이쯤에서 수신상태가 고르지 못한 휴대폰을 끈다.

 

산중의 온기는 여름과 가을의 중턱을 지난다. 길손은 해가 보이는 길에서 더위를 탓하다가도 숲의 서늘함에 놀라 걸음을 재촉한다. 유시를 넘겨 삼복에도 한기가 느껴진다는 한신폭포(寒新瀑布) 본류로 다가서자 차가운 기운이 완연하다. 혹자는 <초한지>에 나오는 중국의 한신 장군이 이곳으로 피신했다는 야사에서 연원을 찾지만 이는 그만큼 계곡이 깊고 수려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실제로 남명 조식과 점필재 김종직 등이 이곳을 지나며 시와 기행문을 남겼다.

 

세석평전엔 어둠이 깔리고 촛대봉엔 보름에서 이틀 지난 하현달이 떴다. 네 명의 징계자와 한 명의 '사실상' 해고자는 삼겹살을 굽고 막걸리를 돌렸다. 누군가의 입에서 '작은 행복'이란 말이 나왔고 이를 계기로 저마다의 삶에서 잊지 못할 기억들이 쏟아졌다. 바로 옆에서 함께 일하던 동료의 삶에서 묻어나는 짙은 향내를 맡았다. 과거를 돌아보는 진지함에 반했고 미래를 기약하는 당당함이 반가웠다.

 

내가 처음 세석을 찾았을 무렵 평전은 황무지였다. 사람들은 산을 제 집 앞마당처럼 거칠게 다뤘다. 인간이 버린 음식과 분뇨로 세석의 명물인 철쭉이 썩고 주목이 시들었다. 사람의 출입을 막고 생태의 복원을 기다린 지 20여 년, 해가 다르게 울창해지는 평전의 변신이 기특하다. 사람의 상처를 사람이 치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며, 오늘날 남녘의 큰 강마다 벌어지고 있는 참상의 후유증을 헤아린다. '병이 있으면 고치는 약도 있는 법', 드라마 <허준>에서 허준의 스승 유의태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술병이 비어갈 무렵 스마트폰으로 노래가 흘렀다. 정태춘의 <92년 장마, 종로에서>가 나오고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뒤를 따랐다. 정태춘은 지금 노래를 부르지 않고, 김광석은 15년 전 세상을 떠났다. 술에 취한 다섯 사람은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추억의 동행에 빠져들었다.

 

흐르는 것이 어디 세월뿐이랴.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정태춘의 노래가사는 저마다의 삶을 풀어내는 촉매로서의 구실을 제대로 수행했다.

 

이른 새벽. 지는 별빛 사이로 촛대봉을 떠다니는 떼구름을 보았다. 바람에 밀리는 구름의 모습 따라 산세는 시시각각 달라졌다. 우리들이 걸어가는 길도 저 구름과 같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 명의 중징계 정직자와 한 명의 '사실상' 해고자는 그 길을 따라 천왕봉으로 갔다.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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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월간 인권>의 주요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게재하고, 우리 사회 주요 인권현안에 대한 인권위의 의견 등을 네티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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