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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유시연 소설가 유시연이 두 번째 소설집 ‘오후 4시의 기억’(개미)을 펴냈다
▲ 작가 유시연 소설가 유시연이 두 번째 소설집 ‘오후 4시의 기억’(개미)을 펴냈다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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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는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 기형도 '빈집' 모두

소설가 유시연이 요즘 펴낸 두 번째 단편소설 '오후 4시의 기억'. 이 책을 잃고 있는 내내 시인 기형도(1960년 2월 16일~1989년 3월 7일)가 쓴 시 '빈집'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도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소설 11편을 쓰는 내내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 사랑은 "짧았던 밤"이며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 같은 게 아니었겠는가. 

그에게 있어 이별은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이며 "공포를 기다리는 흰 종이"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쓴 소설을 읽는 내내 사랑과 이별을 심하게 겪은 사람은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상처 입고 시퍼런 멍에만 남은 마음을 빈집에 가두는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떠올랐다. "사랑 잃고 기억만 빈집에 가두면 뭐해?"처럼.

사랑을 잃고, 아버지를 잃고, 고향을 잃은 여자. 그 여자가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이 끊임없이 거듭되는 이 세상,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마음은 어떠할까. 소설가 유시연은 지난 섣달 초이튿날, 친정 아버지를 고향에 있는 야트막한 산비탈에 묻고 돌아서면서 고향까지 잃었다.

그 고향은 그에게 있어서 부모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집과 들과 강가가 있는 곳이다. 그곳은 강원도 정선 몰운대로 가는 길목에 있는 집에서 홀로 고향을 지키며 살아가던 아버지가 이 세상을 훌쩍 떠남으로써 그에게 "고향에 두 번 다시 갈 일이 없겠구나"라는 쓰린 상처를 남겼다. 그 상처는 그에게 늘 '오후 4시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13일 오전 소설가 유시연은 전화통화에서 "살아가면서 우리는 시간과 기억을 잃어버리며 세상에서의 나날을 지워간다"고 아프게 말했다. 그는 "부모와의 인연이나 대지와의 인연뿐만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도 잃어버리며 지상에서의 나날을 마모시켜 나간다. 요양원에 아버지를 모셔두고 온전히 하루를 내어주지 못한 게 회한으로 남는다"고 되짚었다.

사람살이는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이 남긴 흔적

"초봄의 햇살이 따갑다. / 지난 해 장편소설에 이어 두 번째 소설집을 펴내면서 이른 봄마다 책을 펴내는 인연에 대해 생각해본다. 새순이 돋고 꽃들 피어 흩날리는 봄은 생명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딛고 피어나는 계절이기도 하다. 엄숙과 황홀, 탄생과 소멸이 번갈아가며 대지를 지나갈 때 다른 한쪽에서는 사랑 이별 슬픔을 삶이라는 인생에 수놓는다."- '작가의 말' 몇 토막

유시연 두 번째 소설집 '오후 4시의 기억' 이 책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을 비켜갈 수 없으며, 사람살이는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이 남긴 흔적이라는 것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다
▲ 유시연 두 번째 소설집 '오후 4시의 기억' 이 책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을 비켜갈 수 없으며, 사람살이는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이 남긴 흔적이라는 것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다
ⓒ 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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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8년 첫 소설집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와 2010년 첫 장편소설 <부용꽃 여름>을 펴냈던 소설가 유시연이 두 번째 소설집 <오후 4시의 기억>(개미)을 펴냈다.

이 책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을 비켜갈 수 없으며, 사람살이는 잃어버린 시간과 기억이 남긴 흔적이라는 것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다.

'외로움'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이 소설집에는 '들판의 적막' '달의 눈물' '바람 속으로' '오후 4시의 기억' '여름의 미행' '봄의 부케' '4월의 전설' '비, 쏟아지다' '수선화' '우회로' '시간의 저편' 등 단편소설 11편이 실려 있다. 그 짙은 '외로움'은 소설 제목인 '들판' '달' '바람' '비' '시간' 등에 포옥 안겨 있다.

