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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고 냄새나는 지하 계단 끝에서 문을 밀자, 웅성웅성 시끄러움이 가득한 현대식 클럽이 펼쳐졌다. 굉장한 음악 소리와 함께 화려한 사이키 조명이 돌아가고, 무대 위에서는 젊은 남녀들이 열심히 춤을 추고 있었다.

 

"여기선 마약 구하기가 쉽다더니....다들 마리화나라도 한 거야, 뭐야?"


조제는 눈이 반 쯤은 풀려있는 사람들을 보며 빈정거렸다. 구석 탁자에서는 좀전에 본 미국인 관광객들이 진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내가 뭘 하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저 뒤쪽 스피커 위에 걸터앉은 또 다른 남자 커플은 바짝 몸을 밀착한 채 다정스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하나는 다른 하나의 무릎에 걸터앉아서 상대의 몸을 어루만지며 바짝 입을 가까이 댄 채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흥, 탱고 복장이라? 완전 '드레스드 킬' 이군?"


조제의 말에 우리가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리자, 등이 다 드러나는 탱고드레스를 입은 채 와인을 마시는 멜레나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그녀에게로 다가갔고, 흰갈매기는 반가움을 가득 담은 얼굴로 말을 걸었다.


"당신, 언제 여기 와 있던 거요? 나는 정어리 통조림 때문에 참으로 난관에 빠졌었는데."
"자꾸 악몽이 괴롭혀서 깼어. 당신 따위가 뭘 알겠어?"


멜레나는 톡 쏘고는 우리쪽을 바라보았다. 인형웨이터가 조제의 옆구리에 매달려서 늘어져 있고, 꼬맹이의 두 얼굴이 내 등에 달린 형상에 그녀는 슬쩍 코웃음을 쳤다. 하긴 어느 누가 보건 그건 최첨단 패션이거나 혹은 취기가 잔뜩 오른 관광객이 이 골목 어디에서 기념품으로 산 인형 나부랭이로 보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흰갈매기의 권유로 우린 다 같이 클럽  구석에 있는 바 앞으로 갔다. 그러자 책을 읽고 있던 바텐더가 눈을 들고 일어서더니 흰갈매기와 멜레나에게 아는 체를 했다. '저 자가 일기장에 나오는 그 카페 주인이란 거야?' 하며 조제와 내가 속닥거리는 걸 설핏 들었는지, 그는 한국말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권했다. 그리곤 Y라고 불러달라고 덧붙이며 읽고 있던 책을 옆으로 밀어놓았다. 연필로 그린 난해한 표지 그림이 담긴 책이었는데, 가만 보니 보르헤스의 '픽션들' 이었다. 나는 반가움이 가득한 말투로 외쳤다.


"아! 내가 좋아하는 작가인데."


그러자 그는 싱긋 웃으며 보르헤스의 어떤 점이 맘에 드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기쁘고 벅찬 목소리로 일사천리로 내달렸다.

 

"정규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그게 오히려 자신의 내면에 더 깊이 들어가는 계기가 됐단거? 에셔나 마그리트의 화풍이 막 떠오르는 문장들도 너무 좋고요. 뭣보다도 사고로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글쓰고 읽는 것에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게 인간 승리라 여겨져요."


"아! 짜증나. 와인이나 한 잔씩들 줘요."


조제는 심통난 소리로 우물거렸다. 멜레나와 흰갈매기는 우리와 상관없이 뭔가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취객들의 춤이 점점 격렬해지는 가운데, 요란하게 조명이 움직였다. 그러자 Y는 바의 코너에 달린 집중 조명등을 더 켜고 버튼 하나를 눌렀다. 그랬더니 유리로 된 벽이 사방으로 내려와서 춤추는 공간과 분리를 해주었다. 외부와 단절된 아늑한 투명 공간이 만들어지자 바깥의 소음은 일절 들리지가 않았다.

 

Y는 '왜 이곳을 택했어요?' 하고 물었다. 나는 예술관의 정립과 내가 누군인지 찾고 싶어서,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아직 잘 모르겠어서 구체적으로 말로 표현하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조제는 삐딱하게 팔을 괴고 와인만 들이키면서 꼴같잖단 표정을 짓고는 '쳇!'하고 혀를 찼다.


"킨케라 마르틴 이란 화가가 지금의 보카를 만들었어요. 그는 항구의 풍경과 노동자들을 즐겨 그렸는데, 세계적 명성을 얻자 자신이 번 돈으로 보카에다 병원, 학교, 미술관 등을 세웠거든요. 음습하고 절망만 가득했던 최하 계급 사람들이 살던 곳이 이젠 전세계인들의 관심을 받는 곳이 된 거죠. 사람 인생도 그같다고 여겨요, 저는."


그리곤 '아르헨티나엔 얼마간 묵으실 건가요?' 하고 물었다.


" 글쎄..우린 어쩌다 보니, 뭐."


내가 우물쭈물 할 말을 찾지 못해서 망설이자 흰갈매기가 나서더니 우선은 한달 정도 있을 거라고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Y는 어디서 묵고 있냐고 우리에게 물었고, 흰갈매기가 이번에도 대뜸 나서서 아직 정한 곳이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자 Y는 서랍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주며 말했다.


"당신들의 묵을 만한 숙박업소를 안내해 주겠어요. 이건 제가 아는 시인이 경영하는 게스트하우스 전화번호에요. 한국인 가이드가 항상 그곳으로 손님을 모셔오니까 친구들도 제법 사귈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계속>


#장르문학#중간문학#판타지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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