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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札幌) 치토세 공항(千歲空港)을 출발한 초록색 도난버스(道南バス)는 홋카이도의 너른 들판을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앞머리에 붉은 도깨비가 그려진 도난버스는 마치 도깨비 방망이를 들이밀며 달리는 듯했다.

도난버스. 삿포로와 노보리베쓰를 연결하는 버스에 도깨비가 그려져 있다.
▲ 도난버스. 삿포로와 노보리베쓰를 연결하는 버스에 도깨비가 그려져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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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이 좌측통행인 일본. 중앙선 너머 오른쪽에서 우리 방향으로 달려오는 승용차들의 모습이 낯설기만 하다. 길가에는 겨울에 눈이 쌓여있을 때 도로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는 붉은 화살표 표지판이 드문드문 서 있다. 표지판 높이가 버스보다 높으니 겨울에 눈이 얼마나 많이 온다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버스는 성질 급한 한국 사람이면 적응이 어려울 정도로 아주 천천히 달렸다. 버스는 4차선의 고속도로를 잠시 달리더니 이내 2차선의 좁은 길로 들어섰다. 구릉을 끼고 달리는 버스는 낮은 언덕을 올랐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수풀이 우거진 주택들 너머로 멀리 바다가 보였다가 사라졌다.

노보리베쓰 입구의 도깨비상. 노보리베쓰에 들어서서 처음 만난 도깨비이다.
▲ 노보리베쓰 입구의 도깨비상. 노보리베쓰에 들어서서 처음 만난 도깨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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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의 도시, 노보리베쓰(登別)에 버스가 들어섰다. 우리 가족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은 거의 초등학생이 만든 듯한 수준의 거대한 붉은 도깨비였다. 도깨비의 발 아래에는 '환영'이라고 적혀 있지만 머리에 뿔나고 방망이를 든 도깨비는 자기 힘을 과시하는 듯이 서 있다. 도깨비를 보면서 나는 현대 디자인이 세계적으로 발전한 일본에서 왜 저렇게 우스꽝스러운 도깨비상이 도시 입구를 지키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도깨비는 내가 노보리베쓰에서 만난 첫 번째 도깨비였다.

호텔에 짐을 두고 나선 노보리베쓰 지고쿠다니(地獄谷). 유황 연기 솟아오르는 계곡 입구에도 험상 궂은 도깨비가 2마리나 자리를 잡고 있다. 푸른 도깨비는 앉아서 방망이를 들고 누군가를 위협하고 있고 서 있는 붉은 도깨비는 복근을 드러낸 채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다. 이 도깨비들은 내가 노보리베쓰에서 만난 두 번째, 세 번째 도깨비였다.

지옥계곡 입구의 도깨비상. 파란 도깨비와 빨간 도깨비가 사람을 위협하고 있다.
▲ 지옥계곡 입구의 도깨비상. 파란 도깨비와 빨간 도깨비가 사람을 위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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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도깨비들은 지옥계곡인 지고쿠타니에 살면서 지고쿠타니를 지키는 녀석들이다. 도깨비의 모습들이 워낙 만화 속에서 보는 모습 같아서 무섭기는커녕 웃음만 나온다. 내 생각에 일본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일본 도깨비 이야기를 듣고 자랐기 때문에 이 도깨비들을 보면 더 재미를 느낄 것 같다.

나 어릴 적 한국의 동화책에도 이렇게 머리에 뿔 나고 방망이를 든 포악한 도깨비들이 많이 있었다. 동화책에서 보던 도깨비들이 거대한 입상으로 내 눈 앞에 떡 서 있으니 자꾸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그런데 일본에 와서 보니 그때 본 도깨비들은 한국의 도깨비가 아니라 일본의 도깨비였다. 일제 강점 시대에 일본에서 넘어온 도깨비들이 해방 후에도 한국의 도깨비인양 한국의 동화책에 버젓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염불귀상. 도깨비 사당에 모셔진 험상 궂은 도깨비이다.
▲ 염불귀상. 도깨비 사당에 모셔진 험상 궂은 도깨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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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깨비 사이에 조그만 사당이 하나 있다. 오니보코라(鬼祠)라고 불리는 도깨비 사당이다. 사당 안을 들여다 보니 에도시대부터 전해진다고 하는 도깨비상인 염불귀상이 모셔져 있다. 머리에 뿔이 난 이 오니(鬼)는 눈이 무섭고 송곳니가 예리하다. 얼굴 표정도 아주 성질 포악하게 묘사되어 있다. 일본의 오니는 사람들을 늘 괴롭히는 괴물이기 때문이다.

귀신이나 도깨비들은 항시 그 나라 사람들의 의복을 입고 있게 마련이다. 이 일본 도깨비도 나무로 조각된 기모노를 입고 게다를 신고 있다. 손을 들어 사람을 쥐어 팰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 오니는 원래 숲에 사는 착한 귀신이었다. 그런데 인간들이 자신의 거주지인 숲을 파괴하기 시작하자 난폭한 도깨비로 변했다고 한다.