소설가 유시연은 "첫 소설집이 글쓰기에 대한 강박이었다면 이번 소설집은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보고서"라고 말한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관계의 틈바구니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약한 인간에 대한 연민이 조금이나마 독자들에게 전달된다면 다행"이라며 "이 소설집을 내자마자 나는 또 일상과 나로부터 멀리 떠나 있을 것"이라고 귀띔했다.

"햇볕이 조금 엷어졌다. 오후 4시의 태양은 상처의 흔적을 간직하는 시간이다. 왕성했던 정오의 기운이 차츰 쇠잔하여 영광의 기억을 싸안고 스러져가는 시각이기도 하다. 삶이 서서히 쓰리고 아픈 기억을 간직하듯이. 나는 두 다리로 걸었던 추억을 회상하며 서서히 몸이 굳어짐을 느낀다. 물리치료를 정기적으로 하고, 한방 침술과 약을 먹는다한들 이 년째 막혀버린 혈맥은 복구가 불가능할 것이다."- '오후 4시의 기억' 몇 토막

이 소설집에 실린 단편소설 11편 가운데 표제이자 이 소설집 정서를 아우르고 있는 '오후 4시의 기억'을 살짝 들춘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나'는 스키장에서 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되어 휠체어에 앉아 옛 기억을 더듬고 있다. '나'는 쌍둥이 형과 자신이 형과 아우로 나뉜 그 순간부터 내 삶이 잘못되었다고 믿는다.

나는 형 여자 친구 지나를 끔찍이 사랑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나'는 지나에게 나를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 성급하게 상급자 코스에서 스키를 타다가 사고를 당했다. '나'는 마비된 하반신처럼 삶이 "왕성했던 정오의 기운이 차츰 쇠잔하여 영광의 기억을 싸안고 스러져가는" 오후 4시에 멈춰 있다.   

이 소설에서 '오후 4시'는 어쩌면 소설가 유시연(52)이 살아온 '나이'인지도 모른다. '기억'은 작가가 그 나이에 멈춰 서서 그동안 살아온 나날들을 더듬고 있다는 뜻이니까. 작가는 주인공 '나'를 통해 스스로를 비춘다. 작가 나이 또한 정오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해가 아니라 서산을 향해 천천히 기우는 해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이별이 낳는 기쁨과 멍에 기록한 보고서

"이제 나는 무모한 감정의 격랑에서 벗어나 고요히 지는 해를 바라봅니다. 저물녘을 산책하며 인생의 허망함을 받아들입니다. 누군가 각본을 짜서 한 치 오차도 없이 예정된 수순을 밟으며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당신과의 인연도 꼭 거기까지라고 단정 짓습니다. 돌아보면 살아있음이 고마울 뿐입니다."- '시간의 저편' 몇 토막

문학평론가 나소정은 "'오후 4시의 기억'에는 그동안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 내면적 상처의 문제를 핍진하게 다루어 온 그의 작품세계가 한층 완숙해진 기량으로 심화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며 "'인간으로서 감내해야 할 숙명적 고독'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보다 치밀하고 정교해졌다"고 평했다.

소설가 유시연 두 번째 소설집 '오후 4시의 기억'은 사랑과 이별이 낳는 기쁨과 슬픔, 상처와 멍에를 기록한 보고서다. 그는 단편소설 11편 속에 사랑을 윤슬을 톡톡 터트리는 물결로 일렁이게 하기도 하고, 이별을 삼라만상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는 오후 4시, 이리저리 구겨지고 색이 바랜 흑백필름에 담긴 영상처럼 찍어낸다. 50대 허리춤께로 달려가는 그가 살아온 세월을 다시 헤아려보는 것처럼.  

소설가 유시연은 1959년 강원도 정선에서 태어나 2003년 '동서문학'에 단편소설 '당신의 장미'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알래스카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가 있으며, 장편소설 '부용꽃 여름'을 펴냈다. 인천작가회의 사무차장을 맡았으며, 지금은 인터넷종합문예뉴스 '문학in' 편집주간과 기획위원을 맡고 있다.


오후 4시의 기억

유시연 지음, 개미(2011)


#작가 유시연#오후 4시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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