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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가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가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속행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원으로 들어서고 있다. ⓒ 연합뉴스

한명숙 전 국무총리의 9억 원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 재판이 연속해서 '신기록'을 세우고 있다.

지난 4일 열린 3차공판은 오후 2시에 시작해 다음날 새벽 2시 20분에 끝났고, 11일 열린 4차 공판은 오전 10시에 시작해 다음날 새벽 3시에 끝났다. 순수한 공판진행시간만 10시간이 넘는다. 누군가는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생긴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고 얘기한다.

17시간 동안 진행된 4차공판에는 세 명의 검찰측 핵심증인들이 나왔다. 한신건영 부사장과 개발사업본부장을 지낸 박아무개씨, H교회 시설관리장로와 건축위원회 간사를 지낸 김아무개씨, 한만호 전 한신건영 대표의 운전기사이자 비서실장을 지낸 또다른 김아무개씨가 그들이다.

이들은 대체로 검찰수사과정에서 검찰에 유리한 진술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검찰은 이들이 "한 전 총리에게 돈을 건넨 적이 없다"고 검찰진술을 뒤집은 한 전 대표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는 증인들로 지목해 왔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이날 공판에서 어떤 활약을 펼치냐에 따라 재판의 기류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한 전 대표의 '진술번복' 사태를 다시 뒤집어야 하는 임무가 이들의 입에 달린 셈이다. 하지만 검찰의 기대는 어긋나고 말았다.

"외국 나가고 해외여행도 하지만 1000달러 이상 환전한 적 없어"

가장 먼저 법정에 나선 박아무개씨. 현재 건설업자인 그는 2007년부터 2008년까지 한신건영 부사장 겸 개발사업본부장을 지냈다. 그가 맡은 역할은 공사를 따오는 일이었다. 논란이 되고 있는 H교회 신축사업 수주도 그의 업무였다.

박씨가 1000평 이상 공사를 수주할 경우 전체 공사비의 3%를 리베이트로 받을 예정이었다고 한다. H교회 신축사업의 규모가 500억 원대이었다는 점에서 공사수주에 성공한다면 그는 15억 원이라는 거액을 거머쥘 수 있었다. 그런데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다. 여기에서 두 사람의 진술이 갈린다.

박씨는 한 전 대표로부터 '공사수주팀'의 운영비와 로비자금 등으로 1억 원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한 전 대표가 2007년 4월 18일 '공사수주 로비자금과 관리비로 쓰라'며 1억 원이 담긴 쇼핑백을 건네줬다"는 것. 그는 "그밖에 1원 한 장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 전 대표의 주장은 달랐다. 그는 박씨와 전직 장로 김씨에게 총 5억여 원을 건넸다고 주장했다. 2007년 5월 8일 약 20만 달러, 8월 말~9월 초 10만3500달러와 현금 2억 원을 두 사람에게 전달했다는 것.

한 전 대표는 박씨가 달러를 요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박씨는 "사업 때문에 외국에 나가고, 1년에 한번씩 늦둥이 아들과 해외여행을 하지만 1000달러 이상 만져본 적이 없다"고 한 전 대표의 주장을 일축했다. 그는 "환전도 1000달러 이상 해본 적이 없다"고도 했다.

평행선을 달리고 있는 두 사람은 이날 대질신문에서 격돌했다. 한 전 대표의 입에서는 "검찰이 (검찰측 증인들의) 간뎅이를 키워놨다"는 거친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한만호 "(2007년) 김 장로에게 1억 원 송금하고, 17만 달러에서 22만 달러 사이의 달러를 제공했어. 당신과 김 장로가 같이 있을 때 201호에서 준 것 같아."
박○○ "왜 달러를 줬다고 하나? 나는 만져본 적이 없다."

한만호 "검찰에서 (증인들) 간뎅이를 키워 놔서 이러지."
박○○ "외국에 사는 애들도 없는데 왜…. 다른 사람에게 돈을 갖다 줘놓고 나한테 돈을 줬다고 하나?"

한만호 "간뎅이가…."
박○○ "천벌 받아. 나중에 봐."
한만호 "그러자고."

박씨는 지난해 한 일간지와 한 인터뷰에서 "법정에 증거로 제시된 회사의 채권회수목록은 한 전 총리 사건을 제보한 남아무개씨 등이 짜고 만든 것"이라고 주장한 인물로 전해졌다. 검찰이 내놓은 핵심증거에 의문을 제기한 것. 하지만 이것도 채권회수목록에 적힌 자신의 관련내용(자금 수수)을 부인하기 위한 노림수라는 지적이 있다. 그런데 그는 이날 "그 인터뷰 내용은 내가 말한 것과 전혀 다르다"고 주장했다.      