이 도깨비는 내가 노보리베쓰에서 만난 네 번째 도깨비였다. 노보리베쓰를 걷다보면 이곳저곳에서 크고 작은 도깨비들을 만나게 된다. 노보리베쓰 마을에는 도깨비와 지옥에 관련된 입상이 많이 있어서 도깨비를 찾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는 어느새 도깨비의 마을 노보리베쓰에서 만나는 도깨비의 수를 세어보고 있었다.

나는 노보리베쓰를 마음껏 산책했다. 푸른 하늘에는 뭉게구름이 떠 있는데, 가는 곳마다 지하 온천수의 열기가 후끈하고 유황 냄새가 자극적이었다. 한국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야릇한 경험이 흥미로웠다. 이 지옥을 연상케 하는 계곡에 벌을 내리는 악마, 도깨비의 이미지가 차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도깨비가 이 노보리베쓰의 상징이자 마스코트가 되면서 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옛날 옛적에 도깨비들이 어울려 놀던 곳이라고 말하면 관광객들이 흥미롭지 않겠는가?

도깨비 부자상. 아빠 도깨비가 심히 불량해 보인다.
▲ 도깨비 부자상. 아빠 도깨비가 심히 불량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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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다섯 번째, 여섯 번째 도깨비는 노보리베쓰 천연족탕 아래에 있는 '환영 노보리베쓰 온천 부자 도깨비상'이다. 노보리베쓰에서 가장 큰 크기를 자랑하는 이 도깨비 상은 높이가 5m는 되어 보인다.

험상궂은 아빠 도깨비와 아들 도깨비. 아들을 보살피는 자상한 아빠의 모습을 표현해야 하는데 출신이 도깨비라서 험상궂은 얼굴은 어찌 할 수가 없다. 아들과 함께 있지만 그 표정에서 나쁘고 불성실한 남자라는 느낌을 아주 강렬하게 풍긴다. 아들 도깨비가 혼자 놀러 나가는 아빠를 뒤에서 잡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젊어 보이는 아빠 도깨비는 근육이 장난이 아닐 정도로 잘 발달된 근육질 도깨비이다.   

도깨비의 색깔이 온통 원색 파랑인 것이 너무 촌스러워 보였다. 일본 전래의 도깨비들이 파란색 또는 붉은색 바탕의 몸 색깔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도깨비 색깔을 진한 파란색으로 칠할 필요가 있었을까? 파란 도깨비들은 영화 아바타에서 파란 몸체를 가진 외계 종족으로 나오는 나비족을 연상시켰다. 나는 미술을 전공으로 한 아내에게 물었다.

"너무 원색인 파란색이 촌스럽지 않아?"
"아니, 나름대로 쿨한데. 사람의 살색이 아닌 파란색이니까 더 도깨비 같이 보여. 오히려 사람 피부색으로 했으면 도깨비라는 느낌이 더 떨어졌을 거야."

한 대상을 보더라도 사람의 생각은 참으로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도깨비 부자의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신영이와 함께 그들의 포즈를 그대로 흉내내 보기로 했다. 도깨비 방망이를 대체할 만한 것이 없어서 나는 카메라 가방을 머리 위에 들고 한손은 신영이의 손을 잡았다. 웃기는 사진을 찍고 있는 우리 가족을 단체로 관광 온 일본 관광객들이 구경하면서 웃고 난리다. 아내가 찍은 사진을 보니 우리 모녀 뒤로 서 있는 도깨비가 더 거대해 보였다.

우리는 온천수가 흐르는 작은 계곡을 따라 산길을 내려왔다. 노보리베쓰의 작은 주택들과 조용한 숲속의 호텔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도로 곳곳에 세워져 있는 원색의 소형 자동차들은 다양한 디자인으로 나의 눈을 현혹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빨간색, 베이지색, 자두색의 차들이 강렬하게 인상적이다. 마을과 차를 지배하는 색상이 일본인들의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망루호텔. 깊은 산 속에 잠긴 듯이 들어선 호텔의 로고가 예쁘다.
▲ 망루호텔. 깊은 산 속에 잠긴 듯이 들어선 호텔의 로고가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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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에 붙어있는 망루(望樓)라는 호텔은 아주 인상적이다. 호텔 로고부터 파격적인 이 호텔은 마치 숲속에 숨어 있듯이 아늑하다. 호텔 입구는 아주 조그만 비밀문 같은 곳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철통같은 경계근무 때문에 호텔 내부의 인테리어를 구경하러 들어갈 수 없었다.

순간 일본에서 보기 힘든 대형차 한 대가 호텔의 입구에 도착했다. 순간 호텔 종업원인 예쁜 아가씨가 쏜살 같이 뛰어나가 손님을 맞는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아무리 봐도 부부는 아니고 밀애를 즐기러 온 사람들이다. 나는 젊고 예쁜 아가씨가 밀애를 즐기는 손님을 맞으러 뛰어다니는 모습이 조금 슬펐다. 그 아가씨는 자신의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상황이겠지만 괜히 내가 답답했다.

아내가 그랬다.

