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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의 지리산

 

내제에서 바라본 황매산 기록에 의하면 부처님의 형상이라는데
내제에서 바라본 황매산기록에 의하면 부처님의 형상이라는데 ⓒ 이희동
벚꽃놀이 산청의 상춘객들
벚꽃놀이산청의 상춘객들 ⓒ 이희동
지난 9일, 화엄사와 연곡사, 쌍계사의 벚꽃십리길과 섬진강변을 지나 도착한 하동. 그곳에서 우리는 하동의 명물 재첩국 한 그릇씩을 뚝딱한 뒤 국도를 통해 산청으로 넘어갔다. 내비게이션에 산청초등학교 대신 신천초등학교을 잘못 찍은 탓에 지리산 깊숙이 위치한 청학동을 지나 굽이굽이 산청으로 이어진 바로 그 길을 타야만 했다.

 

산청과 얼마나 가까워졌을까. 갑자기 아내가 중얼거렸다.

 

"지리산은 산청만의 산이 아니구나."

 

무슨 뜻인가 했더니 아내의 이야기인즉슨 산청 사람들은 천왕봉이 산청군 소속이라 지리산이 산청 산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처음 지리산 건너편 구례를 돌아다녀보니 화엄사와 연곡사 등 산청과는 비교도 안 될 유적들과 문화재들이 지리산 깊은 계곡에 자리하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지리산을 산청의 산이라고 알아왔던 아내가 놀랄 수밖에.

 

두 연인 벚꽃 아래를 거니는 두 연인
두 연인벚꽃 아래를 거니는 두 연인 ⓒ 이희동

나는 아내의 당황함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역시 전국을 돌아다니며 지리산과 접해 있는 구례, 하동, 산청, 함양, 남원을 모두 방문했었지만 그 중에서도 산청은 천왕봉 밑 중산리 말고는 내밀게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산청 대원사와 그 계곡이 유명하다지만, 지리산의 여타 사찰들과 남원의 뱀사골, 하동의 피아골과 비교하자면 그 역시 자랑할 규모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산청 지리산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 부부 사이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날 밤, 찬란한 4월을 맞아 벚꽃놀이를 핑계로 서울, 대전 등지에서 얼굴 한 번 보자고 내려온 산청 토박이 선배들과의 모임이 있었는데, 그 사이에서 산청의 지리산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불거진 것이다.

 

산청 지리산에는 대원사 밖에 없다는 이야기에 누군가가 내일 꽃놀이 장소로 지곡사가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비록 지금은 다 소실되고 조그마한 암자만 다시 지어졌지만 지곡사는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지리산 지역에서 매우 큰 사찰 중의 하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정된 지곡사 벚꽃놀이. 가자, 지곡사로!

 

지리산 지곡사

 

현재의 지곡사 깊은 계곡을 끼고 있다
현재의 지곡사깊은 계곡을 끼고 있다 ⓒ 이희동

4월의 지곡사지 벚꽃이 한창이다
4월의 지곡사지벚꽃이 한창이다 ⓒ 이희동

 

지곡사 장독대 작은 규모의 사찰은 생활과 함께한다
지곡사 장독대작은 규모의 사찰은 생활과 함께한다 ⓒ 이희동

지곡사는 처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처가가 자리한 '내리'는 산청읍에서 다리를 건너 웅석봉 군립공원 기슭에 위치한 동네였는데, 지곡사는 그 웅석봉 다른 계곡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곡사를 웅석봉 지곡사로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비록 지금은 웅석봉이지만 예전의 국립공원, 도립공원 개념이 없었을 때에는 이 웅석봉 역시 지리산 자락의 마지막 봉우리였을 터, 그것은 지리산 지곡사라 함이 더 옳은 듯 했다.

 

현재의 지곡사는 매우 작고 아담한 절이었다. 산청 읍내서부터 표시해 놓은 표지판이 부끄러울 만큼 조촐하고 수수한 사찰.

