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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대정원에서 자전거를 탄 뒤 휴식중인 노무현 대통령(2007.9.13)
청와대 대정원에서 자전거를 탄 뒤 휴식중인 노무현 대통령(2007.9.13) ⓒ 고 노무현 대통령 국민장 장의위원회 제공

"건강이 좋지 않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서의 한 구절이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끝내 '읽고 쓰는 일'에 대한 미련만큼은 떨쳐버리지 못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여기 그 의문에 답해줄 책이 있다. 퇴임 뒤 고향으로 돌아간 그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1년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손에서 놓지 않았던 10권의 책과 못다 한 말들을 모아 엮은 책이다.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김병준·김창호 외 지음, 오마이북)가 그것이다.

책 소개에 앞서 오해부터 풀어야겠다. 어쩌면 이 책의 제목을 보며 쓴웃음을 흘렸을지 모를 당신을 위한 변명이다.

"100여 명으로 시작한 노무현과 함께 공부하기 모임이 이 책을 읽은 여러분을 통해 수만 명의 '깨어있는 시민'으로 확산되리라 기대해봅니다."(머리말 중)

머리말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노무현'이라는 깃발을 부여잡고자 기획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노무현을 떠나보내기 위한 책이다. 더 이상 '노무현'이라는 깃발만을 붙들고 있지 말고, 우리들 스스로 깃발이 되자는 작지만 의미있는 시도인 것이다.

단지 책 몇 권 소개하기 위한 목적은 더더욱 아니다. 장하준, 폴 크루그먼을 비롯한 저자들의 생각과 더불어 이 책을 읽은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을 소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주인공은 '10권의 책'이 아니라 '10권의 책에 남겨진 노무현의 생각'이라고 하는 편이 옳다. 책의 제목이 '노무현을 말하다'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노무현, 어머니와 같은 국가를 꿈꾸다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 겉그림.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 겉그림. ⓒ 오마이북
오해가 풀렸다면, 이제부터 책을 펼쳐 노 전 대통령의 생각을 읽어가 보기로 하자.

"시장의 엄청난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어서 때로는 밀리기도 하고 때로는 양보도 하고 그랬죠. 그러나 노 대통령은 기본적으로 시장이 갖는 결함, 그 문제점을 깊이 인식하고 계셨습니다. … 그래서 국가는 과연 어떠한 역할을 어느 정도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논제에 후반기로 갈수록 큰 관심을 보이셨습니다." -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 1장 <국가의 역할> 중)

적어도 그는 국가 권력의 수장으로서 시장에 대한 긴장감만은 놓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의 역할>(장하준 씀)이란 책을 펼쳐든 이유도 '시장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는 신앙과도 같은 신자유주의 패러다임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가운데 '국가'라는 마지막 울타리만큼은 지켜내려는 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노력은 성공했다고 보기 어렵다. '삼성공화국'이란 비아냥은 임기 내내 참여정부를 따라다녔고, 노 전 대통령 자신 역시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취임 2년을 갓 넘겼을 무렵의 일이었다. 후반기로 갈수록 국가의 역할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인 이유도 어쩌면 자신의 국가가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한 데 대한 초조함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한 '국가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을까.

"앞으로 정부와 국가는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하는 데 비중을 많이 둬야 한다. 산업정책도 필요하지만 어머니와 같은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

적극적 산업정책으로 시장을 이끌어가는 것이 '아버지'와 같은 역할이라면 그는 시장 실패를 바로잡고 시장으로부터 소외된 이들을 따듯하게 어루만져 일으켜 세우는 '어머니'의 역할에 더 관심을 두었다.

노무현, 시대의 벽 앞에 좌절하다

그러나 그의 바람과는 달리 참여정부 아래서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오히려 더 깊어져만 갔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는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이하 <미래를 말하다>)라는 책에서 그 원인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보수적 분위기가 압도적인 상황에서 이 같은 복지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 2장 <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미래를 말하다>란 책에 깊이 공감한 것으로 보아 그의 평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보수 패러다임으로 온 사회가 질식 상태에 놓인 이른바 '보수의 시대'를 뛰어넘지 않는 한 진보 정책들이 제자리를 잡거나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국민의 정부에 이어 참여정부에 이르는 10년의 세월은 외환위기 이후 시작된 '대한민국 구조조정' 시기이자, 세계적으로는 IT 혁명 이후 경제의 금융화와 세계화가 정점에 이르면서 이른바 '돈이 일하는 경제(money working economy)'에 대한 환상과 함께 '고용 없는 성장'이 굳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참여정부 막바지인 2006년 말에는 전 세계 금융자산의 규모가 GDP의 3배가 넘는 167조 달러에 이를 정도로 금융의 비중과 영향력은 막대해졌고, 그와 함께 사람들의 욕망도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빚과 투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결국 미국 발 세계 금융 위기라는 참혹한 결과를 맞긴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욕망의 정치를 편 이명박정부가 들어선 뒤의 일이다. 이렇듯 지난 10여년을 되돌아보면 시대의 벽을 넘지 못했다는 참여정부의 평가도 그저 변명으로 흘리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미래를 말하다>를 읽은 뒤 그는 보다 긴 호흡으로 새로운 '진보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굳혔다고 한다. 그가 꼭 쓰고 싶다던 '진보와 민주주의의 교과서' 역시 시대정신을 바꿔 '진보의 시대'를 열고자 했던 그의 간절한 바람이 담긴 책인 것이다.