"쟤들, 이상한 짓 오러 온 사람들이지!"

마을의 크기를 생각하면 거대한 호텔의 수가 아주 많았다. 여러 호텔과 예쁜 차들을 지나 노보리베쓰의 상점가인 고쿠라쿠도리(極樂通り)에 들어섰다. 거리에는 호텔의 유카타를 입고 나온 관광객들이 거리를 둘러보고 있었다. 편의점을 들르고 기념품 가게를 구경하다가 나오니 험상 궂은 도깨비 한 마리가 서 있다.

못난이 도깨비. 가장 못난 모습으로 서 있는 도깨비이다.
▲ 못난이 도깨비. 가장 못난 모습으로 서 있는 도깨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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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다리에 바지를 겨우 걸치고 축 처진 가슴과 똥배를 자랑하는 도깨비다. 눈은 붕어눈같이 튀어나와 있고 눈살은 잔뜩 찌푸려져 있는 못난이다. 도깨비가 이렇게 무섭지 않아서 어디에 쓸지 모르겠다. 이 도깨비는 내가 노보리베쓰에서 만난 일곱 번째 도깨비였다.

노보리베쓰 마을 어귀에는 노보리베쓰의 명물인 엠마도(閻羅堂)가 있다. 마을을 지키고 있는 커다란 염라대왕 밀랍좌상이 있는 곳이다. 노보리베쓰의 이미지가 지옥이고 이곳이 지옥계곡의 입구이니까 지옥을 호령하는 염라대왕을 모시고 있는 것이다. 이 엠마도는 노보리베쓰의 지고쿠 마츠리(地獄祭り) 때에 사용되는 염라대왕 상을 보관하는 곳이기도 하다. 축제 때 이곳에서는 지옥의 문이 열리면서 염라대왕이 등장한다.

염라대왕. 지옥의 마을에 자리잡은 엠마도에는 염라대왕이 모셔져 있다.
▲ 염라대왕. 지옥의 마을에 자리잡은 엠마도에는 염라대왕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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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트 광택이 너무 반질반질한 이 염라대왕은 평소에는 근엄한 표정으로 조용히 있다가 하루 5번 정도 험상궂은 표정을 지으며 쇼를 하기 시작한다. 염라대왕의 얼굴이 악마같이 변하고 소리를 지르며 사람들에게 호통을 친다고 한다. 염라대왕은 아마도 지옥에 오기 싫으면 착하게 살라거나 죄 지은 사람을 어떻게 벌하겠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 염라대왕의 얼굴이 변하는 시간을 확인해 보고 그냥 발걸음을 돌렸다. 황금 같은 시간을 인형 앞에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게 시간이 맞아 염라대왕을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엠마도를 나오면서 보니 나무판자로 만든 빨간 도깨비가 근육을 자랑하며 서 있는데 얼굴이 뚫려 있다. 한 일본 아이가 이 구멍에 얼굴을 내밀고 사진을 찍고 있다. 도깨비가 다시 나타난 설정은 유치하지만 이 아이들은 신나게 도깨비들을 즐기고 있다. 작은 마을에서 도깨비를 테마로 하여 특색을 살리려는 노력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이 도깨비는 내가 이곳에서 만난 여덟 번째 도깨비였다.

천원공원 도깨비. 온천이 용출하는 곳에 자리 잡은 귀여운 도깨비이다.
▲ 천원공원 도깨비. 온천이 용출하는 곳에 자리 잡은 귀여운 도깨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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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쿠라쿠도리가 끝나는 곳에 천원공원(泉源公園)이 있었다. 실제 온천수가 용출하는 곳에 만들어진 공원이라 주변 공기가 후끈하다. 연기 속의 유황냄새가 다시 코를 강렬하게 자극한다. 온천에서 용출되어 흘러 내려가는 물줄기는 흐리다 못해 뿌옇다. 석회질을 다량 함유한 온천수가 흘러들면서 강물의 색이 뿌옇게 흐려진 것이다. 그래서 노보리베쓰라는 이름도 원주민인 아이누인들의 말로 '누푸루펫(색이 진한 강)'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온천 용출공 앞에는 예상대로 도깨비 한 마리가 서 있다. 노보리베쓰에서 가장 귀엽고 잘 생긴 도깨비다. 괴기스러워야 할 도깨비가 해맑게 웃고 있다. 이 도깨비는 내가 이곳에서 만난 아홉 번째 도깨비였다.

공원 앞의 기념품 가게로 들어가 보았다. 뿔 나고 가죽 걸치고 방망이를 든 도깨비가 캐릭터 상품으로 가득 쌓여 있었다. 과자 봉투에도 웃고 있는 도깨비가 그려져 있었다. 붉은 도깨비, 초록 도깨비는 귀여웠다. 도깨비들은 표정이 다양했다. 도깨비들 천지였다. 나는 도깨비의 수를 세는 것을 포기했다. 나는 도깨비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260편이 있습니다. 이 여행기는 2009년 7월말~8월초의 일본 여행 기록입니다.



#일본여행#노보리베쓰#도깨비#오니#염라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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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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