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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선생님이 학생을 무차별 폭행했다는 기사가, 하루는 학생이 선생님을 때렸다는 기사가 번갈아 올라올 정도로 학교라는 공간이 '배움터'가 아니라 폭력이 남무하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한쪽은 선생님을, 한쪽은 학생을 비판한다.

 

울산광역시에 있는 한 고등학교에서 수업시간에 문자메시지를 보내다 휴대전화를 압수당한 학생이 교무실까지 쫓아와 교사 얼굴을 주먹으로 때려 전치 8주의 중상을 입혔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언론들은 교권이 무너졌다고 한다. 특히 <조선일보>는 '교실이 무너진다'는 특별기획기사를 24일 이후 집중보도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교실이 무너진다'는 특집기획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원인을 '진보교육'에서 찾고 있다.
조선일보는 '교실이 무너진다'는 특집기획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원인을 '진보교육'에서 찾고 있다. ⓒ <조선일보>'InforGrapfhics'

<조선일보>는 24일 1면 <[교실이 무너진다] (1) 교사 97%(本紙·교총 3067명 설문조사) "수업중 문제학생 일부러 피한다"> 기사 이후 27일 1면 <[교실이 무너진다] [3] 여교사 수난시대> 등 '붕괴된 교실'을 집중보도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이러한 교실붕괴의 원인을 진보교육감들에게서 찾는다. 

 

곽 교육감은 학생인권조례의 부작용을 우려하는 질문에 '선진국들이 다 하는 걸 왜 우리라고 못하느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학교폭력과 산만한 학습분위기, 학력저하가 국가적 골칫거리로 돼 있다. 1980년대 후반 노동당 정부 주도로 직·간접 체벌을 금하는 '노터치' 규정을 만들었던 영국에선 작년 보수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 규정을 철폐하고 제한적인 간접체벌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수업 방해하는 학생의 인권만 인권이 아니다. 공부하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인권도 인권이다. 교사가 매를 맞아도 눈을 감고, 탈선하는 아이들을 인권을 명분 삼아 방치하는 나라의 앞날이 어떠하겠는가. 지금의 좌파 교육감들에게 그 무서운 책임을 묻게 될 날이 머지않아 닥칠 것이다. - <조선일보> 2011년 6월 25일자 사설 <진보교육이 '매 맞는 교사, 무너지는 교실'이었나> 가운데 

 

나 역시 <조선일보> 보도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나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 '사랑의 매'가 필요하다고 보는 사람이다. 아이가 셋인데 큰아이는 중1, 둘째는 초6, 막둥이는 4학년이다. 매를 한 번 들면 종아리를 3~5대씩 때렸다. 그런데 2년 전부터 매를 들지 않았다. 

 

막둥이가 2학년 여름방학을 마치고 학교를 가는데, 아침마다 울었다. 하루 이틀은 꾸중을 했다. 그런데 1주일이 지나도 울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아내에게 선생님께 전화를 드리라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아직도 어리광을 피운다며 막둥이에게 회초리를 들었고 막둥이는 울면서 학교에 갔다. 역시 문제가 있었다. 담임 선생님이 아이들을 때렸다. 종아리를 한 두 대 때리는 것이 아니라 발로 차고, 뺨을 때렸다.

 

막둥이는 직접 맞지 않았지만 반 동무들이 맞는 모습을 보고 공포에 질려버린 것이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과거에도 아이들을 심하게 때려 문제가 되었다고 했다. 학부모 몇 분과 교장 선생님을 찾아 몇 차례 면담을 했다.

 

무조건 선생님을 처벌하라고 하지 않았다. 해결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학부모에게 용서를 구하고, 아이들에게도 직접 자기 잘못을 시인하며 용서를 구했다. 이후 막둥이는 학교를 잘 다녔고, 선생님 역시 더 이상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매'는 선생님을 존경하는 어떤 마음도 생겨나게 하지 못했다. 그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나는 1973년에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1학년 때 만난 선생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초중고 12년, 대학 4년, 대학원 3년 동안 수많은 선생님을 만났지만 그분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단 하나다.

 

그분이 우리 집에 오셔서 하룻밤 주무시고 가셨는데 아이들이 엄마 젖을 먹을 때 엄마 젖가슴을 만지듯이 선생님 젖가슴을 만지면서 자겠다고 했더니 엄마처럼 자기 젖가슴을 내어주셨다. 아직도 그 잔영이 생생하다. 선생님은 회초리를 들지 않으셨지만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님 말씀을 잘 들은 것으로 생각한다.

 

초등학교 1학년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반문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그때 선생님이 나뿐만 아니라 우리 반 동무 모두에게 사랑을 듬뿍 주신 것이 지금도 선생님을 잊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매가 아닌 사랑이었다. 

 

보수세력과 <조선일보> 같은 언론들은 교실붕괴의 원인을 진보교육감들이 추진하고 있는 학생인권조례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교실붕괴는 진보교육감 때부터 새삼스레 시작된 것이 아니다. 진보교육감들이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김상곤 경기교육감을 빼고는 겨우 1년이다. 교실붕괴는 진보교육감 이전부터 있었다.

 

교실붕괴에는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줄세우기가 원인 중의 원인이라고 본다. 1등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는 학교. 옆에 있는 동무를 이겨야 내가 사는 학교. 같은 또래를 이겨야 내가 사는데 선생님이라고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배운다면 옆에 잠자는 동무가 있으면 깨운다. 선생님을 괴롭히면 가만히 두지 않는다.

 

1970년대 초중고를 살았던 분들은 경험했을 것이다. '너 죽고 나 살자'식 교육을 받지 않았던 세대들은 선생님을 존경하고, 동무들이 뒤떨어지면 손을 잡아주었다.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되면 필기와 정리를 잘하는 학생 노트를 모든 반 학생이 복사해서 함께 공부했다. 밤샘을 하면서 부족한 동무들을 도와주었고, 잘하는 학생은 직접 교수가 되어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모습이 없다. 왜 그런가? 내가 이기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기 때문이다. 1등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든 세상. 이게 교실붕괴 원인 중 원인이다. 우리 아이들을 사람으로 키워내지 않고 기계로 만들어내는 이 비극을 끝내지 않는 한 교실붕괴는 결코 막을 수 없다.


#교실붕괴#조선일보#진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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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울었고, 세상은 기뻐했다. 당신이 죽을 때 세상은 울고 당신은 기쁘게 눈감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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