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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드라마 <욕망의 불꽃>. 가족 이야기를 재벌가를 통해 엿본다.
 MBC 드라마 <욕망의 불꽃>. 가족 이야기를 재벌가를 통해 엿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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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 하나. 한국 드라마를 두 가지로 나누는 기준은?

힌트. 돈은 물론 많고 무려 3세까지 가업을 대물림하며 가끔 맷값을 주고 직원들을 두들겨 패는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다. 답은 재벌. 혹은 재벌과 재벌 2, 3세, 그리고 그의 일가 친척들.

한국 드라마는 주인공이든 아니든, 최소 대재벌은 아니더라도 기업체 하나 정도는 가진 사장님은 나와 줘야 드라마가 굴러 갈 것 같은 착각이 들 지경이다. 그도 아니면 병원, 대학, 호텔 등의 병원장, 사장, 이사장, 오너거나 최소한 대기업에서 근무한 이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아니, 꼭 그래야만 할 것 같다.

농담이 지나치다고? 과연 그럴까? 현재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를 살펴보면 그 답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문근영이 분한 '위매리'는 <매리는 외박중>(KBS)에서 음악 드라마를 기획 중인 JI기획 대표 정인(김재욱)과 계약 결혼을 강요 당한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간 한인 재력가의 아들이다.

<역전의 여왕>(MBC)의 황태희(김남주)는 재벌 회장의 서자인 구용식(박시후)과 티격태격 밀고 당기기 중이다. 황태희는 현재 계약직 사원에 이혼녀다. 그러고 보니 <글로리아>의 배두나 '나진진'을 사랑하는 이강석(서지석)도 재벌가 첩의 자식이다. 재벌 2세 혹은 3세들은 유난히 미모의 평민 여성들을 사랑한다.

일일, 주말드라마로 넘어오면 사정은 더 심각하다. KBS 아침드라마 <사랑하길 잘했어>의 주인공 아버지들은 모두 대기업 건설회사 사장 출신, 대기업 상무 출신으로 설정됐다. 일일극 시청률 정상을 달리고 있는 KBS <웃어라 동해야>의 도진은 호텔 부총지배인이고, 그의 어머니는 호텔 사장이다.

MBC 아침드라마 <주홍글씨>가 네 남녀의 불륜과 배신 등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 SBS 아침드라마 <여자를 몰라> 역시나 이혼녀와 속옷업계 2위 기업의 사장 '서자' 아들과의 로맨스를 그린다. "성품이 착한 주인공 순정이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꿈과 사랑을 이루어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는 작품 의도를 표방한 <호박꽃 순정>(SBS) 또한 소박하고 털털한 성격의 식품기업사주의 아들이 주인공이다.

TV 드라마의 변함없는 재벌사랑

그리고 오늘도 변종 신데렐라 드라마들은 계속된다. 왕자님은 물론 재벌 혹은 기업가의 2세 혹은 3세들이다. 재벌 2세와 사랑에 빠져 신분상승하는 스토리, 물론 어제 오늘일은 아니다. 아이까지 갖게 한 애인이 재벌가에 '투신'하자 처절하게 복수한다는 김수현의 <청춘의 덫>의 원작이 방영된 해가 1979년이었으니, 당시로서는 꽤나 전복적인 스토리였던 셈이다.

그래도 이건 도가 지나치다. 현재 방송되고 있는 공중파 3사의 드라마 편성 편수는 월화드라마 4편, 수목드라마 3편, 금요주말드라마 7편, 일일/아침드라마(시트콤 <몽땅 내 사랑> 제외) 6편으로 총 20편이다. 여기에 KBS의 농촌드라마 <산너머 남촌에는>과 청소년 드라마 <정글피쉬2>를 제외하고, 이들 중 재벌가나 기업가와 관련이 전혀 없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드라마를 꼽는 일은 꽤나 수고스런 작업일 정도다.

그러한 예는 확연히 눈에 띄게 다른 장르인 액션블록버스터 <아테네: 전쟁의 여신>이나 사극인 <근초고왕>, 단막극 <드라마 스페셜> 정도가 전부다. 정치드라마 <대물>에서 대권후보 강태산(차인표)을 키워준 건 장인인 산호그룹 회장이고, 방영 예정인 <프레지던트>에서 훗날 대통령으로 거듭나는 '민주화 투사' 장일준(최수종)의 정치적 야심 강한 아내 조소희(하희라)는 굴지의 재벌 회장 외동딸이다.

 SBS <대물>
 SBS <대물>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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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우리네 현실을 반영해야 리얼리티가 산다. 어쨌건 정치도 돈이 있어야 굴러갈 수 있으니. 그래서 독재자의 딸도 아니고 민주화 세대이자 총리 출신도 아닌, 가난한 아나운서 출신의 서혜림(고현정)이 최초의 여성대통령에 당선되는 <대물>이 궁극의 판타지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가족 이야기도 재벌가를 통해 엿보는 시대다. 공교롭게도 MBC 주말·일일드라마인 <욕망의 불꽃>과 <폭풍의 연인>이 그런 경우다. 전자의 경우 "한 재벌가를 중심으로 인간의 욕망과 탐욕, 권력" 등에 초점을 맞췄고, 후자 역시 호텔 상속인 3대를 통해 세대별로 각기 다른 고민을 형상화한다.

