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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이 박약한 자라고 할지라도 일본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면 좀 신중을 기하게 됩니다. 일제 36년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일단 '일본' 하면 어딘지 움츠러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에게는 그렇습니다.

 

일본 동북지방을 휩쓴 지진해일(쓰나미)은 일대를 그야말로 초토화하고 달아났습니다. 많은 인명 및 재산 피해가 따랐습니다. 일본은 세계에서 경제 3위인 나라입니다. 경제 수준이 높다는 것은 여타 부문도 고도로 발전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문화, 과학, 예술 등에서 높은 수준을 구가하고 있는 나라가 일본입니다. 그런 일본이 자연 재해 앞에 추풍낙엽처럼 맥 못추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저는 이번 사태에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의 한계와, 고도로 발달된 과학도 자연 앞에는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사실 이번 일은 담임 목사인 제 개인 의지가 앞선 제안이었습니다. 20일 주일 낮 예배 때 '일본 지진해일 피해 성금'을 모금한다고 3일 전에 문자를 보냈습니다. 일방적인 의사 전달이었습니다. 아무리 어려움에 동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농촌의 작은 교회에서 일본을 돕는다는 것이 어딘지 어색하게 생각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특히 저희 교회 노년부 할머니들은 일제시대 그들로부터 직접적 피해를 입은 당사자들입니다.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 턱도 없는 나이게 억지로 결혼을 해서 평생을 어렵게 보낸 분도 있습니다. 지난 수요일 노년부 낮 예배 광고 시간에 제가 알아듣기 쉽게 할머니들에게 설명을 하자 고개를 끄덕이긴 했습니다만 그래도 100% 지지 의사를 나타낸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20일 예배 시간에 특별 헌금을 드리는 형식으로 성금을 모으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이 고마웠습니다. 저는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호응해 줄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성도들이 봉투를 준비했습니다. 헌금의 제목도 가지각색이었습니다. 그래도 일본 지진해일 피해 성금이라는 뉘앙스는 모두 담고 있었습니다. 오직 한 분, 김종말 집사님은 '祝 結婚, 용배 김종말'이라고 쓴 흰 봉투에 성금을 넣어 냈습니다. 저는 일일이 기도하는 도중에 이 봉투를 발견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 했습니다. 하지만 금세 그것을 감추어 들였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김종말 집사님은 금년 84세의 연세를 가지고 있는 혼자 사는 할머니입니다. 저는 김 집사님을 생각할 때마다 시절을 잘 만나 공부를 조금만 했어도 여걸로 살았을 분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그는 학교는 근처도 가보지 못하고 자랐고, 그 결과 지금도 한글에 어두운 눈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도 경우 바른 김 집사님은 이웃의 애경사엔 빠짐없이 성의를 표하는 분입니다. 아마 주위 글에 밝은 분에게 축하 봉투 글을 미리 받아 둔 것 같습니다. 그 봉투로 이번 일본 쓰나미 헌금을 하신 것입니다.

 

그 외 대부분의 성도들은 봉투에 '일본 지진 헌금', '일본 쓰나미 헌금', '일본 지진 해일 성금', '쓰나미 선금', '어려움을 당한 일본 국민에게','일본 국민과 슬픔을 함께 합니다.'등의 제목들을 적어 그것이 일본 지진해일 피해 복구를 돕기 위한 성금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저희 교회는 농촌의 작은 교회입니다.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는 시골 교회입니다. 어쩌면 다른 곳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 더 적합할지 모를 영세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가 오늘 일본 지진해일 피해 복구를 위한 성금을 모금한 것입니다. 어떤 재벌 회사는 1억엔(12억 원 상당)을 성금으로 내놓았고 그것과 비슷하거나 조금 미치지 못하는 액수의 성금을 낸 회사도 많이 있습니다. 또 한류 스타 연예인 운동선수 등도 1억 원 이상씩의 적지 않은 돈을 일본 돕기 성금으로 내놓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 액수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금액입니다. 저희 교회에서 모금한 일본 돕기 성금은 미미하기 짝이 없습니다. 25만2300원의 성금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이 액수가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그리고 결코 적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넉넉한 가운데 모은 성금이 아니어서 그렇습니다. 어려운 와중에 모은 성금입니다. 학생회 아이들에서부터 80~90대의 주름진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정성을 모은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연보를 칭찬하셨습니다. 그가 가진 전부를 진실되이 드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것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번 일본을 돕는 손길들을 보니까 눈물겨운 성금들이 많더군요. 고사리 손으로 모은 저금통을 깨서 가지고 온 어린이도 있었고, 결혼반지를 내놓은 신혼부부도 있었습니다. 어느 노인은 팔순 축의금을 몽땅 성금으로 내놓기도 했습니다. 바로 우리 이웃이 아닌 바다를 건너 있는 남의 나라를 위해서 말입니다. 저는 이런 것이 진정 사랑이라고 확신합니다. 사랑하기 힘든 대상을 사랑하는 것, 이것이 가치 있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에는 산술이 개입되어서는 안 됩니다. 계산된 사랑은 이미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모든 것을 논리로 접근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에 능한 사람들, 토론에 익숙한 사람들, 이성(理性)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있는 사람들은 일본을 돕는 성금을 가지고도 과거 현재 미래를 들먹이며 계산하고 토론하고 이성적 잣대를 들이대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이 내세우는 사랑은 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주는 만큼 돌아와야 하는 사랑, 아니 그것 이상의 대가를 기대하고 사랑을 베풉니다. 하지만 저는 이럴 때일수록 예수님의 사랑, 즉 아가페 사랑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요즘 제가 걸어온 과거를 되돌아볼 때가 많습니다. 정의를 외치고 진리를 고수하고 사랑을 실천한다고 하면서 '나' 중심은 아니었는지! 다른 사람들을 나의 관념의 수단으로 삼은 적은 없는지. 추수하는 이데올로기로 따스한 인정을 짓밟지는 않았는지... .

 

20일 주일 예배 때, 어려운 삶 속에서도 생사를 넘나드는 일본의 고통당하고 있는 슬픈 사람들을 위해 성금 모금에 동참해준 성도들이 고마웠습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 양보와 호혜의 정신입니다. 경제에 있어서도 양보, 내가 좀 손해 보는 삶을 감내해 내야 합니다. 지식에 있어서도 양보, 내가 지니고 있는 지식이 아무리 많고 옳다 하더라도 져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나이에 연연하지 않는 마음, 나보다 어린 사람들에게도 옳은 것이 발견될 때 수용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건강할 때의 봉사, 다른 사람보다 힘이 있을 때 그 힘을 섬김에 투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희 교회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웃 일본을 생각하면서 작은 정성을 모은 것은 이런 양보와 호혜 그리고 인류 공영의 정신을 실천한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기쁘고 고맙습니다. 함께 해 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 말씀을 올립니다.


#일본 지진 피해 성금#농촌교회#쓰나미#주일헌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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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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