 

그러나 그 사찰이 위치한 널찍한 지세와 옆의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의 계곡은 바로 이곳에 커다란 사찰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강변하고 있는 듯 했다. 아주 오래 전 비석을 지고 있었을 거북머리 받침대 위에 지곡사지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곡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웅진 스님이 창건하였으며, 당시의 이름은 국태사였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는 혜월 스님과 진관 스님이 절에 머물면서 불법을 크게 펼쳐 300여 명의 승려가 머물고 물방앗간이 12개나 될 정도의 큰 절로 성장하여 선종 5대 산문의 하나가 되었다. 조선 시대에 추파 스님(1718-1774)이 『유산음현 지곡사기』에서 영남의 으뜸가는 사찰이라 평할 정도로, 그 교세는 조선 말기까지도 유지되고 있었던 것 같다. - (중략) - 지금의 지곡사는 1958년에 한 스님에 의해 중건된 것으로, 본래의 지곡사 가람배치와는 무관하다. 무상한 세월과 함께 절은 흔적만 남았지만, 지곡사에서 멀리 황매산을 바라보면 산이 마치 부처님이 누워있는 형상을 하고 있어 신비감을 더해 준다.

 

지곡사지 벚꽃 그 옛날 영광은 어디로 가고
지곡사지 벚꽃그 옛날 영광은 어디로 가고 ⓒ 이희동

승려가 무려 300명에, 영남의 으뜸가는 사찰이라. 아마도 그것은 구례 화엄사와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은 규모의 사찰이었으리라. 그런데 왜 그런 사찰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된 것일까?

 

다른 기록에 따르면 지곡사는 특히 임진왜란 당시 화약을 만드는 곳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1592년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 장군이 승리하는 데에는 염초 150근을 미리 구워 놓은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하는데 그 염초를 굽고 조총을 만들었던 곳이 바로 이곳, 지곡사라는 것이다. 요컨대 지곡사는 진주에서 떨어져 있었지만 무기제조창의 역할을 했던 것이다.

 

지곡사가 임진왜란 당시 항쟁의 중심에 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산청에 기거했었던 남명 조식의 영향으로, 조식이 평소에 지곡사에 자주 머물렀던 터라 이곳에서 그의 제자들과 스님들이 의병을 이끌게 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사연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니 벚꽃 나무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작년 여름 물놀이 하러 이곳 계곡에 왔을 때만 해도 그냥 넓은 땅에 어울리지 않은 작은 사찰 하나였을 뿐인데, 이제는 여기저기 버려진 돌멩이 하나도 허투루 보이지 않았다. 혹시 이 작은 돌멩이가 과거 지곡사의 중요한 부분은 아니었을까? 모든 사지(寺地)가 그렇듯이 지곡사지는 나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었다.

 

산청 초등학생들의 소풍장소 겹겹이 묻혀 있는 추억들
산청 초등학생들의 소풍장소겹겹이 묻혀 있는 추억들 ⓒ 이희동

벚꽃 정자 많은 이들이 쉬어가는 벚꽃나무 그늘 아래
벚꽃 정자많은 이들이 쉬어가는 벚꽃나무 그늘 아래 ⓒ 이희동

작은 사찰을 중심으로 지천에 피어있는 벚꽃들을 구경하는데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산천 토박이들의 경험담이 이어졌다. 학창시절 산청 학생들의 주된 소풍장소요, 산청 상춘객들이 찾아온다는 지곡사이니만큼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겹겹이 묻혀 있겠는가. 모두의 추억보따리를 펼쳐 보이기에는 봄날이 너무 짧아 아쉬울 뿐이었다.

 

봄꽃을 보고 싶지만 번잡한 공간을 피하고 싶은 당신.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보시길. 어디 지곡사 같이 숨겨진 봄의 명소가 한 두 군데뿐이겠는가. 모두들 자신만의 봄동산을 간직하시길 바란다.


#지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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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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