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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열망사냥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규칙적인 일렁임은 뱃멀미라도 하듯 속이 뒤틀리고 마구 토가 쏠리게 했지만 다들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알토와 소프라노는 말없이 고양이를 내려다보며 저희끼리 귀엣말을 속삭이며 킥킥거렸다. 그 난국에서 흰갈매기와 인형웨이터만이 세상 모르고 코를 골고 있을 뿐, 조제만 혼자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함을 질렀다.


"등신같은 기집애! 너가 와인 파티 하잘 때 부터 알아봤어야 했다구!"
"누가 사온 술이었는지!"


나도 질세라 대들자, 조제는 슥 한번 째려보곤 이내 알토에게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리곤 '곧 아르헨티나의 동성애 카페에 도착할 거야' 하는 대답을 듣자마자 뻥한 눈으로 한숨을 폭폭 쉬었다.


"일어나봐요! 이 사람들은 대체 언제까지 처 자고 있을 참이래?"


조제는 인형웨이터와 흰갈매기를 발로 툭 차며 고함을 질러댔다. 한쪽으로 픽하고 찌그러진 인형웨이터는 몸통과 머리가 서로 반대 방향을 한 채로 계속 코를 골았다. 그러자 소프라노는 새된 소리로 까르르 웃으며 그냥 두라고 손을 내저었다. 조제는 그래도 분이 안 풀리는지 이번엔 인형웨이터를 마구 흔들어 깨우기 시작했다.


"그만 좀해. 불쌍한 영혼한테 뭔 짓이야."
"누군들 안 불쌍해?"


조제는 알토의 말에 심통스럽게 맞받아쳤다. 열망사냥꾼의 울렁임이 더욱 거세졌다.


"완전 비린내 쩌는 여객선이군."


조제는 빈정거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알토를 향해 물었다.


"이거 한 페이지만 더 읽을 겨를은 있겠지?"


1999년 9월 28일


가을 저녁, 바다에 내리는 비는 그윽하다. 창가에서 커피 두 잔을 마실 동안 노란 헤드라이트를 켠 차들이 수없이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빠져나갔다. 하지만 그의 차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아주 잠깐 서성이다가 우산을 꺼내들고 해변을 따라서 '카멜리아'에 가닿았다.


이윽고 아무도 없는 카페 2층에서 초콜릿 술을 홀짝이는데 별안간 아랫층 출입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곤 여자 하나가 기세좋게 팔을 흔들며 가게 안으로 쑥 들어서는 것이었다. 그녀는 거침없이 척척 창가에 자리를 잡으려다가, 곧이어 물잔을 들고 뒤따라온 주인을 뒤돌아보며 물었다.

"혹시, 여기서 담배 피워도 되나요?"


그러자 주인은 2층에 금연석이 마련돼 있다며 앞장섰다. 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 여자가 계단을 쿵쿵 올라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카페 주인의 가뿐한 몇 걸음 뒤에서 그녀의 요란한 발소리가 이어지더니 제일 먼저 검은 숏커트 머리가 계단 위로 보였다.

 

그 다음엔 이목구비가 가운데로 잔뜩 몰린 얼굴과 짧은 목이 드러났고, 좀 더 쿵쾅거림이 강해지면서 검정의 단정한 제복 같은 재킷을 입은 상체, 그 다음엔 같은 색의 타이트 스커트, 최종적으론 제법 튼실하고 굵은 다리가 계단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침내 테라스로 나간 여자는 '탁' 하고 가벼운 소리를 내며 두꺼운 유리문을 닫았다. 주인이 야외 조명을 좀 더 당겨 주고 구석에 있던 등롱까지 가져다 놓자, 여자의 얼굴은 불빛 아래서 음영이 진해졌고 약간은 무서워보이기도 했다. 결코 미인이랄 수 없는 얼굴에 굳게 앙 다문 입과 약간 들린 뾰족코, 사방을 정신 없이 휘둘러보는 강렬한 두 눈만을 꿈적이며, 나와 눈이 마주치자 겸연쩍은 듯 슬쩍 미소를 지었다.

 

이윽고 주인이 내려간 후, 여자는 유리문을 신중히 열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짐짓 긴장을 하곤 더욱 몰입해서 책을 읽는 척 했지만 그녀는 아랑곳 없이 내 뒤 쪽 서가에서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여긴 전부 시시한 것들 뿐이군요. 이따위 것들이 현실에 무슨 쓸모가 있어, 안 그래요?"


나는 고개를 들어 그쪽으로 잠깐 쳐다봐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내 테이블로 슬며시 눈길을 주었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침묵이 이어지더니 가볍고 불규칙적인 숨만 몇번 내쉬는 것이었다. 이윽고 큰 숨을 한 번 내쉰 그녀는 참을 수 없는 흥분을 내리누르는 말투로 은밀하게 속삭였다.


"아르헨티나행 무료 티켓이 있어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입술을 살짝 오므리며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내가 보고 있던 책에서 탱고 공연 사진을 쓱 훑더니 재빨리 말을 이었다.


"우린 무료 여행자를 모집하고 있어요. 번화가와 유흥가, 그리고 지독한 지옥의 한 시절을 코스에 짜넣었죠. 환락과 천국의 경계선을 가벼이 걸을 수 있는, 그런 의지를 가진 사람이 필요해요. 자신의 삶을 다시 기워내고 싶어하는 열망을 가진 자들을 위한 투어인 셈이죠. 삶의 평온을 연장하려는 여행자는, 미안하지만 사절해요. 대신 그 감흥을 글로 옮겨주는 조건이죠. 어때요? 때마침 당신의 글이 제법 내 맘에 들어요."


여자는 내가 연습장에 멋대로 휘갈려놓은 에세이를 어느새 들여다보곤 슬쩍 미소지었다. 나는 황급히 그걸 덮으며 약간 불쾌한 표정을 짓곤 옆으로 틀어앉았다. 여자는 그래도 물러서지 않고 통굽소리를 또박또박 울리며 내 테이블 앞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때마침 창 밖에는 비가 좀 더 거세지고 있었고 양철로 장식한 지붕에선 빗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려퍼졌다. 여자는 전면 통유리창을 배경으로 기세 등등하게 우뚝 섰다. 때마침 밖에선 사나운 천둥소리가 콰쾅하고 울렸다.

 

<계속>


#장르문학#중간문학#판타지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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