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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스콧 니어링의 자서전에는 그의 스승이었던 사이먼 패튼의 선언이 소개되어 있다. 평생을 가르치는 자로 살아온 니어링은 이 선언을 가슴에 품었다고 고백했다. '교사는 사회 진보의 최일선에 서 있다.' 처음 그 문장을 발견했을 때, 머릿속으로 수많은 빛들이 쏟아지며 산란되는 것마냥 아찔했다. 딱 교사의 의식 수준만큼 사회가 변화된다고 믿었던 그 고백은 내 허튼 의식도 헤집어댔다. 기껏해야 내 수준에서 피상적으로 삶을 이해하고, 내가 이미 경험해온 편협한 시각으로 사회와 현상을 바라보는 야만성에 대한 경고 같기도 했다. 어떤 이유든 의식의 전환이 일어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관념성에 대한 천착일 텐데, 운 좋게도 교사에게는 관념성에만 치우지지 않도록, 그 틈을 파고들어 때마다 구체적 현실로 마주하게 되는 아이들이 있다.

며칠 전 학교로 청첩장이 왔다. '서로 모르고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많다는 사실에 행복합니다. 결혼으로 세상이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함께 살 오랜 친구를 만난 기분으로 지금처럼 서로 아껴주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살가운 청첩장의 주인공은 민조(가명)였다. 첫 발령지도 고등학교여서, 초창기에 만났던 아이들 중엔 사실 막내동생 뻘인 아이들도 있었다. 어려운 형편에도 늘 웃음을 잃지 않았던 민조가 학교를 졸업하고, 야간 대학을 다니면서 공부하고, 공연을 하고 싶다며 극단을 기웃거리더니, 드디어 평생의 짝을 만났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선생님을 앞지르고 먼저 주부가 되느냐고 했더니, 핸드폰 너머로 웃음이 그치질 않는다. 적은 월급을 쪼개 알뜰살뜰 집안을 일으키고,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꿈을 위해 시간까지 아껴 쓰며 달려온 이 예쁜 신부를 데려갈 행운의 사나이가 누구인지 청첩장을 몇 번이고 다시 펴봤다.

경진(가명)이는 군대에서 편지를 보낸 첫 제자였다. 군인 아저씨가 군인 동생에서 군인 제자로 바뀌는 순간은 그렇게 시작됐다. 거의 매 쉬는 시간마다 보건실에 와서 교복을 매만지고, 거울을 보면서 갖가지 표정을 연습했던 경진이는, 흠모하는 사서 선생님께 잘 보이려고 보건실을 단장의 전초 기지(?)로 활용하곤 했는데, 군대에 가니 철들었는지 나도 조금은 보고 싶어졌다며 편지를 보내왔다. GOP의 힘들고 어려운 군 생활은 결코 경진이의 것으로만 머무를 수 없었다. 군과 관련된 소식이 뉴스로 보도되면, 혹여라도 경진이가 있는 곳은 아닌지 몇 번이고 살펴보게 됐다.

명성(가명)이는 얼마 전 중국으로 자원 봉사를 다녀왔다고 소식을 전해왔다. 팀장으로서 한 일이 없어 팀원들에게 미안했다면서, 가서 보니 중국 내 조선족들이나 탈북 주민들의 문제를 그냥 스쳐 지나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속 깊은 소회도 덧붙였다.

희영(가명)이는 공익 근무를 만료하고 며칠 전까지 물류 센터에서 일했다면서 다시 대입 준비 중이라며 고민을 털어놨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마음이 아팠던 아이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아린 녀석인데, 쉴 새 없이 밀려드는 일들을 하고 온몸에 파스를 붙이고 하루하루를 버티면서, 공부가 더 쉬울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도 전한다. 세상이 만만치 않다고, 사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는 하는데 이제는 나보다 더 세상살이에 도가 트인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분이 '교사가 수업이나 잘 하면 되지, 사회 문제에 왜들 그리 관심이 많습니까? 안 그래요?' 묻기에, 잠잠히 웃고 말았었다. 뉴스에도 제대로 보도되지 않는 비정규직의 파업 현장에 우리 제자들이 있고, 어쩔 수 없이 상황에 몰려 신용 불량자가 되어 대출 한 번 제대로 못 받은 그들 속에 내가 만난 아이들이 있고, 돈이 없어 치료비 한 번 제대로 못 쓰고 죽어가는 안타까운 사연들 속에 우리 학생들이 있다고 생각하면, 니어링의 스승이 교사로 나서는 제자에게 들려줬던 이야기는 결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낼 수 없다.

좋다는 대학에 잘 진학해서, 조건 좋은 배우자를 만나고, 정규직으로 승승장구하면서, 돈 걱정 없이 넓은 집에서 몸과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아이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사회의 숱한 곳곳으로 혈맥처럼 뻗어 진출할 제자들의 삶과 현실에 관심 없는 교사가 어떻게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냐는 일침은 그러므로 더욱 따갑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스콧 니어링#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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