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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정종연 정종연 시인이 마흔여덟에 첫 시집 <지갑 속의 달>(화남)을 펴냈다
시인 정종연정종연 시인이 마흔여덟에 첫 시집 <지갑 속의 달>(화남)을 펴냈다 ⓒ 이종찬

거친 지갑에 달덩이를 넣었다
동전 같은 달이 쏙 들어가고
온기 서린 주머니가 포근히 감쌌다
우울한 하늘빛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동그랗게 속이 꽉 찬
보기만 해도 눈동자가 커졌다
혼자만 보는 것이 아닐진대
하나뿐인 것을 다 가진 듯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두툼해진 달빛이 쏟아져 나오고
한때 그늘진 가장자리가 조금씩 줄어들었다
온종일 꿈쩍도 하지 않은
이날만큼은 허기진 바람이 그냥 지나갔다
반 뼘 남짓한 이마를 스치며
허수아비의 누런 들녘으로 총총히 사라졌다
나는 지갑 속의 달을 꺼내
별들에게 돌려보냈다
또 다른 달들이 술잔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 '지갑 속의 달' 모두

엊그제 오후 8시께 인사동 한 주점에서 황학주, 공광규, 김삼환 시인 등과 어울려 막걸리를 기울이고 있는 정종연 시인을 만났다. 좀 뜨끔했다. 왜? 지난번에 만났을 때 그가 시집을 주면서 "서평 좀 잘 부탁합니다"라고 했을 때 얼굴사진까지 찍었으나, 이런 저런 일 때문에 서평 기사를 쓰기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날, 정종연 시인은 글쓴이에게 막걸리를 따르며 다시 한번 "잘 부탁합니다"라는 짧은 말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그리고 그만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별말 없이 그저 눈가에 웃음을 띤 채 막걸리만 마셨다. 그렇다. 정종연은 이처럼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시인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쓴 시들도 그를 닮아 저만치 말없이 홀로 앉아 있다.  

정종연 시는 옷을 한 오라기도 걸치지 않은 알몸 그대로다. 그는 시에 화장을 할 줄도 모르고, 귀걸이를 걸거나 반지를 끼지도 않는다. 그가 쓴 시는 맑고 깨끗하다. 눈에 비치는 그대로다. 마치 동시를 읽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왜 그럴까. 그는 올곧은 삶을 살고 있고, 그 삶을 이끄는 마음이 올곧기 때문이다.       

모범 월급쟁이가 알몸 그대로 부딪친 시

정종연 첫 시집 <지갑 속의 달> 이 시집은 직장이란 틀에 박힌 모범 월급쟁이가, 자신이 두텁게 입고 있는 옷가지를 벗어던진 채 알몸 그대로 부딪친 시들이 어린아이들 까만 눈동자로 구르고 있다
정종연 첫 시집 <지갑 속의 달>이 시집은 직장이란 틀에 박힌 모범 월급쟁이가, 자신이 두텁게 입고 있는 옷가지를 벗어던진 채 알몸 그대로 부딪친 시들이 어린아이들 까만 눈동자로 구르고 있다 ⓒ 이종찬
"십대 시절에 시 쓰기에만 매달린다고 끊임없는 긴장과 채찍의 씨를 뿌리시던 선친(정병석). 고 3때 시화전에서 우수상에 입상하자 축하와 더불어 당신도 초등 3학년 때 상을 타셨다며 그때 쓴 '늦가을' 시를 흔쾌히 적어주시고, 그 씨앗을 거두시던 모습이 이 순간 너무 그립다." - '시인의 말' 몇 토막

작가 박완서 선생이 "꽤 오랫동안 알고 지내면서도 한 번도 시인답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출판인" 정종연 시인이 마흔여덟에 첫 시집 <지갑 속의 달>(화남)을 펴냈다. 이 시집은 직장이란 틀에 박힌 모범 월급쟁이가, 자신이 두텁게 입고 있는 옷가지를 벗어던진 채 알몸 그대로 부딪친 시들이 어린아이들 까만 눈동자로 구르고 있다.

모두 5부에 실려 있는 '그 도시의 아침', '골목길을 돌며', '연탄불 사랑', '내가 널 지켜줄게', '섬과 바다', '기다린다는 것은', '흐린 겨울날의 오후', '수국꽃이 피어', '산이 왜 거기 있느냐고', '겨울비 내리는 오후', '끝나지 않은 오월', '무등산에 올라', '막춤 속의 나', '갈망' 등 75편이 그것.

정종연 시인은 "작은 꿈을 꾸었다"며 "어릴 적부터 늘 꿈꾸어왔던 시인"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가 쓴 시에 대해 "침묵으로 인내하며 살아왔던 자유의 갈망이 소중한 사람들의 사랑으로 풍성한 밭을 일구었던가"라며, 그를 시인으로 이끈 아버지에게 "이제 그 분은 그 시와 함께 마음속에서만 살아계신다"고 되짚었다.   

