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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스* 산하 무장조직이 이스라엘 경찰관을 납치했을 때였다. 그들은 아흐메드 야신*선생의 석방을 요구했다.

자치정부 수반 아라파트는 부하들을 총동원하여 점령지를 이 잡듯이 뒤졌다. 노벨평화상을 함께 받은 친구인 점령국 총리 라빈의 요구였다. 그 과정에서 수백 명의 동족들이 체포, 구금, 폭행당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납치범들은 예루살렘 근처에 은신해 있었다. 협상이란 씹던 뼈다귀를 빼앗긴 개가 내는 신음소리라고 믿는 라빈은, 특공대를 투입해 수색작전을 펴는 것으로 피랍자의 명을 재촉했다. 3명의 납치범과 피랍자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도 화가 풀리지 않은 라빈은, 모두가 한통속이니 아무나 잡아 본보기를 보이겠다며, 아빠를 비롯해 4백여 명의 지도자들에게 죄를 묻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느닷없이 들이닥친 점령군들에 의해 체포되었다.

아빠가 끌려간 다음날 이른 아침이었다. 이스라엘 군인들이 불도저와 굴착기를 앞세우고 들이닥쳤다. 골목 입구에 서 있던 승용차들을 치우라는 요구도 없었다. 그냥 불도저로 밀어붙였다. 대문과 담 역시 그랬다. 수십 년 동안 가꾼 정원의 나무들도 송두리째 뽑혔다.

테러리스트로 찍히면 당사자만 핍박당하지 않았다. 집 또한 테러리스트의 근거지로 규정되어 건물은 파괴되고 토지는 몰수되었다.

군인들은 2층 건물 전체에 폭약을 설치했다. 가재도구들을 정리하는데 30분의 시간이 주어졌다. 사피나가 태어났고, 남동생이 태어났으며, 온갖 핍박 속에서도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했던 공간, 남아있던 자유는 그렇게 파괴되었다.

친척들과 동네 사람들이 몰려들어 가재도구들을 꺼내려고 했지만 소용없었다. 폭약을 설치하는데 방해된다며, 체포의 위협만 받았을 뿐이다. 그 시간에 챙길 수 있는 것이란 거의 없었다. 부엌 살림살이들과 냉장고, 세탁기, 침대와 거실가구들보다 중요한 것은 아빠와 남동생의 책과 물건들이었다. 그것조차 동네 아주머니들이 달려들어 싸운 성과였다. 

엄마는 방문을 걸어 잠근 채 나오지 않겠다고 버텼다. 집안에 사람이 있다고 폭파를 막을 수 있을까? 그건 말도 되지 않는다. 저들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지체 없이 발파스위치를 누를 것이다.

"아빠가 돌아오시면 마중 가야 되잖아!"라는, 사피나의 절규에 엄마는 결국 항복했다.

군인들은 장난처럼 웃으며 집을 폭파시켰다. 건물의 잔해마저 불도저로 밀어버렸다. '땅 없는 사람들을 위한 주인 없는 땅*'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히틀러가 동유럽을 침공하며 내걸었던 슬로건이기도 했다.

아빠는 4백 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이스라엘과 레바논의 접경지대로 던져졌다. 강제추방을 금지하는 제네바협정, 무고한 민간인들을 즉각 귀환 시키라는 유엔안보리 결의안조차 잔혹한 통치자 라빈의 결정을 되돌리지 못했다.

저들은 눈 덮인 황무지로 사람들을 몰아내고는, 총질을 하며 레바논국경으로 밀어 넣었다. 거기에 더해 탱크와 박격포를 동원하여 포탄 세례를 퍼부었다. 접근이 불가능하도록 국경초소 부근에 지뢰를 매설하고 철조망과 모래방벽도 설치했다. 그들은, 추방자들이 레바논 영토에 있으므로 자신들과는 절대 무관하다며, 모든 책임은 레바논정부에 있다고 우겼다.