"로비활동 안 했다" 진술했다가 검찰진술조서 앞에 고개 숙여

 정치자금법 위반 협의로 불구속 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가 지난 4일 오후 서울 서총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3차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정치자금법 위반 협의로 불구속 기소된 한명숙 전 총리가 지난 4일 오후 서울 서총동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3차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 유성호
오후에 속개된 4차공판에서는 H교회 장로를 지낸 김씨가 법정에 나왔다. 그는 1995년부터 2006년까지 H교회의 시설관리장로를 지냈고, 장로직에서 은퇴한 후에는 교회신축과 관련된 건축위원회 간사를 맡았다. 앞서 언급한 박씨는 그를 가리켜 "류아무개 H교회 담임목사의 오른팔"이라고 표현했다. 그럴 정도로 교회 안에서 '힘'이 있는 인물이라는 것.

지난 2007년 한신건영 부사장이었던 박씨가 김씨를 한 전 대표에게 소개했다. 이후 그는 한신건영이 추진하던 교회신축사업 수주 과정에서 '로비스트'로 활동했다. 검찰진술조서에 따르면, 그는 "나는 내부적으로 협조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즉 건축위원회 간사로서 한신건영의 수주활동에 협조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게다가 검찰진술조서를 보면, 김씨가 "입찰업체들의 입찰금액이 비슷하니 10억 원 정도 낮추어 입찰금액을 작성하라"며 건축공사 수주에서 가장 중요한 입찰정보를 제공한 장면이 나온다. 그가 어느 정도로 로비활동을 벌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 전 대표는 박씨와 대질신문하는 과정에서 "극장 인테리어 비용으로 1억5000만 원, 운영비로 1억 원을 김씨에게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김씨는 "극장 인테리어는 한신건영에서 해주기로 했고, 한 전 대표에게 받은 1억 원은 음향․조명 설치 등의 비용으로 썼다"며 "또 초기 극장 운영비로 매달 2000만 원씩 6개월(총 1억2000만원)을 지원받았다"고 해명했다.

그런데 한 전 대표는 자신이 지원했다고 주장한 '2억5000만 원' 외에 교회신축사업 수주를 위한 활동자금(즉 로비자금)으로 김씨와 박씨에게 현금과 달러로 5억여 원을 제공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5억여 원 가운데 1억 원은 김씨의 딸 계좌에 들어간 것으로 확인됐다. 김씨는 1억 원도 '로비자금'이 아닌 '문화사업 투자금'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김씨를 한 전 대표에게 소개했던 박씨조차 이날 "김 장로가 (금융) 적색거래자라 은행에 돈이 입금되면 다 빠져 나가 버린다"며 "(2007년 5월 김 장로 딸에게 송금된 1억 원은) 공사수주에 필요한 활동비 명목"이라고 진술했다.

김씨는 자신이 로비활동을 벌였다는 점을 부인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앞서 언급한 검찰진술조서가 공개되자 고개를 숙였다. 그는 한 전 총리 변호인단의 거듭된 추궁에 "(검찰에서 왜 그렇게 진술했는지) 이해가 안 된다"는 궁색한 답변만 내놓았다. 게다가 그는 검찰에서 진술했던 내용("한명숙이 외적으로 신경쓰고 있다")과 달리 "한 전 총리가 공사수주와 관련해 특별히 해준 게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히 일각에서는 H교회 신축사업 입찰에 25개 건설업체가 참가했고, 최종 5개 업체가 막판 경쟁을 벌였다는 점을 들어 김씨가 또다른 업체에서도 돈을 받았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던 그가 현재 퀵서비스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의혹을 부채질하고 있다.

돈이 든 여행가방 전달 장소 1001호실 '오픈시기'도 오락가락

세 번째 검찰측 증인은 한 전 대표의 운전기사로 근무했던 김아무개씨. 그는 운전기사였지만 '비서실장'으로 불렸다. 전직 장로 김씨와 박씨에게 돈을 전달했고, 한 전 총리의 비서 출신인 김아무개씨에게 2억 원(한 전 대표가 김씨에게 빌려줬다는 3억 원 중 일부)을 받으러 갔던 인물로 지목받고 있다. 검찰조사에 가장 적극적으로 협조해온 인물로 꼽힌다.

한 전 대표는 지난 2007년 4월 자신의 빌딩 1001호에서 돈이 든 여행용 가방을 꺼내 김씨에게 건네주며 전직 장로 김씨와 부사장 박씨에게 전달하라고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씨는 "1001호는 2007년 6월부터 한 전 대표가 사용했으며 여행용 가방을 본 적이 전혀 없다"고 반박했다.

