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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의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으로 1928년 북경에서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1912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으며,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역임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하고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올해는 국치(國恥) 100년으로 그의 불꽃같은 삶과 투쟁을 재조명하고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시대>를 싣는다.... 기자 말

제1회 지상 낙원에 도착한 사람들

 최초의 한인 이민들을 싣고 하와이에 도착한 갤릭호
 최초의 한인 이민들을 싣고 하와이에 도착한 갤릭호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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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낙원 하와이에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한인들이 건너온 지 얼마 안 된 20세기 초장부터였다. 우선 겨누어야 할 총의 가늠자는 나라를 강탈한 왜적 대신 때론 같은 동족의 가슴을 과녁으로 삼는 수도 있었다.

이 얘기의 주인공 박용만 역시 끝내 동족의 눈먼 총알에 쓰러졌다. 김구 역시 눈먼 총탄에 쓰러졌지만 그렇다고 그의 투쟁과 삶이 헛된 건 아니었다.

네브래스카 주의 대평원에서, 하와이의 사탕수수 농장에서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와 북경을 오가며 30여 년 동안 벌였던 박용만의 독립운동 역시 동족끼리의 투쟁을 비켜갈 수 없었다.

군복차림의 박용만 네브래스카 주 헤이스팅스 대학 소년병학교 교장 박용만. 1910년.
▲ 군복차림의 박용만 네브래스카 주 헤이스팅스 대학 소년병학교 교장 박용만. 1910년.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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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반대편 선상에 이승만이 있었다. 옥중에서 결의형제까지 한 두 사람이었다.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에 들어온 이승만은 외려 박용만과 대적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1910년 8월 29일.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에게 넘겨준다"는 경술국치(庚戌國恥), 한일병합조약이 공포됐다. 이에 대해 "이의 있소!" 팔을 치켜들고 나선 사람이 박용만이었다.

"이제 형질상의 '구한국'은 이미 망하였으나 정신상의 '신한국'은 바야흐로 시작되니 어찌 희망이 깊지 아니함이요?"라면서 "그것은 단지 이씨 조선의 통치권이 끝난 것 뿐이다"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1919년 3·1 독립선언보다 앞선 다부진 선언이었다.

1905년 미국으로 건너간 박용만은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에서 정치학과 군사학을 전공하고 1912년 졸업했다.

"이제 우리 조선민족으로 말하면 이미 국가를 성립하여 4천여 년을 지켜왔거니와 4천 년 후에 나라가 한 번 망하고 4천 년 후에 우리 백성이 비로소 바다 밖에 나온 것은 이는 하늘이 우리로 하여금 한 새 나라를 만들게 함이라."

이것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 주필도 했던 박용만의 논설이다. '영토'와 '주권'을 잃었으므로 '유형국가'는 소멸됐으나 '국민'이 단결하여 '무형국가' 곧 '망명정부'를 세우자는 게 그의 유명한 '무형국가론'이었다. 또 그의 전 생애를 통한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다.

그렇다고 오직 칼에만 의지하는 '무력투쟁론'이 아니었다. 이성의 눈으로 시대를 꿰뚫고 암담한 독립운동의 지평에 정치적 이정표를 세웠던 그는 '칼을 어루만지며 길게 노래하며' 생애 내내 광복의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승만의 '외교에 의한 독립론'과 평행선을 달려 두 사람의 대결은 하와이 동포들을 테러의 공포 속으로 밀어넣었다.

한 달에 16달러를 준다는 모집 광고는 가난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을 황금빛 환상으로 눈멀게 했다. 하와이에는 나무에 돈이 열린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빗자루로 땅을 쓸기만 하면 돈이 생긴다는 소문도 있었다.

1903년 1월 13일 갤릭호를 타고 태평양을 넘은 86명의 한인들이 하와이의 호놀룰루 항에 처음 상륙했다. 연이어 약 2년 반 동안 65차에 걸쳐 태평양을 넘은 배들은 7천여 명의 한인들을 실어 날랐다.

한인들의 동정이 이따금 현지 영자신문에 비치기 시작했다. 미담기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1916년까지 한인사회에 대한 기사가 435꼭지 실렸는데 그중 231꼭지가 범죄와 불법행위에 관한 것들이었다.

현지 신문 <퍼시픽 커머셜 애드버타이저(Pacific Commercial Advertiser)>의 1907년 9월 28일자 판에는 다음의 기사가 실린다.

"현재 푸에트리코 시민들은 자신들의 큰 특징을 잃고 있다. 그들의 특징은 도시 범죄자의 가장 큰 비율을 차지했던 인종이라는 특징이다. 이제는 한인들이 그 특징을 빼앗아 가도록 내버려두고 있다."

 개화기의 제물포항 풍경
 개화기의 제물포항 풍경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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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7명의 한인들이 여권과 돈을 훔친 동료 한인을 이틀 동안 '가혹한 고문'을 해서 죽게 했다는 기사가 영자신문에 등장한다. 그때 하와이에는 '부랑자법'이라는 게 있어 수상쩍은 거동을 한 한인을 경찰이 영장 없이 대낮에 체포하기도 했다.

당시 하와이 군도의 인구는 19만도 되지 않았다. 그 절반은 한국, 중국, 일본에서 왔다. 이들 동양인들과 백인의 결혼은 금지돼 있었다.

어찌된 셈인지 이민 초기의 한인들은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순박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한밤중에 남의 목장에 잠입하여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다가 포식한 사건을 일으켜 무더기로 포박돼 가야 했다. 고향에서 익힌 닭서리쯤으로 만용을 부려본 것이었을까.

덧붙이는 글 |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캐나다로 이민했으며 토론토에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한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 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카페(다음)의 모든 자료들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 그 속에 '우성 박용만 약전'이 포함돼 있음.
신한국보, 국민보, 신한민보, 공립신보, 단산시보 등 1백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박용만 평전#박용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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