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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녀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느낌이 들어요?"

"슬픈 느낌이 드네요. '운영전'의 주인공이 궁녀인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지도 못하잖아요. 고전 소설 중 운영전이 유일한 비극이라 '궁녀'하면 그 느낌만 들어요."

대학 때 국어를 전공한 이는 이런 문학적인 대답을 들려주었다.

"궁녀는 왕의 선택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여자, 사랑받지 못하는 여자, 불쌍한 여자. 이런 느낌이 드네요."

수학을 전공한 이는 이렇게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답변을 주었다.

그러면 실제 궁녀는 어떤 모습으로 역사 속에서 살아갔을까? 최근 출간된 김종성의 신작 <왕의 여자>(역사의 아침)를 보면 그 의문을 상당 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왕의 여자>라는 제목이 암시하듯이 이 책은 궁녀만을 다루지는 않는다. 역사 속 외국 궁녀의 사례도 언급한 후, 궁녀, 후궁, 왕후라는 세 개의 대단원으로 나누어 '왕의 여자'들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한다.

[궁금증①] 궁녀를 공노비에서 뽑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왕의 여자> 겉그림
<왕의 여자> 겉그림 ⓒ 역사의아침
김종성의 전작 <최숙빈>(부키)을 이미 읽은 사람이라면, 궁녀는 천민이었다는 설명이 결코 놀랍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읽지 않은 이들이라면 정말이냐며 눈을 동그랗게 뜰지도 모를 내용들이 이 책에 담겨 있다. 역사를 전공한 나도 궁녀는 양인인 줄 알고 있었다가 <최숙빈>을 읽고 나서야 궁녀가 주로 천민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니 말이다.
국민 드라마가 된 <대장금>에서 한상궁(양미경 분)이 천민 출신이기에 그가 수라간 최고 상궁이 되는 것을 다른 양인 출신 궁녀들이 인정하지 않는 장면이 나온다. 어머니 최숙빈이 양인인 궁녀가 아니고 천민 출신인 무수리였기에, 영조가 혈통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도 널리 퍼져 있다. 하지만, 이것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최숙빈은 무수리가 아닌 궁녀였다.

<왕의 여자>는 <최숙빈>에서 장희빈과 최숙빈을 설명하기 위해 잠깐 언급했던 궁녀의 이야기를 심도 깊게 다룬다. 저자의 설명을 차근차근 따라가다 보면 왜 천민인 공노비 중에서 궁녀를 선발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양인의 딸을 궁녀로 선발하는 것에 대한 양인들의 반발이 심했고, 관료들도 이를 견제했기 때문이었다.

딸이 평생 결혼도 못하고 죽도록 일만 하다가, 다 늙어서 죽을 때가 되면 궁에서 나와 홀로 죽어야 하는데, 어느 부모가 이를 좋다고 했을까? 그래서 궁녀는 만만한 공노비에서 선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궁녀의 심부름꾼인 무수리는 무엇인가? 궁녀는 양인이고, 무수리는 천민이기에 지위가 다른 것이 아니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무수리는 성인 여자 중에서 필요에 따라 뽑아서 쓰는 비정규직 비슷한 존재로 설명하고 있다. 궁녀의 수를 늘리려는 왕실에 대한 관료들의 견제 때문에 궁전에서 일하는 일꾼이지만 궁녀는 아닌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저자는 이 같은 유사궁녀에 무수리, 비자, 방자, 의녀 등이 있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궁금증②] 후궁의 선발 조건 중 가장 중요했던 것은...

 MBC 드라마 <이산>의 한 장면.
MBC 드라마 <이산>의 한 장면. ⓒ MBC

물론 왕의 승은을 입으면 후궁이 될 수도 있으니 궁녀는 양인들도 선호할 만한 자리가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사극 속 궁녀는 길을 가다가도 왕을 만나고, 궁궐 밖에 심부름 나갔다가도 왕을 만나 함께 위기를 극복해 나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궁녀는 왕의 승은을 입기는커녕 왕을 만나기도 힘들었다. 궁중의 일꾼인 궁녀는 고된 노동에 시달렸기 때문에, 왕의 승은을 입기 위한 모략이나 짜고 있을 여유가 없었고, 왕도 궁녀나 쫓아다닐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물론 승은을 입어 후궁이 되는 궁녀는 있었다. 다만 그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을 뿐이다.

