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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6월 27일 오후 6시 40분]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무더기로 드러났다. 두개골에 총탄을 맞은 흔적이 뚜렷하다.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무더기로 드러났다. 두개골에 총탄을 맞은 흔적이 뚜렷하다. ⓒ 심규상

태풍 뒤끝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하늘이 갰다 흐렸다 한다. 이따금씩 비를 뿌리기도 했다. 낮때쯤 하여 밭에 나갔더니 가겟집 주인 강군이 비에 젖은 머리칼을 문지르며 나에게 인사를 한다. 그는 나에게 뉴스를 전하여 주었다.

"선생님, 지금 시내에 들어갔다가 오는 길입니다. 오늘 아침 38전선(全線)에 걸쳐서 이북군이 침공해 와서 지금 격전 중이랍니다. 그 때문에 시내에는 군인의 비상소집이 내렸고 거리가 잔뜩 긴장되어 있습니다."

나는 앞이 캄캄해지고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마(魔)의 38선에서 항상 되풀이하는 충돌의 한 토막인지, 또는 강군이 전하는 바와 같이 대규모의 침공인지 알 수 없으나, 시내의 효상(爻象)을 보고 온 강군의 허둥지둥하는 양으로 보아 사태는 비상한 것이 아닌가 싶다.... 하여튼 쌀값이 소두 한 말에 3천원의 고개를 바라보게 되고 민생고가 극도에 빠진 오늘, 이 닥쳐온 전란에 백성은 어떻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인가?

위 글은 보수 자유주의 사학자 김성칠(당시 서울대 교수)이 쓴 1950년 6월 25일자 일기의 일부다. 이 일기에는 북한군의 전면 침공을 감지한 지식인의 개인적 공포감과 함께 전란의 와중에 백성이 치러야 할 민생고를 염려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그리고 불행히도 일기의 예감처럼 그는 전쟁 중 신원을 알 수 없는 '괴한'의 총에 맞아 객사했고 남북한 백성은 5000년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의 참혹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끝나지 않은 전쟁, 한국전쟁

사과의 글
처음 게재된 기사에서는 박명림 교수를 전통주의적 관점의 학자로 분류하고 그가 6·25 전쟁이라는 용어를 쓰자고 주장한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경위야 어떠하든 이것은 전적으로 필자의 주의와 확인이 소홀한 데서 빚어진 오류입니다. 박명림 교수께 사과드립니다.
1950년의 전쟁을 가리켜 '6·25 전쟁'이라고도 하고 '한국전쟁'이라고도 한다. 전통주의적 관점에서는 전자를 선택하고, 수정주의적 관점에서는 후자를 선택한다. 여기에는 전쟁의 책임 소재 규명이라는 정치적 관점이 무겁게 개입되어 있다. 전통주의적 관점대로 전쟁을 '결정'한 것은 북한이고 이에 따라 책임 소재가 규명되어야 함은 마땅하다.

하지만 수정주의적 관점에도 합당한 근거가 있다. 수정주의적 관점을 처음 제시한 브루스 커밍스의 경우, 미국인으로서 6·25 이전 한국의 분단과정에서 자행된 자국의 책임을 거론했다는 점에서 양심적이라고 본다. 한국전쟁 연구의 권위자인 박명림 교수의 경우 '6·25전쟁'이라는 명칭보다는 차라리 종전 일자인 7월 27일을 기념하자고 주장함으로써 평화지향적인 학문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6·25 기념식 폐지를 주장한 바 있다(필자는 이 글에서 전쟁의 이름을 개시 날짜로 정하는 사례가 없다는 점, 전쟁의 책임을 굳이 명칭으로까지 규정할 필요는 없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으로 부르기로 한다).

