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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왜 그래요, 진짜! 다들 기겁할 텐데."

 

나는 인형웨이터에게 속닥거리며 그를 도로 배낭 안으로 집어넣으려 애썼다. 조제 역시 툴툴거렸지만 그는 한사코 뿌리쳤다. 그리고 이 거리는 자신같은 인형가면을 쓴 광고맨이 많기 때문에 그 중 하나라고 여길 뿐 아무도 신경 안 쓸 거라며 꾸역꾸역 밖으로 나왔다.


"아앙, 지난 번에 멜레나 가방에 숨어서 왔을 땐 구경거리가 좀 많았는데 오늘은 어떨런지 몰라잉. 이쁜이 너 가방도 좀 열어봐야겠써엉. 이봐, 초록머리, 얘 가방 좀 열어봐봐."
"아우, 진짜 왕짜증이야!"


조제는 버럭거리며 내 등을 돌리게 하고는 배낭을 들여다봤다. 그리곤 '열어본들 뭘해!'하며 배낭을 툭 쳤다. 꼬맹이와 고양이도 그새 어딘가로 돌아다니고 있단 소리였다.


"앗, 저기, 사람들이 부르고 있어요. 아저씬 멀찍이서 따라와요."


나와 조제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건물 앞 돌자갈길로 다가갔다. 가이드는 말도 없이 자꾸 쏘다니지 말라며 우리에게 주의를 줬다. 그리곤 둘쎄데레체라고 하는 캐러멜맛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건넸다. 그걸로 배를 채우라는 듯 큼직한 산처럼 높직하니 올려진 아이스크림은 보기에도 엄청났다.

 

축구 선수 마라도나, 그리고 비운의 영부인 에바페론, 그리고 탱고 가수 가드델의 인형이 환영인사를 하는 건물 아래에 앉아 우린 아이스크림을 핥았다. 시인은 셔츠 앞주머니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 뭔가를 열심히 적었다.


"여긴 가르델이 영웅처럼 떠받들어지나 봐요?"

나는 고개를 쭉 빼서 건물 위의 가르델 인형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Y는 아이스크림을 쓱 한번 베물더니,


"음, 가르델이 어린 시절을 보낸 아바스토 시장에는 그의 동상이 있어요. 뭐, 우리도 투어를 하다가 짬이 나면 둘러 볼 겨를도 생기겠죠. 이 나라 곳곳의 벽화에서 중절모를 쓴 남자의 얼굴이 보인다면 그건 가르델일 가능성이 많아요. 그만큼 영웅 대접을 받고 있단 증거죠."

"이런 영웅이 있으니 보카는 나름은 축복받은 곳이네요."
내 말에 시인은 종이에다 쓰던 걸 멈추곤,

 

"보카, 보카... 지금은 이렇게 들썩들썩한 공간이 되었지만 1870년에 아르헨티나의 온 도시에 황열병이 덮쳤을 때 보카는 아주 쓸쓸한 공간으로 남았어요. 부자들이야 돈이 있으니 황열병을 피해 북쪽으로 피신을 갈 수 있었지만 가난한 자들은 그냥 이곳에 남아서 언제 닥칠지 모를 병에 대면해야 했죠.

 

그러던 중, 팜파스 지역에서 쫒겨난 혼혈 카우초들이 싼 집값을 따라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들은 강렬한 리듬에 빠른 템포를 곁들인 밀롱가란 노래를 만들었고요. 아, 후에 밀롱가는 탱고를 추는 공간이란 의미도 포함하게 됐죠.

 

어떻건 카오초들이 만든 밀롱가는 1900년경에 탱고로 변하게 된 거죠. 처음엔 남자들끼리 주는 춤이었는데 매춘부들이 가세하면서 커플 댄스가 됐다고 해요. 이후 세계 제 1차 대전 무렵에 이탈리아와 스페인 출신을 위주로 한 유럽 이민자들의 제 2의 고향으로 보카는 변하게 되죠."


조제는 '흥' 하고 콧방귀를 한번 뀌더니,
"어두운 환락가에서 태어난 탱고가 우아한 예술로 변모했단 게 참... 그런 의미로 보자면, 사람도 '입지전적인 인물'이 있듯이 탱고도 딱 그 표현이 맞겠군."


그러자 시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응수했다.

 

"그래요. 온갖 고난을 이겨낸 사람이 더 풍부한 삶의 결을 느끼는 것에 비유하면 어떨까 싶어요. 게다가 아르헨티나는 식민지를 겪었단 점에서 한국과 비슷한 점도 있네요. 이 나라는 16세기 중엽 스페인에게 정복당해 스페인의 손아귀에 들어갔다가 이후 1810년에 독립했어요.

 

이후로 독일, 러시아, 폴란드인들과 유럽의 집시들도 건너와서 이곳에 정착해 살고 있고요. 결과적으로 아르헨티나에는 인구의 97% 정도에 달하는 백인이 살고 있어요. 그리고 현재는 각계각층의 고위 인사가 된 유대인들이 나라를 꾸려가고 있고요."


"세계 어디를 가건 유대인들의 우수함은 따를 수가 없군."


우리는 이후로도 몇 시간을 더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시인은 어느 곳에서건 종이를 꺼내 그 때의 풍경과 자신의 감정을 시로 옮겼다. 한참을 신나게 이야기에 빠져들다보니 어딘가에서 인형웨이터도 우리를 따라다니고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걱정이 되었지만 이내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느새 시간은 흘러갔고, 햇살은 노을로 변하고 있었다.


"자! 이제 저녁 먹으러 가죠?"


가이드의 말에 우리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섰다. 때마침 저 쪽에서 멜레나가 힘차게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숨가쁘게 춤추고 나서인지 얼굴이 한결 상쾌하게 개어있었다.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가로수 잎을 흔들고는 그녀의 스커트 자락을 스쳐갔다.

 

<계속>


#장르문학#중간문학#판타지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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