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에 짜증만 높아가는 계절입니다. 에어컨 없는 집을 나서 냉커피가 기다리는 동네 카페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테이블 열 개 남짓한 작은 카페. 부모님 연배의 부부가 운영하시는 작은 카페입니다. 
어느덧 단골이 된지도 1년. 공부가 잘된다는 핑계로 거의 눌러앉다시피 해 이제는 군식구가 되었습니다. 점심 무렵부터 해가 질 때까지 책이나 신문을 읽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길 건너 중국집 사장님, 맞은편 방앗간 사장님과도 친해졌습니다. 짬뽕에 공깃밥 하나를 더 얻어먹거나 주전부리로 갓 볶은 콩을 얻는 일도 종종 생깁니다.

이날도 평범한 오후였습니다. 해가 잠깐 떴다가 구름이 낀 날씨라 더위와 습기가 끈적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찬물을 마시며 책을 읽는데 여고생 둘이 입구에서 서성거리고 있습니다. 곧 문을 열고 들어온 학생들. 갑자기 사장님께 이상한 제안을 하더군요.

문화상품권으로 팥빙수 사먹을 수 있나요?

"저… 아저씨… 문화상품권 되나요?"
"응? 뭐라고?"

팥빙수를 먹고 싶은데 돈이 모자라 망설이다 문화상품권으로 팥빙수 사기에 도전한 것이었습니다. 저희들도 민망한 부탁인 걸 아는지 수줍게 말을 얼버무립니다. 그러다 사장님과 제가 관심을 보이자 말문이 터졌습니다.

"이걸로 책도 살 수 있고요. 영화도 볼 수 있어요. <블라인드>도 볼 수 있는데. 아, <블라인드>는 영화예요. 그리고 쇼핑몰에서 뭐 살 수도 있어요. 헤헤."

사실 요즘 같은 시절에 만 원으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요. 만 원 아래의 책 구경하기도 힘들 뿐더러 혼자서 영화를 볼 일도 적습니다. 쇼핑은 말할 것도 없죠. 그래도 혹여나 팥빙수 한 그릇 먹을 수 있을까 싶어 열심히 떠들어댑니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꼭 문화상품권 외판원 같았습니다. 열심히 홍보하는 문화상품권을 들여 봤습니다. 혹여나 영악한 요즘 아이들이 이미 온라인에서 사용하고 난 종이조각을 가지고 사기를 치려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요.

다행히 문제는 없는 상품권이었습니다. 대신 책가방 안에서 얼마나 굴렀는지 귀퉁이는 찢어지고 주름이 자글자글하더군요. 그래도 쓸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드리니 아이들 얼굴에 화색이 돕니다.

혹여나 뭐라고 할까 군식구인 제 한마디에도 신경을 쓰고 비위를 맞추려 애를 쓰는 모습이 귀여웠습니다. 대신 상품권을 사주려고 했지만 수중엔 돈이 얼마 없었습니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해보니, 팥빙수는 사천 원. 두 그릇을 내주고 나머지는 어음할인처럼 처리하시려나? 한 그릇만 주시고 거스름돈을 주시려나?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사장님의 답은 제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그건 넣어뒀다 책 사는 데 쓰고, 내가 그냥 한 그릇 만들어줄게."

사실 평소에 순찰을 도는 경찰차가 보이면 따뜻한 커피를 건네고, 카페 바로 옆 공사현장 소음 때문에 시끄럽고 짜증날 법도 한데 고생한다며 현장사무실에 냉커피를 주시던 사장님이었습니다. 그런 사장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었습니다. 의외의 답에 아이들이 더 당황했습니다.

"안 돼요. 이거라도 받아주세요. 저희가 죄송해서요."
"괜찮아. 그냥 아무 말 말고 앉아서 먹어."

사장님이 실랑이에서 이겼습니다. 사장님은 평소보다 많은 양의 팥빙수를 가져다주셨습니다. 부끄러워하며 자리에 앉은 학생들은 근처 고등학교의 2학년이라고 했습니다. 얌전히 팥빙수를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인사를 하고 카페를 나서는 학생들에게 사장님은 "그걸로 꼭 책 사야 해"라며 배웅해주셨습니다.

전에도 카페에 왔던 학생들인데 얼마나 먹고 싶으면 왔겠냐며 말씀하시는 모습이 인자해보입니다. 책을 다시 읽으려 앉았는데 스마트폰이 보여 트위터에 글을 썼습니다. 기분 좋은 일을 공유하고 싶기도 하고, 카페 홍보라도 조금 되면 좋겠다 싶어 몇 줄 남겼습니다.

 '팥빙수를'이라고 써야할 것을 '팥빙수을'이라 잘못 적은 덕에(?), 글이 얼마나 퍼졌는지 검색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정확한 가늠이 되지 않았습니다.
'팥빙수를'이라고 써야할 것을 '팥빙수을'이라 잘못 적은 덕에(?), 글이 얼마나 퍼졌는지 검색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도 정확한 가늠이 되지 않았습니다. ⓒ 박상익

삭막하고 차가운 세상, 작지만 소중한 이야기를 그리워했나봅니다

팔로워가 86명인 트위터에 글을 올렸으니 86명에게만 글이 갈 것이란 생각은 순진한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에 'RT' 표시가 타임라인을 채웁니다. 놀라울 정도로 글이 퍼져나갔습니다.

사장님 칭찬부터 자신의 옛날이야기, 한때 단골이었던 손님의 추억, 동네 주민 등. 팥빙수 한 그릇에 이렇게 많은 반응이 나올 줄 몰랐습니다. 괜한 일을 했나 싶어 사장님께 조심스레 말씀드렸습니다. 사장님께서도 놀란 눈치셨지만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면 이런 일에도 이렇게 반응들을 보이겠어"

집에 돌아온 후에도 리트윗의 행진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급기야 소설가 공지영씨도 리트윗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공지영 작가의 팔로어만 14만5천 명이고, 그로 인한 리트윗은 또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니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어찌됐던 간에 좋은 이야기가 많이 퍼져 감사인사를 드리니 답글이 돌아왔습니다.

"그런 따뜻한 이야기도 없으면 어떻게 이 시대를 버티겠어요. 감사해요."

 공지영 작가의 답글을 보고 나니 우리 사는 삶이 얼마나 팍팍한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뭔가를 잃은 채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공지영 작가의 답글을 보고 나니 우리 사는 삶이 얼마나 팍팍한가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 모두 뭔가를 잃은 채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 박상익

사장님과 공지영 작가의 말이 맞았습니다. 우리는 어느새 차갑고 삭막한 세상을 살고 있었나 봅니다. 대신 어린 학생들에게 건넨 시원한 팥빙수 한 그릇이 세상살이에 지친 사람들의 마음에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자 따뜻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별일 아닌 것이 별일이 되어버린 어느 날 오후의 풍경이었습니다.


#팥빙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