남한에서는 아예 '전쟁'이라는 용어를 붙이는 일이 불온시되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만주사변 같이 '6·25 사변'이라고 하거나 임진왜란처럼 '6·25 동란'이라고 불렀다. 반면 북한에서는 '조국통일전쟁' 또는 '민족해방전쟁'이라고 했다. 결과 한국전쟁은 남측 입장에서는 '공산침략군의 야욕을 분쇄한 자유수호전쟁'이었고 북측 입장에서는 '미제의 침략을 응징한 조국수호전쟁'이 되고 말았다. 결과 아직도 남과 북에서는 '빨갱이'와 '괴뢰'라는 용어가 참담할 정도로 빈번히 사용되고 있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라는 클라우제비츠의 명제는 정당해 보인다. 하지만 이 명제의 주어와 술어를 바꿔 말해도 똑같이 정당하다. 즉 '정치는 전쟁의 연장'이라는 말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그러므로 작금 남과 북의 정치는 모두 한국전쟁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잔인하게 망각되어 버린 한국전쟁

필자가 읽은 한국전쟁 연구서 중에 세간에 잘 알려진 것으로 앞서 말한 박명림과 브루스 커밍스의 것 외에도 일본인 학자 와다 하루키의 <한국전쟁>(1999), 박태균의 <한국전쟁>(2005) 그리고 가장 최근에 간행된 것으로 미국인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콜디스트 윈터>(2009) 등이 있다. 이 밖에 개성적인 연구서로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가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의 저자들이 하나 같이 동의하고 있는 것은 한국전쟁은 '알려지지 않은 전쟁'이라는 점이었다.

필자는 한국전쟁에 관한 최선의 저작물로 마지막에 제시한 김동춘(성공회대 교수)의 <전쟁과 사회>(2000, 돌베개)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 책이야말로 '알려지지 않은 한국전쟁'의 실체를 여실히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에 관한 연구논문의 대부분은 오로지 전쟁의 발발 원인과 책임 규명, 특히 소련과 북한의 침략을 부각시키는 데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었고, 그 나머지 영역은 거의 황무지였다. 이데올로기가 객관적인 학술연구를 얼마나 황폐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였다.(김동춘, <전쟁과 사회> 서문에서)

김동춘의 <전쟁과 사회>는 기존의 전통주의적 관점과 수정주의적 관점을 동시에 거부한다. 그는 한국전쟁 연구서들이 지나치게 국가주의의 해석 틀에 갇혀 있다고 지적하면서 국가의 공식적 기억이 아닌 남북한 민중들의 체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한국전쟁의 실체를 논증하려고 했다. 그는 한국전쟁을 피난, 점령, 학살의 3단계 과정으로 나누어 살핀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전쟁의 체험을 기억하고 있는 민중을 만나러 현장에 찾아가는 것을 가장 중요한 연구 과제로 간주했다.

김동춘은 한국전쟁의 발발과 원인 규명에 맞춰져 있던 기존 연구, 즉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가'보다는 '한국전쟁이 전후 한국정치에 어떻게 반복, 재생산되었는가'에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요컨대 한국전쟁 과정에서 구축된 정치사회 질서가 어떻게 휴전 이후의 정치사회구조로 연결되었는지를 중시한 것이다.

 노근리 사건 현장
노근리 사건 현장 ⓒ 변종만

특히 전쟁 중 민간인 학살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키고, 이것이 이후 어떻게 한국의 만성적 국가폭력과 인권 침해로 연결되는지를 살피는 부분은 이 저작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을 도와주러 온' 미군의 총격을 당하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사상범으로 몰릴까봐' 입을 꾹 다물고 살아온 충북 영동의 노근리 노인들에게 전쟁은 여전히 과거의 일이 아니다. 필자가 현장조사차 방문했던 전북 남원의 한 마을에서는 1950년 11월 8일 퇴각하는 인민군을 잠재워 주었다는 이유로 주민 86명이 아침밥도 다 먹기 전에 동네 논바닥에 끌려 나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국군에게 집단학살을 당했다.... 그 동네에서는 그 날 이후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잔인한 망각의 세월이었다.(<전쟁과 사회> 중에서)

이처럼 한국전쟁은 한국인에게 본능적인 공포감과 순응주의를 철저히 내면화시켰다.

또 다른 예로 이산가족 문제를 들어보자. 세계 어느 전쟁도 몇 개월 간격으로 상대 영토의 90% 이상을 번갈아서 점령하고 통치한 경우는 없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전쟁을 치르며 양측은 현지인을 대상으로 모병하게 되었다. 결과 가족과 생이별한 이산가족이 양산됐다. 하지만 천만 명 이산가족 중에 어느 누구도 '너희가 뭔데 왜 내 가족을 못 만나게 하느냐'고 항의조차 제기하지 못하는, 말 그대로 '기가 막히는' 현실이 빚어지게 된 것이다.

