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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맑은 주말 오후 서울의 한 버스 정류장, 버스가 도착하자 청바지에 흰색 계열의 티셔츠를 입은 한 소년과 몇 명의 사람들이 차례대로 버스에 오른다. 마지막으로 버스에 탄 소년이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대자 버스 안에는 '청소년입니다'라는 기계음이 울리고 멈춰있던 버스는 다시 정류장을 출발한다. 문제. 이 풍경에서 인권침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어디일까?

정답은 단말기의 안내 멘트다. 공공장소에서 당사자의 동의 없이 특정 신분을 노출시킴으로써 청소년의 인권을 침해하는 내용이기 때문. 부정탑승자를 가려내기 위해 시행되던 이 안내 멘트는 국가청소년위원회의 권고로 지난 2006년부터 서울시 버스에서 삭제됐다. 혹자는 정말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으로 이게 왜 인권침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청소년을 청소년이라고 부르는 게 왜 인권침해?'.

국가인권위원회에서는 이런 시민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인권과 관련된 영화나 책들을 꾸준히 기획해왔다. 김두식 경북대 법학대학원 교수가 지은 <불편해도 괜찮아>는 이런 시도들의 연장선에 놓여있는 책이다. 김 교수는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라는 부제를 가진 이 책에서 드라마와 영화, 다큐멘터리 80여 편을 도구삼아 청소년, 성소수자, 장애인, 여성, 폭력, 종교, 차별, 검열과 표현 등 인권과 첨예하게 닿아있는 소재들을 대중들이 소화하기 쉽게 담아냈다.

재미와 의미 동시에 잡은 인권 이야기

 <불편해도 괜찮아>
 <불편해도 괜찮아>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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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책은 '인권도서'라는 태생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기본적으로 인권을 다룬 책들은 소재의 특성상 독자 내면에 있는 어느 지점을 지적하는 구성으로 만들어지고 그 결론 또한 '인간이라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느낌을 주기 쉽다. 어지간히 훈련된 인권의식을 가지고 있는 독자가 아니라면 괜히 책 한 번 읽다가 '나쁜 사람'이 되고 마음만 불편해지기 쉽다는 얘기다. 

<불편해도 괜찮아>는 지적과 공감을 넘나드는 완급조절을 통해 인권도서로서의 약점을 돌파하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불편하면서 동시에 재미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재미의 상당 부분은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 내용과 자신의 체험담을 버무려 써내는 김 교수의 솔직하고 쉬운 문장에 빚지고 있다.

청소년 인권부터 인종 학살까지 9개로 이어진 장은 지근거리에서 강연을 듣듯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때로는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비속어가 중요 개념으로 차용되기도 한다. 김 교수는 청소년 인권을 다룬 장에서 자신이 딸과 겪었던 생생한 갈등을 묘사하며 '지랄 총량의 법칙'을 소개한다.

"운동권 출신으로 한때 교사로 일했고 우리 딸 또래의 아들을 키우고 있던 유선생님은 저에게 혹시 '지랄 총량의 법칙'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당연히 처음 듣는 말이었습니다. 유선생님의 설명에 따르면, 지랄 총량의 법칙은 모든 인간에게는 일생 쓰고 죽어야 하는 '지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법칙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 정해진 양을 사춘기에 다 써버리고, 어떤 사람은 나중에 늦바람이 나서 그 양을 소비하기도 하는데, 어쨌거나 죽기 전까진 반드시 그 양을 다 쓰게 되어 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춘기 자녀가 이상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게 다 자기에게 주어진 '지랄'을 쓰는 것이겠거니,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진다고도 했습니다." 

이 책에 인용되는 드라마와 영화의 내용들은 친숙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그 자체로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독자들의 인권 감수성을 직관적으로 깨우치는데 유용한 예로 활용된다. 잘 만든 영화와 드라마는 경험이나 환경 등 물리적인 제약에서 벗어나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했던 삶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가정 폭력 가해자들이 피해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가정 폭력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영화를 통하면 보다 구체적인 공감이 가능하다. 김 교수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과 가부장제도, 인권과의 상관관계를 지적하며 영화 <똥파리>의 한 장면을 소개한다.

"어느 날 사채를 수금하러 다니다 채무자가 아내를 마구 패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상훈은 그 채무자를 더 심하게 때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아, 이 나라, 씨발, 애비들은 아주 좆같애. 이게 븅신들 같은데 지 가족들한테는 아주 김일성같이 굴라 그래."

김 교수는 "영화관에 앉으면 10분도 되지 않아 나와 전혀 다른 인생에 공감하며 눈물 흘리고, 주인공과 똑같은 공포를 느낄 수 있다"며 "차별받는 입장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에 영화와 드라마는 인권 감수성을 키우는 데 효과적"이라고 설명한다.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인권(人權).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포괄적인 권리를 의미하는 이 개념이 18세기에 유럽에서 처음 발명된 배경에는 서한체 소설의 폭발적인 성장이 있었다고 한다. <인권의 발명>을 지은 린 헌트는 이런 소설들이 유럽에서 인기리에 읽히면서 유럽인들이 자연스럽게 자기와 다른 처지에 있는 타인에 대해 공감하는 법을 터득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생각과 환경이 다른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사람들이 서로에게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발전되었을 때 비로소 인권이라는 개념이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얘기다. 

오늘날 한국 사회도 18세기 유럽처럼 처지가 다른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여성과 남성, 고용 노동자와 자본가, 장애인과 비 장애인, 비정규직과 정규직 등의 사회적인 계급들은 개인이 처한 환경이나 물적 토대에 따라 과거보다 빠르고 단호하게 나뉘고 있다. 하지만 인권의식이 잉태되던 18세기 유럽과는 달리 자기와 사회적인 계급이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는 능력은 심각하게 낮아지는 모양새다.

<불편해도 괜찮아>의 문제의식 역시 이 지점에 집중된다. 공감하는 능력 없이는 인권감수성이 자라기 어렵고, 그렇기 때문에 인권의 문제는 그 이전에 공감의 문제라는 것이다. 950원을 내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서민들과 버스비를 70원으로 알고 있는 정치인 사이에는 버스비의 변천사만큼이나 길고 좁히기 어려운 간격이 존재하며 그 간극은 서로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기 전에는 메워지기 어렵다.

"당신이 이 책에서 말하려는 인권은 도대체 뭐야?"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거야."

김 교수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아내와의 대화를 빌려 자신이 생각하는 인권이 무엇인지 간명하게 답했다. 김 교수의 이 대답은 인권의 정의에 대한 좋은 요약인 동시에 현재 한국 사회에 높은 수준의 인권 의식을 배양할 수 있게 만드는 적절한 행동지침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내용에 간단하면서도 명확한 대안. 이 책이 다소 불편하더라도 끝내 괜찮은 이유다.

<불편해도 괜찮아>의 저자 김두식 교수가 '커밍아웃 인생'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연다. 오마이뉴스와 CJ도너스캠프 공동 주최로 오는 30일 오후 7시 서울시 중구 필동 CJ인재원에서 개최된다. 관심있는 많은 분들의 참여를 부탁드린다.

☞ [클릭] 김두식 교수의 '커밍아웃 인생' 특강 신청하기



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창비(2010)


#김두식#불편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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