이 책 제2장 후궁 편에서 한 가지 흥미로웠던 사실은 후궁의 선발 조건 중 미모보다 내면의 덕이 더 중요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이것을 유교적 인간관의 반영으로 해석하고 있다. 화려한 외양에 거부감을 가지고, 외면과 내면 모두가 중요하다고 한 공자보다 한술 더 떠서 조선은 내면을 더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왕이 예쁜 후궁을 선택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왕에게는 '예쁜 여인'보다 '예쁜 왕권'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었다. 왕은 미녀에게 둘러싸여 쾌락적인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우리들의 막연한 상상은 이렇게 현실과는 차이가 있었다.

저자는 왕들도 미모가 뛰어난 이들보단 현숙한 덕을 지닌 여인을 후궁으로 삼기를 원했다고 설명하면서, 그 사례 몇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저자의 설명에 전반적으로 동의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혹시 이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왕은 그 여인이 아름다워서 후궁으로 맞이하고자 한 것인데, 조선이 미모보다 덕을 더 강조하는 분위기라서 말만 그렇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도 '예뻐야 후궁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설명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궁금증③] 조선의 여인들은 '왕비' 자리를 탐내지 않았다

 영조의 어머니인 최숙빈을 소재로 해 만든 MBC 드라마 <동이>
영조의 어머니인 최숙빈을 소재로 해 만든 MBC 드라마 <동이> ⓒ MBC

왕비는 조선 여인 중 가장 높은 사람이니 누구나 되고 싶어 했을 것만 같다. 환갑이 넘은 영조가 새로 왕비를 간택할 때 응모한 처녀가 적었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것은 영조의 나이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는 헌종의 국혼 때에는 지원자가 10여 명이었고, 고종의 세자 국혼에도 지원자가 26명밖에 되지 않는 등 '왕비' 응모자가 적었다고 설명한다.

동화 <신데렐라>에는 왕자님의 신붓감을 찾기 위해 나라 안 처녀들을 모두 초청하고, 처녀들이 왕자비를 꿈꾸며 꽃단장을 하고 무도회에 참석하는 장면이 있다. 조선의 왕비를 간택하는 심사도 이렇게 처녀들이 경쟁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데 왜 응모자가 겨우 서른 명도 되지 않았던 것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경제적 부담과 정치적 부담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간택에 참석하려면 신부 후보자인 처녀를 꽃단장시켜 참석해야 하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간택은 이미 왕비 후보자가 내정된 상태에서 치르는 요식 행위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되지도 않을 간택에 들러리를 서는데 돈까지 많이 드니 참여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자칫 붕당 간 다툼에 휘말리면 집안에 큰 재앙을 가져올 수도 있다. 그래서 상당수의 집안이 다양한 이유를 대며 간택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한다. 왕비는 모든 여인이 선망하고, 경쟁을 해서라도 얻고 싶은 자리였을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은 이렇게 사실과는 달랐다.

게다가 잠자리마저도 국가의 공식 의례로서 거행되었다는 부분까지 읽으면 이제는 왕, 왕비, 혹은 후궁이 안쓰럽다는 생각마저 든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가장 사적인 시간에 장지문 밖에는 나이든 궁녀들이 자리해, 방안의 동정에 귀 기울이며, 성심성의껏 코치를 하여, 이 국가 의례를 보좌(?)했다고 한다. 왕비건, 후궁이건 정말 할 게 못 된다는 생각마저 든다.

 드라마 <동이>의 한 장면.
드라마 <동이>의 한 장면. ⓒ MBC

<왕의 여자>는 궁녀, 후궁, 왕비 등 매우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가볍게 읽는 책은 아니다. 저자는 궁녀, 후궁, 왕후에 대해 다양한 사료를 제시하고, 분석한 후 그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주장을 제기한다. 저자는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궁녀의 품계', '후궁이 생산한 자녀 수', '왕후 선발 유형' 등 다양한 표를 작성해서 제공했고, 부록으로 후궁과 왕후의 일람표를 작성했다.

전반적으로 조금 가볍게 쓴 학술 논문의 느낌이 난다. 하지만, 궁녀는 양인이다, 후궁은 예뻐서 뽑았다는 등 기존에 잘못 알려진 상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길더라도 조목조목 반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조선시대를 살아간 왕의 여인들에 대해 정확한 역사적 지식을 얻고자 하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한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왕의 여자> - 오직 한 사람을 바라보며 평생을 보낸 그녀들의 내밀한 역사 / 김종성 / 역사의아침 / 2011년 6월 / 1만3000원



왕의 여자 - 오직 한 사람을 바라보며 평생을 보낸 그녀들의 내밀한 역사

김종성 지음,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2011)


#왕의 여자#김종성#궁녀#후궁#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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