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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서 '별제'가 입에 올려선 안 되는 말을 했다면 그것은 심각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곳 역삼동은 말죽거리와 역촌, 하방하교(下方下橋) 등의 마을과 역촌을 합해 역삼동이라 부른다.

이 일대는 조선왕조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양재역 벽서(壁書) 사건인 정미사화(丁未士禍)의 발단이 된 곳이다.

인종의 뒤를 이어 명종이 즉위하자 조정은 그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의 치마폭에 떨어져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그러자 양재역 벽에 신랄한 문장이 붙어 어지러운 세상을 비웃었다.

<여자 임금이 위에 있고 간신이 아래서 국권을 농락하니 이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닌가.>

벽서를 전해들은 윤대비는 크게 노했다. 선비들을 잡아 죽이고 유희춘, 이언적 등 당대의 명현 수십 명을 귀양 보내는 정미사화를 일으킨 것이다. 이게 '양재역 벽서사옥'이다.

어질고 재주있는 사람이 많이 산다고 붙여진 양재(良才), 그 지명이 오히려 선비들에게 피해를 준 것이다.

지방에서 올라온 선비들이 한양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말에 말죽(馬粥)을 먹이고 막걸리 한 잔 걸친 후 짚신 끈 질끈 동여맨 곳이 화살맞은 사내의 주검이 발견된 역촌이다.

"<뇌공도>를 그린 김덕성은 중인 신분으로 이곳 양재역 가까이에서 지낸 것으로 여러 화원들이 말하고 있네."

양반들의 직업은 관직에 나가는 것 뿐이지만 중인은 다양하다. 그렇다보니 사회에 적응하는 방법도 달랐다.

당대의 질서에 거부하며 몸으로 부딪치던 그들은 청계천의 위항(委巷)이나 인왕산 자락이 본거지였다. 그들이라고 계(禊)가 없는 것도 아니어서 왕휘지의 난정수계(蘭亭修禊)를 본뜬 문학모임도 있었다.

직업 또한 그 얼마나 다양했는가. 규장각 서리에 승정원과 비변사 서리가 있었고 만호에 훈장, 술집 중노미, 별감과 도화서 화원 등 천차만별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시를 짓고 그림을 펼쳐보며 술을 마시는 시주풍류(詩酒風流)를 즐긴다는 점이다. 다양한 직장일 때문에 자주 만나진 못해도 언제든 보고 싶을 땐 불쑥 찾아가 시를 짓고 술을 마셨다.

정월엔 한길에 나가 달 구경하는 가교보월(街橋步月)이오, 2월엔 높은 산에 올라가 꽃구경하는 등고상화(登高賞華)가 있었고, 3월엔 한강 정자에 나가 맑은 바람 쏘이는 강사청유(江榭淸遊)도 즐겼다.

특히 4월엔 성루에 올라가 초파일 등불 구경하는 소박한 모임성대관등(城臺觀燈)을 가졌으니 유학을 숭상하는 양반들 입장에선 달갑지 않은 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중인들의 모임 중 가장 빼어난 게 풍록수계(楓麓修禊)였다. 이것은 단풍든 산기슭에서 천렵을 즐기는 것으로 회원 대부분이 비변사나 승정원 서리였지만 한 사람만 특별했다. 예전에 세자궁 별감을 지낸 남치옥(南致沃)이었다.

"흥미로운 건 남별감이 이곳 역삼역에 둥지를 튼 지 오래됐다는 것이네. 요즘 그의 집엔 지방에서 오는 손님들이 자주 들리는 모양이네만 소문에 의하면 예전 궁에서 일했던 별감들이 <하례희(下隷戱)>란 모임을 만들어 술과 음식을 장만하고 미색이 고운 기녀를 불러 거문고 뜯거나 술을 치며 왁자하게 놀이판을 즐긴다는 것이네."

"흐음."
"바로 그 자리에 뜻밖에 김덕성 화원이 낀 것을 본 사포(司圃)가 있네."

사포는 관직 이름이다. 별감을 내명부에선 액례(掖隷)라 부르기에 <하례희>란 모임을 만든 것이지만 별감들은 하는 일이 다름을 관직명으로 알 수 있다.

사알(司謁)의 '사(司)'는 관장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렇기에 사알은 아뢰는 일을 맡는다는 뜻이고 '사약(司鑰)' 별감이 관리하는 중요한 물건을 맡는다는 곳이다. '사안(司案)'은 서안을 관리하는 것이며 '사소(司掃)'는 청소를 관리하는 것이며 '사포(司圃)'는 채소밭이나 꽃밭을 나타낸다. 그러나 하는 일은 한결 은밀하다.

꽃밭과 채소밭은 그저 평범한 꽃과 채소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상음(上陰)과 하음을 나타낸다. 상음은 내명부 첩지를 받은 후궁이지만 하음(下陰)은 첩지를 받지 못한 나인(內人)이나 궁비(宮婢)들을 가리킨다.

궁에는 들어왔지만 아직 성상의 총애를 받지 못하고 뒷전에만 있는 여인을 가리킨 말이 하음이고 보면, 그녀들이라고 육신이 매끄럽고 탄력있는 시기를 궁 안에서 허송세월 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사내들의 끊임없는 유혹이 뒤따르자 궁으로 들어온 지 삼 년만에 밖으로 나갈 길을 찾는 게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그 길을 안내하는 이가 액정서의 별감 '사포'인 남치옥이었다.

그는 어느 날 맹랑한 궁인 하나를 만난 적이 있었다. 열일곱쯤 되어 보이는 계집으로 유난히 사가에 관심이 많은 계집은 초란(草蘭)이라 했는데 궁에 들어온 지 여섯 달 만에 밖에 나가고 싶어 안달이었다.