전쟁이 필요했던 두 사람, 김일성과 이승만

 한국전쟁 당시 펑더화이와 김일성.
한국전쟁 당시 펑더화이와 김일성. ⓒ

만일에 우리 동포들이 양극단의 길로만 돌진한다면 앞으로 남북의 동포는 국제적 압력과 도발로 인하여 본의 아니게 동족상잔의 비참한 내전이 발생할 위험이 없지 않으며...(김구)

이렇게 동족상잔의 위험을 경고한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피살됐고 그의 사후 정확히 1년째 되는 날 급기야 동족 간에 전면전이 발발했다.

한국전쟁은 시종일관 정치의 연장이었다. 김일성의 전쟁 목적은 사회주의적 신념과 무관한 것이었다. 그는 한반도의 패자가 되고자 하는 정치적 야망으로 전쟁을 선택했다. 물론 그가 일제 강점기에 항일유격활동을 혁혁하게 벌인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그가 전쟁을 일으킨 것이 분단을 극복하려는 순수한 민족적 동기였다고 봐 줄 근거는 되지 못한다.

전쟁 전만 해도 북한에서 김일성의 위치는 견고하지 못했다. 그보다 한층 더 친소적인 허가이와 김일성의 항일유격활동에 결코 뒤지지 않는 국내 투쟁 경력자 남로당의 박헌영, 그리고 중국 연안파의 무정 등이 김일성의 권력을 견제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 전쟁을 정적을 제거하는 데 이용했다. 전후 그가 유일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한국전쟁 때문이었다.

이승만이야말로 전쟁 덕에 극적으로 권력을 유지, 강화한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다. 한국인은 전쟁 직전 이승만의 권력이 와해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는 사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1950년 6·25 직전 실시된 5·30선거에는 초대 미군정 하 제헌 선거를 보이콧했던 중도파와 김구 계열의 한독당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렇게 되자 집권당이던 대한민국당은 210석 중 고작 11.4%인 24석을 얻는 데 그쳤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하던 당시 헌법대로 진행됐다면 이승만의 실각이 분명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이승만은 전쟁 중이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이른바 '발췌 개헌'으로 직선제 개헌을 강행해 권력을 유지했다. 이승만은 1953년 휴전에도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한국전쟁 최대의 수혜자는 김일성과 이승만 등의 당대 권력자들과 지배집단이었다. 그들은 전쟁으로 구축한 체제를 전후에는 공포정치를 통해 오히려 대폭 강화해 나갔다.

김정일과 이명박, 김정은과 박근혜

역사에 가정은 덧없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역사를 가정해 보는 것은 그 역사의 의미를 묻는 데 긴요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김일성의 유일체제 구축이 용이했을까?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김정일의 부자 세습도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이 없었더라면 이승만의 장기집권이 가능했을까? 이어서 박정희의 5·16과 유신체제 구축이 성사될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오늘 이명박 정권의 탄생도 혹시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결국 오늘의 남북한 체제는 한국전쟁 체제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남과 북의 김정일·이명박 체제는 다름 아닌 한국전쟁의 산물인 것이다.

한국전쟁 체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유감스럽게도 단 한 차례밖에는 없었다. 그것은 김대중의 6·15 선언이었다. 노무현의 10·4 선언도 김대중의 노력을 나름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역설적이게도 이승만, 박정희의 후예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야말로 한국전쟁 체제를 극복하려는 노력을 보인 귀중한 시간이었던 셈이다.

전쟁의 영향력은 불가사의한 것이다. 머지 않아 북한에서는 김정은이 김정일의 대를 이어 3대 세습을 할 것이라고 한다. 약간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남한에서는 박근혜가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되고 있다. 만약 김정은의 3대 세습과 박근혜의 부자(父子) 집권이 실현된다면, 그들 역시 한국전쟁 체제의 산물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정치는 전쟁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6`25전쟁#김일성#이승만 #김동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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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평론을 주로 쓰며 '인간'에 초점을 맞추는 글쓰기를 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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