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언제 적 크리스마스 카드인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윤경이 초등학교 때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연한 녹색 위에 칼라 색연필로 직접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입니다. 성탄절 즈음에 제가 분명 받은 것일 테지만 기억이 아물아물합니다. 그만큼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오늘은 아내가 대청소하는 날입니다. 서재 이곳저곳을 정리하고, 안 보는 책은 따로 박스에 모으고, 주제별로 책을 배치하면서 책장 정리도 다시 합니다. 대청소를 하고 난 뒤, 집은 마치 면도를 한 남성의 얼굴처럼 말쑥해집니다. 나는 서재를 쫓겨나 아이들 방에 와서 주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내가 큰 소리로 웃으며 아이들 방으로 왔습니다. 웃음소리로 보아 무슨 통쾌한 일이라도 있는 모양입니다. 아내의 손에는 손바닥 크기의 종이가 들려 있었습니다. 아내는 그것을 보고 의미를 부여하며 설명을 곁들였습니다. 그 성탄 카드의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To 아빠께. 
아빠 곧 있으면 크리스마스예요!
이 카드를 보시고 화내시면 안 돼요, 아빠?
제가 지금 용돈이 필요하거든요.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서 용돈을 좀 주시면 좋겠어요.^8^
저 성탄절 발표 연습 열심히 할게요
Merry Chrismas!

그리고 그 밑에 휴대폰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따르릉" 휴대폰이 울립니다. 거기에 문자를 넣어 놓았습니다. "안 받으시면 돈 없다는 뜻." 휴대폰을 받지 않으면 돈이 없다는 뜻으로 알겠다는 의미 같습니다. 또 그림에는 아빠의 화난 얼굴도 곁들였습니다. 아이의 순수한 표현입니다. 카드를 전달했는데, 받지도 않고 휙 돌아서는 표정에, 머리 뚜껑(?)까지 열렸습니다.

열선까지 그려 넣어, 아빠가 몹시 화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용돈을 주지 못하겠다는 것을 넘어 그런 의도가 담긴 카드도 받지 않을 것이라는 아이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네모난 안경알은 아빠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고, 그 안에 그려 넣은 작은 눈동자는 아빠의 마음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카드 뒷장(윤경이에게는 첫 표지 면이 될 테지만)에는 카드의 총결산을 의미하는 또 다른 얼굴 하나를 그려놓았습니다. 윤경이가 바라는 아빠 상이 담긴 얼굴일 것입니다. 하트 모양의 큰 배경 그림 안에 활짝 웃고 있는 아빠 얼굴입니다.

안경은 같은 네모인데 초승달 모양의 눈동자를 그려 넣으니 전혀 다른 활짝 웃는 얼굴로 보이는 군요. 거기에다 "아빠", "LOVE"라는 글자를 아래 위에 배치함으로써, 그래도 변함없이 아빠를 사랑하겠노라는 다짐을 얹어놓았습니다.

미술 치료를 공부한 적이 있는 아내가 재미있어 하면서도 심각하게 말했습니다.

"여보, 당신도 이젠 성격을 좀 바꾸어야 하겠어요. 모두가 좀 부드러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잖아요?"

성격을 부드럽게 바꾸고 싶은 것은 저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생각같이 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윤경이가 초등학교 때 그린 크리스마스 카드를 킥킥대며 가져와서 저에게 보여주는 아내도 저의 변화를 기대하며 그것을 보여준 것일 터입니다.

얼마 전, 대학교 때 교외 동아리 활동으로 함께 했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제가 가장 가깝고도 친근하게 여기고 있는 선후배들입니다. 거기에서도 저의 투박한 말투가 도마 위에 올려져 얘기가 오갔습니다. 자존심 상했지만 변화의 작은 계기는 될 것 같다는 생각에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나이 오십 중반, 곧 환갑을 맞이해야 하는데, 이젠 모든 사람들을 포용하며 사랑을 나누어주는 당신이 되면 정말 좋겠어요."

아내가 한 주문이지만, 나를 아는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바람을 그가 대표해서 말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도 힘들지만 변화의 대장정에 오를 각오를 다집니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지인(知人)들을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위해서….


#크리스마스 카드#아빠 얼굴#성격 변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