'진보의 시대'를 열기 위해 그가 펼쳐든 또 한권의 책이 <슈퍼자본주의>(로버트 라이시)다. '보수의 시대'를 깊이 이해하지 않고서는 결코 이를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현실 앞에서 절망했을 그는 이 책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고통스런 과정은 아니었을까.

"보수의 경제적 이해가 국가 어젠다를 압도하는 왜곡된 우리 사회, 보수의 거센 반발 앞에서는 대통령마저도 어쩔 수 없었던 암울한 우리 현실… 노 대통령이 이 책을 읽고서 가졌을 복잡한 심사는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 이동걸 전 한국금융연구원장, 3장 <슈퍼자본주의>

노무현, 그가 꿈꾼 세상은 어떤 모습이었나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 발간 기념 특강이 열린 지난달 24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이 강의를 하고 있다.
<10권의 책으로 노무현을 말하다> 발간 기념 특강이 열린 지난달 24일 저녁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김창호 전 국정홍보처장이 강의를 하고 있다. ⓒ 권우성

그렇다면 그가 꿈꾼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는 이미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첫 대정부질문에서 자신이 꿈꾸는 세상에 대해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노동자와 농민이 다 함께 잘 살게 되고 임금의 격차가 줄어져서 굳이 일류대학을 나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고 높은 자리에 안 올라가도 사람 대접 받을 수 있는 세상"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20여년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가 변함없이 지녀온 이러한 꿈은 마침내 <더 플랜>(람 이매뉴얼, 브루스 리드)과 <유러피언 드림>(제레미 리프킨)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그는 두 책에 담긴 철학과 정책에 깊이 공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주공화국의 정신, 노 대통령이 이 책에서 읽은 정신은 모든 시민이 동등한 공동체의 일원이며, 돈이 많든 적든 그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는 겁니다." - 안병진 경희사이버대 미국학 교수, 제4장 <더 플랜>

"노 대통령은 <유러피언 드림>을 읽으면서 미국과 유럽, 그리고 한국의 각종 지표를 비교해 '감세, 작은 정부, 규제 완화를 주장하는 시장만능의 보수주의가 아니라,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국가가 충분한 역할을 하여 삶의 질이 높은 진보의 나라'를 만들어 가기를 희망했다." - 김성환 전 청와대 정책조정비서관, 6장 <유러피언 드림>

그가 남긴 유언은 '깨어있는 시민의 힘'

그를 떠나보내던 날 나는 처음으로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이던 그를 조금 더 믿고 기다려주지 못했던 아쉬움, 조금 더 힘이 돼주지 못했던 미안함이 뒤섞인 그런 눈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억을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돌아봐도 그의 국가는 어머니의 품처럼 따뜻하지 않았다. 보수의 시대를 힘겹게 가로질러야 하는 운명이었다해도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다. 그것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이는 노무현 자신이었을지 모른다. 그가 고향으로 돌아간 뒤 진보의 시대를 열기 위해 그토록 애썼던 이유다. 하지만 '대통령 노무현'의 꿈을 이루고자 했던 '시민 노무현'도 더 이상 우리 곁에 없다. 우리 앞에는 그를 추억하는 한 권의 책이 남아있을 뿐이다.

김병준 전 청와대 정책실장을 비롯해 서로 다른 10권의 책을 들고 등장한 이들이 한결같이 되뇐 말이 있다. 바로 '깨어있는 시민의 힘'이다. 어쩌면 그가 평생을 다해 이루고자 했던 꿈은 어머니와 같은 국가를 만드는 일도, 진보의 시대를 열어내는 일도 아닌 시민의 힘을 깨우는 일이었을지 모른다.

"결국 역사를 바꾸는 것이 국민이기 때문에 국민을 학습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노 대통령은 역사를 바꾸는 것은 인민이라는 번스의 주장을 철저히 믿고 실천했던 분이다." - 조기숙 전 청와대 홍보수석, 8장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

책을 덮는 순간 '깨어있는 시민의 힘'이라는 말이 마치 유언처럼 맴돌았다. 결국 이 책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은 깨어있는 시민인가'라고 말이다. 이제 당신이 답을 해야 할 차례다.


#노무현#10권의책으로노무현을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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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전북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 혁명>(2023),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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