어쨌건 이들은 재벌가를 배경으로 누구는 경영권을 사수하고, 누구는 돈과 권력을 욕망하며, 누구는 사랑을 불태우고, 누구는 또 불륜을 저지른다. 성공리에 종영한 <자이언트>가 다른 점은 일종의 자수성가를 다뤘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작품 완성도야 논외로 하더라도 수많은 캐릭터들이 재벌가 안에서 살아 숨쉰다. 평민들은 그들에게 간택 받아 관계 맺거나 그들을 떠받드는 직원들로만 존재한다.

'제비' 홍식이가 소박한 욕망을 갈구하던 <서울의 달>의 달동네는 재개발로 인해 사라진 지 오래다. 심지어 <전원일기>도 종영한 지 햇수로 9년이다. 최근 종영한 <인생을 아름다워>를 비롯해 '김수현표' 가족 드라마가 꾸준히 호응을 얻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주배경이 중산층이나 서민이어서인지도 모를 일이다. <사랑은 뭐길래>의 기록적인 시청률을 떠올려보라.

영리하게 판타지를 도입한 <시크릿 가든>

 SBS <시크릿가든>
 SBS <시크릿가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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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SBS)은 그런 점에서 꽤나 흥미로운 '재벌이 연애하는' 드라마다. 역시나 하지원이 하층 계급 여성으로 등장했던 2004년 작 <발리에서 생긴 일>은 재벌 2세가 끝내 질투에 휩싸여 자신이 사랑했던 가난한 여인과 그의 애인을 쏴 죽이고 자살하는, 우리 드라마로서는 꽤나 충격적인 결말을 보여준 바 있다.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시청자들에게 전파(?)했던 이 드라마의 이 '언해피엔딩' 결말은 결국 '신데렐라' 드라마가 난무하는 한국의 브라운관 지형도에서 계급 화해의 불가능성을 역설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다시 하지원은 재벌 3세 현빈과 연애한다. 굴지의 백화점 사장인 이 녀석 김주원(현빈)은  꽤나 독살스럽다. <내 이름은 김삼순>에서 역시나 현빈이 분했던 '삼식이'와는 급이 다르다. 연애를 위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읽고, 액션 연기자인 길라임에게 독설을 내뱉는다. 

"사회, 경제 체제에서 노동 조직에서의 부의 분배방식과 수량의 다름에 따라 생기는 인간집단이 뭔지 알아? 바로 계급이야. (부자들) 그들이 1년에 1억씩 쓰면서 원하는 건 딱 두 가지야. 불평등과 차별. 군림하고 지배할 수 없다면 철저히 차별받기를 원한다고. 그게 그들의 순리고 상식이야."

김은숙 작가는 이 장르의 법칙을 가지고 놀 줄 안다. 일찍이 <파리의 연인>으로 '신데렐라' 드라마를 세련되게 완성해 내는 동시에, '그게 다 꿈이었다니까'라는 실험적인 결말로 일부 시청자들의 원성을 샀던 김은숙 작가는 이제 드러내놓고 주인공 남녀 사이에 계급 차이가 존재한다고 못박는다. 그렇다면 불평등과 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 이 세상에서 이 둘을 어떻게 엮어줄 수 있을까.

그래서 선택한 것이 바로 판타지다. 재벌3세 김주원과 가난한 고아 액션배우 길라임의 몸을 잠시 뒤바꾸어 그들이 각자의 생활을 체험케 함으로서 접점을 만든다. <시크릿 가든>은 4각 관계에서 생기는 멜로 라인을 비롯해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의 분위기를 거스르지 않는다. 또 재벌을 등장 시켜 누릴 수 있는 시각적 호화로움이나 어머니의 반대를 비롯한 익숙한 갈등 구조도 그대로다. 전작인 <파리의 연인>의 명대사 향연 또한 놓치지 않으면서 <온에어>에서 다룬 연예계 이면까지 아우른다. 그야말로 영리하다.

<발리에서 생긴 일>에서 헤게모니 이론을 언급했던 TV 드라마는 이제 신자유주의 체제에서의 불평등과 차별의 계급를 거론하는 단계로 넘어갔다. 그러나 김은숙 작가가 영리하게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과시하는 동시에 판타지를 끌어들임으로써 장르 속 세계로 탈주해 버린다. 그렇게 기존의 식상한 신데렐라 드라마와의 차별을 공고히 한다. 그 안에서 우리는 현빈을 비롯한 재벌3세, 한류스타, 액션 감독의 하지원에 대한 애정 공세를 닥치고 즐기면 된다. <시크릿 가든>은 한 마디로 영리한 드라마다.