그런데 한 전 총리의 변호인단은 김씨의 진술에 의문을 제기했다. 1001호에 가구가 배달된 날이 2007년 4월 10일라는 '배송 영수증'을 반박증거물로 제시한 것. 이에 김씨는 "그건 모르겠다, 가구가 (1001호에 안 오고) 한명숙 총리 집에 갔을 것"이라는 황당한 답변을 내놓았다. 

게다가 김씨의 법정진술과 상반되는 검찰진술조서도 공개됐다. 변호인단이 공개한 검찰진술조서(2010년 4월 23일자)에 따르면, 김씨는 "2007년 8월경 (아랫층에 있던 가구의 일부를) 1001호로 옮겼다"고 진술했다.

로비자금이 담긴 여행용 가방이 김씨에게 건네졌던 1001호실의 '오픈시기'가 2007년 8월에서 2007년 6월로 바뀐 것. 게다가 1001호실에 사용될 가구가 4월에 배송됐다는 사실이 이날 처음으로 밝혀져 그의 진술 신빙성도 의심받게 됐다. 

이에 김씨는 "그때는 대충 그런 정도였다고 진술했는데 오늘 진술한 내용이 맞다"며 "검찰에서 허위로 진술한 게 아니라 개월수에 차이가 있었을 뿐"이라고 수습에 나섰다.

결국 김씨와 한 전 대표는 대질신문에서 맞붙었다.

한만호 "(김씨에게) 질문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서 그만두겠다. 저는 일관되게 김씨에게 시켜 박씨와 김씨에게 (5억여 원을) 제공했다."
김○○ "여행용 가방을 주셨다고 하는데 언제 누가 샀으며 사이즈가 어떤지 얘기해야 한다. 그 여행용 가방을 가져오라. 거기에 내 지문이 있을 테니까. 그 가방만 가져오면 입증된다. 찾아서 오라."

한만호 "그 가방을 가지고 간 사람이 당신인데 어떻게 가져와?(재판정에 폭소가 터짐)"
김○○ "…."

그런데 검찰은 한 전 대표가 5억여 원을 전달했다고 지목한 박씨와 김씨의 계좌추적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날 법정에서 자신과 가족이 검찰의 계좌추적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한 전 대표도 진술 번복... 5억여원 성격 '성과급'→'로비자금'

하지만 진술의 신빙성 문제는 검찰증인들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다. 재판의 기류를 주도해온 한 전 대표에게도 똑같은 문제가 드러났다. 그가 지난 3차공판에서 5억여 원(검찰이 한 전 총리에게 건네갔다고 주장하는 돈)이 공사수주와 관련된 '사전성과급'이라고 주장했다가 이번에는 '로비자금'이라고 주장한 것.

H교회 신축사업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 박씨와 김씨를 영입했고, 그들에게 로비자금으로 쓸 5억여 원(현금+달러)을 제공했다는 것이 한 전 대표의 주장이다. 그는 '성과급'에서 '로비자금'으로 진술을 바꾼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실탄'(로비자금)이라고 쓰면 문제가 되니까 '성과급'이라고 항목을 달리했다. 장부에 기재하지 않으면 형사적 문제가 된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성과급이라고 표현했다. 20만 달러와 3억 원은 순수한 실탄이다. 그들(김씨와 박씨)은 (그 실탄의) 종착역이 아니다. 그들은 전달자일 뿐이다."

한 전 대표는 '종착역이 어디냐?'는 변호인단의 질문에 "특정종교에 영향을 끼치고 싶지 않다"며 "그들이 5억여 원을 누구한테 줬는지는 나도 모른다"고 답했다. 그는 "20만 달러와 현금 3억 원 등 5억여 원은 공사를 수주하기 위한 실탄으로 그들에게 지급된 것"이라고 거듭 주장했다.

한 전 대표로서는 진술의 신빙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날 법정에서 '5억여 원'의 사용처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한명숙 재판'의 기류는 2차공판에서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한 전 대표가 극적으로 "한 전 총리에게 돈을 건넨 적이 없다"고 검찰진술을 뒤집었기 때문이다. 이후 검찰이 '접견녹음CD'로 반격을 노렸지만, 한명숙 핸드폰 번호 입력 시기 논란, 오락가락하는 검찰측 증인들의 진술 등으로 검찰의 공소사실은 조금씩 무너졌다.

하지만 그에 비례해 한 전 대표의 진술번복도 잦아지면서 재판부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앞으로 열릴 공판도 뜨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한명숙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한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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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남 강진 출생. 조대부고-고려대 국문과. 월간 <사회평론 길>과 <말>거쳐 현재 <오마이뉴스> 기자. 한국인터넷기자상과 한국기자협회 이달의 기자상(2회) 수상. 저서 : <검사와 스폰서><시민을 고소하는 나라><한 조각의 진실><표창원, 보수의 품격><대한민국 진보 어디로 가는가><국세청은 정의로운가><나의 MB 재산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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