"나는 궁이 싫어. 밖에 나가 튼실한 사내 만나 아들 딸 낳고 오순도순 살 거야."

그녀가 자신있게 말한 것처럼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는 소양이 있어 보였다. 남치옥은 예전에 들은 말이 있어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묻자 초란의 대답은 망설임이 없었다.

"혼인을 하여 사내와 가정을 이루려면 뭣보다 중요한 게 합궁(合宮)이지요. 좋은 기운을 서로 나누어 가지는 방법을 부부가 의논하는 게 좋은 방법이 아니겠어요?"

남치옥이 은근하게 끼어들었다.
"그래, 너는 그 방법을 아느냐?"
"그럼요."

"말 하거라."
"부부는 몸으로 느끼고 몸으로 대화하며 어려운 문제를 푸는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몸으로?"
"그렇지요. 혼인을 했다면 아무래도 방사(房事)를 통해 알아야겠지요."
"방사를 통한다?"

"방사를 나누면 땀이 흐를 것이고 이것은 건강을 측정하는 중요한 것이라 봅니다. 다시 말해 땀으로 남편의 건강을 측정한다는 것이지요."

"어떻게?"
"무거운 걸 가지고 멀리 갔던 탓에 흘리는 땀은 신장에서 나오고 달리기를 하여 흘리는 땀은 간장에서 나옵니다. 음식을 포식해 흘리는 땀은 위장에서 나오며, 깜짝 놀라 탈정하여 흘리는 땀은 심장에서 나오고, 몸을 흔들어 나오는 땀은 비장에서 나옵니다. 그러므로 서방님과 방사를 나눌 때 흐르는 땀 냄새로 건강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봅니다."

"네가, 혼인을 했다면 방사를 통해 알 수 있다 했으니 그것은 땀 냄새일 것이다. 만약, 혼인하기 전이라면 어찌하겠느냐?"

"그것은 상대방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눈을?"

"예에. 의서에 그런 말이 있습니다. '눈은 간(肝)의 주인이며 눈물 구멍은 간의 구멍이며, 오장육부의 정(精)과 십이경맥(十二經脈)이 위로는 눈에 모여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눈은 내장 장애의 창이며 방사의 창이므로 눈을 보면 상대의 건강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말은, 눈이야 말로 모든 기능의 상황판이라는 것이다. 그녀의 말은 좀 더 대담해졌다.

"나으리, 소녀가 아는 몇 가질 간추리자면, 눈알의 흰자위 부분이 얼핏 보기에도 분홍빛 모양을 띠면 여인은 정열적 경향이 짙습니다. 이것은 혈색이 좋고 항시 온화한 기색을 풍기며 합금(合衾)에 대한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눈 꼬리 부분의 많은 주름살은 합금에 대한 경고사항으로 나타납니다."

그 이유를 아느냐는 되물음에 초란의 대답은 거침없었다.
"눈 꼬리는 심장과 대응되며, 심장에 적신호가 와 있기 때문입니다. 심장을 조종하는 주인은 신장이기 때문이지요(心之合脈也 其榮色也 其主腎也)."

이것을 풀어 말하면, 신장이 재채기 하면 심장이 독감을 앓는 격과 같은 것이다. 어찌 이것뿐인가. 눈 뚜껑이 실룩거리는 여인 역시 남녀의 합금 램프에 빨간 불이 켜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눈 뚜껑은 비장과 대응되는 관계로 마음의 불안이 분비에 장애를 일으키기 때문이다(腎之合骨也 其榮髮也 其主脾也).

초란은 덧붙이는 걸 잊지 않는다.
"합금에 강해지고 싶으면 뭣보다 내장을 강화하라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내장을 강화하기 위해선 지단(地丹)이란 식이법으로 내장을 튼실하게 한 후 정력강화약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 천단(天丹)이라 부르는 '정기신(精氣神)' 비법으로 방사를 치르면 더욱 젊어지고 무병장수하게 됩니다."

"어허, 이 사람아. 세상에 그런 방법이 어딨단 말인가? 자네 말을 들으니 너무 달콤해 정신을 차릴 수 없네. 가만···, 정력이 강해지는 게 식이법이라 했는가? 내장부터 강화해야 한다고?"

"그렇습니다, 나으리. 사계절의 제철 음식을 먹는 것이므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허면, 정기신이란 것도 간단한가?"

"그렇지요. 크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어린아이가 천자문을 배운 후 소학(小學)을 익히는 순서라고나 할까요."

"그렇다면 한가하게 자네와 이런 저런 말을 할 게 아니네. 내 들으니 자네가 궁밖에 나가 사는 게 소원이라 했으니 내가 자릴 마련함세. 아뭇소리 말고 역삼동에 있는 내 집으로 오게."

"아닙니다."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린가?"

"쇤네가 궁에 들어온 지 세 해가 못 됐지만, 그렇다고 아무 소득이 없었던 건 아니지요. 내의원에 심부름을 오가다 보니 이런 저런 비방을 듣게 되어 어지간한 의녀(醫女)들보다 남녀의 합금에 대해 아는 바가 많습니다. 그렇다 보니 쇤네가 밖에 나가면 기루(妓樓)라도 하나 차렸으면 합니다."

"그건 염려 말게. 내가 그리 해줌세."
"나으리, 나으리가 쇤네의 주인이 되시려면 기루 외에 조건 하나를 더 들어주십시오."

"뭔가? 말하시게?"
"<뇌공도>를 그린 김덕성 화원을 가까이 두어 쇤네가 언제나 만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되니 당분간 내 집에 머물러 날 치료나 해주게."

[주]
∎합금(合衾) ; 섹스
∎위항(委巷) ; 중인들이 사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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