재벌과 비정규직, '갑'과 '을'에 대해 언급하는 <역전의 여왕>

 MBC <역전의 여왕>
 MBC <역전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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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 비해 <역전의 여왕>은 다소 의외의 곁가지를 보여준다. 박지은 작가의 전작 <내조의 여왕>처럼 '바보온달' 남편을 승승장구하게 만드는 '평강공주' 전업주부의 '억척성공기'와 재벌남2세와의 달달한 로맨스를 그릴 것으로 예상했다면, 반쯤 틀리고 반쯤 맞았다고 보면 된다. 모자라서 귀여웠던 억척주부 천지애가 능력 있는 직장여성 황태희로 변모했다.

"제가 살아보니까, 인생은 '갑'과 '을'이더라고요. '갑' 보기에는 우스워보일지 몰라도 여기 있는 '을'들, 다 회사에서 받아간 만큼은 자기 밥벌이 하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 잘라서 또 얼마나 잘 먹고 잘 살라 그러세요. 지금도 잘 살면서."

황태희는 재벌2세인 구조본 본부장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아줌마가 재벌2세와 연애하는 이야기가 주된 갈등의 요인인 것은 엇비슷하지만 오히려 황태희는 직장 여성의 삶을 일부 반영하는 캐릭터로 성장했다. 결국 까칠한 재벌2세의 사랑을 받게 될 운명이지만, 6개월 계약직의 운명과 (비록 잠시 이혼했지만) 남편과 딸을 내던지고 사랑에 올인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그 둘은 분명 갑과 을의 관계다. 자본과 시스템을 쥔 '갑'과 그 안에서 수레바퀴처럼 구르는 삶을 살면서 때로는 굴종하기도 하는 '을'의 관계 말이다.

결국 <역전의 여왕>은 재벌2세와 '연애도' 하는 로맨틱 코미디의 범주와 맞닿아 있다. 하지만 비정규직에 내몰린 황태희 주변 직장인들의 삶을 묘사하는 데 시간을 할애함으로써 일말의 현실감을 확보하려고 노력한다.

일견 인간의 얼굴(게다가 잘 생기고 매력적인)을 한 재벌2세를 그리는 것이야 장르적 속성인 탓에 포기할 수밖에 없겠지만, 전작은 물론 여타의 드라마와 차별화를 이루려는 시도는 평가할 만하다. 일용직 청소 용역 노동자의 근무 환경이나 소매상권까지 장악하는 대기업의 유통구조를 욕하는 드라마를 만나기가 어디 흔한가. 그것이 비록 인간적으로 그려진 재벌 총수의 목소리라도 말이다.

우리에게 관심없는 '그들'에 대한 짝사랑?

"이건희와 그 주변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의 세계를 잘 몰랐다. 이건희는 그게 경영자로서 약점이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런 약점을 굳이 보완하려는 의지는 없었다. 핏줄이 다른 귀족이라고 여기고 있던 그들은, 보통 사람들의 정서를 알고 싶어 하지 않았다."
-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 중에서

오늘도 재벌의 경영세습은 계속된다. 삼성가의 3세 이재용과 이부진은 사장으로 승진했다. 이러한 3대 세습은 거의 북한의 김일성 일가와 맞먹는다. 오늘도 재벌들의 폭력은 계속된다. 조폭을 동원한 한화는 그나마 양반이었을지 모른다. 노동자를 때린 맷값으로 2000만 원을 쓴 최철원씨는 언제쯤 출소할까?

그러나 현실의 분노와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우리의 간극은 너무나도 크다. 그렇게 오늘도 한국의 시청자들은 재벌들의 이야기를 소비한다. 그들은 신데렐라와 사랑에 빠지고, 불륜과 패륜을 저지른다. 또 그들은 정치도 하고, 사업도 하며, 가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여준다. 어찌됐건 시청자들의 재벌사랑은 계속된다. 김용철 변호사의 말처럼, 재벌은 서민들의 정서에 아무런 관심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야말로 짝사랑이다.

이를 드라마를 생산해 내는 작가의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아니면 주로 대기업의 광고를 받는 방송사의 내부 매커니즘으로 의심하면 그만일까? 그도 아니면 한때 "부자되세요"가 최고 유행 카피였던 대한민국 국민들의 자본주의적 욕망으로 읽어도 될까?

<추노>는 권력에 대해 반기를 들고 혁명을 말했던 유일한 드라마다. 그러나 <추노> 또한 적극적인 해석의 여지를 열어 젖혀야 하는 액션 사극이라는 장르의 탈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극에서 우리는 오늘도 재벌을 동경하고 재벌을 욕한다. 다만 장르의, 캐릭터의, 스케일의 차별점만이 존재한다. 그렇게 오늘도 가장 대중적이라는 TV 브라운관을 잠식당하고 있다.


#시크릿가든#역전의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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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현 영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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