지도자들을 살해하거나 쫓아내는 것은 이스라엘 건국 당시부터 이어진 점령지 정책이었다. 그게 아니면 마을들을 초토화시키고 학살하여, 1백 만 명이 넘는 주민들을 인근 국가들로 쫓아냈다. 히틀러가 우크라이나 등지에서 수백 만 명의 민간인들을 학살했던 짓과 동일했다.

1982년 여름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서도 그랬다. 수십 채의 건물들이 이스라엘 비행기가 떨군 진공폭탄에 맞아 붕괴되었다. 단지 아라파트 한 명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가 건물에 있을 것이라는 추정 하나로, 수천 명의 시민들이 건물과 함께 폭사되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굶어죽거나 총 맞아 죽거나.

자기 땅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이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총알이 무섭다고 국경을 넘어갈 수 있을까. 레바논정부는 당연히 입국을 거부했다. 국경에 접근하면 발포하라는 명령까지 하달한 레바논 총리는, 거기에 더해 레바논국경을 통한 국제기구의 긴급구호활동마저 금지시켰다. 이스라엘이 책임질 문제를 대신 떠안을 수 없다는 이유였다.

국경선 위쪽으로 올라가면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레바논 군의 총알이 날아왔다. 반대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이스라엘의 앞잡이 기독교민병대가 배를 가르겠다고 칼을 갈았다. 헤즈볼라* 대원들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추방자들은 며칠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노새에 식량을 실고 야밤에 목숨을 건 공수를 감행했다.

유형지 환경은 가혹했다.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10센티미터가 넘게 내린 눈발이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이스라엘 군대가 추방하면서 지급한 약간의 먹을 것과 옷가지, 담요, 그리고 50달러뿐이었다. 그것으로는 유형지의 혹독한 추위로부터 신체를 보호할 수 없었다.

밤이면 비수 같은 냉기로 땅이 얼어붙었고, 낮에는 폭염에 대지가 용암처럼 끓어올랐다. 젊은이들조차 나가떨어지는 황무지에서 구호텐트에 의지한 채 뼈를 깎는 추위와 혹서의 여름을 견딘 아빠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1년 만에 집으로 귀환했을 때는 10년도 더 늙은 모습이었다. 3개월 후 아빠는 혹독한 고통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결국 돌아가셨다.

* 하마스의 창시자(1936~2004). 시오니스트들에 의해 고향에서 쫓겨난 후 난민촌에서 성장했다. 우연한 사고로 전신이 마비되었으나, 의지로 극복하여 교사가 되었다. 87년 인티파다 과정에서 하마스를 창립했다. 이스라엘 부역자를 살해하라고 명령했다는 이유로, 1991년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가 이스라엘 첩보기관 요원과 인질교환 형식으로 석방되었다. 2004년 3월 예배를 마치고 나오던 중 샤론총리의 직접 지시를 받은 이스라엘 군 헬기의 미사일 공격으로 피살되었다.

* 1987년 1차 인티파다가 발생한 직후 야흐메드 야신 등이 창립한 이슬람저항운동 조직. 'Hamas'는 아랍어 ('Harakat al-Muqawama al-Islamiyya'-the Islamic Resistance Movement)의 머리글자이며, '열심(Zeal)', '열정'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슬람형제단이 비정치적인 성격을 가졌던 것에 반해 하마스는 점령지에서 이스라엘을 몰아내는 것을 구체적 목표로 삼고 있다. 지도부는 6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산하 조직은 정치위원회와 군사위원회로 나뉘어져 있다.

* 이스라엘 건국 과정에서 시오니스트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면서 제시한 슬로건.

* Hizbollah. 아랍어로 '신의 당'이라는 뜻을 가진 레바논의 이슬람 시아파 무장단체. 레바논을 이슬람국가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중동 유일의 시아파 이슬람국가 이란의 지원을 받고 있다. 


#팔레스타인#아라파트#하마스#광주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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