'모범 월급쟁이' 시인 속내는 '하숙생'

아내는 죄를 짓지 않았다
그런데 평생 몇 평짜리 공간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곳은 감옥이었다
아니, 그보다 더한 새장 속에 갇혀진
늘 혼자 있어야 하는 수형생활
힘겨운 날에도 밝은 웃음을
바라는 것 아무것도 없이
가슴속 깊은 품안에 안은
모든 이가 위안을 얻는 사랑
죄라면 나에게 온 그것이 죄일까? - 46쪽, '하숙생' 몇 토막

시인 정종연은 마흔여덟 해를 살아오면서 늘상 빠듯한 삶을 이어왔나 보다. 말이 '모범 월급쟁이'라고 하지만 그 월급봉투가 너무나 얇아 가족들 식의주를 이어가기에도 힘겹다. 까닭에 늘 닭장 같은 조그만 방에서 살 수밖에 없다. 그 감옥 같은, 새장 같은 방에서 살면서도 늘 밝은 웃음을 잃지 않는 아내가 눈물겹도록 고맙다.

"죄를 짓지 않았"지만 감옥소 수형생활을 하는 것처럼 살아가는 아내... "삼남매에 만날 늦게 방문을 두드리는 / 하숙생까지 감당한" 아내... 그래서일까. 늘상 웃음을 잃지 않고 살고 있는 아내, 그 "미소 띤 달덩이"에도 그늘이 짙게 드리우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시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거칠어진 두 손을 잡아 주어야 하는 줄 알면서도 / 둘만의 둥지 안에서 / 바보처럼 바라만 보"고 있다. 시인은 남들이 보면 아주 반듯한 "모범 월급쟁이"처럼 여겨지지만 얇은 월급봉투를 어쩌지 못한다. "그놈(시인 자신)"은 매달 "하숙비" 같은 월급봉투를 내밀며 "혼자서 고마워, 말만 되뇌고 있다".

세상은 힘겹지만 꼭 살아가야 하는 가족 같은 곳

실오라기 하나 걸친 것 없이
꽁꽁 언 겨울 강을
넌 참 잘도 건넜구나 - 103쪽, '나목' 몇 토막

이른 봄, 시인은 아직은 살얼음이 얼어붙고 있는 어느 강가에 서서 "실오라기 하나 걸친 것 없이" 겨울을 잘 이겨낸 헐벗은 나무 한 그루를 오래 바라본다. 그 나무는 "푸른 옷을 입고 / 겨울 산에서 독야청청하는 / 두꺼운 속옷까지 동여맨 소나무"가 곁에 빼곡이 서 있지만 결코 시샘을 하거나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 나무는 지난 겨울 내내 "때로는 하얀 눈을 덮"어 쓰기도 하고, "겨울비에 혼나도" 맨살로 버텨왔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는 봄"을 애타게 기다리며. 여기서 헐벗은 겨울나무 한 그루는 시인 자신이다. 땡겨울에도 독야청청하는 소나무는 시인 주변에서 아무리 불황이 닥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떵떵거리며 사는 부자들이다.   

헐벗은 겨울나무를 덮는 하얀 눈과 겨울비는 이 세상살이가 시인에게 던져주는 큰 아픔이자 깊은 상처이다. 시인은 헐벗은 겨울나무 한 그루가 모진 찬바람을 이겨내고 마침내 봄을 맞이하듯이 시인 삶에도 그렇게 봄을 맞이하고 싶다. 하지만 시인에게 봄은 좀처럼 다가오지 않는다. 차라리 저 겨울나무라도 되었다면 봄이라도 맞이할 텐데... 아쉽다.

정종연 시인에게 있어 이 세상은 힘겹지만 꼭 살아가야 하는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이 시집 곳곳에 있는 '거친 지갑'(지갑 속의 달), '꺼질 수 없는 꿈'(연탄불 사랑), '희망이란 이름의 되새김'(그 눈동자), '어디든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노숙자), '가슴앓이 속에서 스스로 시야를 연다'(기다린다는 것은) 등에서도 잘 드러난다.        

맑고 소박한 시인이 쓰는 삶에 대한 뜨거운 사랑   

시인 정종연 인사동 한 주점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시인 정종연
시인 정종연인사동 한 주점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시인 정종연 ⓒ 이종찬

"내 시는 아직은 덜 익은 풋과일이 익어가는 것처럼 미완성된 시 같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다. 하지만 한 편의 시가 깨알 만한 과실이 점점 굵고 튼실하게 여물어가듯 작은 사랑을 실천하고픈 마음을 담은 것이라면 나에게 시는 그 의미가 있을 거라는 소망을 해 본다." - 정종연

작가 박완서는 "나는 그의 사생활은 전혀 모르지만 직업인으로서는 틀에 박힌 답답한 모범생으로밖에 안보여 내가 갖고 있는 시인의 이미지와는 전혀 맞지 않았던 것"이라며 "그가 평범하고 착실한 월급쟁이로 이 풍진 세상을 헤쳐 나가면서 한 가정을 유지하려면 그 여린 마음이 기댈 곳이 있어야 했으리라, 그게 시의 힘이었다면 그의 시를 어찌 아름답다고 안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는 "정종연 시인은 이 시집에서 요즘과 같은 각박한 세상에서 만나보기 힘들 정도로 맑고 소박한 마음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며 "맑고 소박하다는 것, 그렇게 꾸밈이 없으면서도 삶에 대한 사랑의 뜨거움은 그의 시집 면면이 선사하는 첫 인상"이라고 평했다.

시인 정종연 첫 시집 <지갑 속의 달>은 마흔여덟 해를 꾸밈없이 사는 동안 이 세상에서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를 솔직하게 풀어쓴 자기 고백이다. 그래서일까. 그가 쓴 시를 읽다보면 시인이 훌훌 벗겨버린 옷가지 위에 모두 드러난 이 세상 알몸을 은근슬쩍 훔쳐보는 듯 부끄러움이 밀려든다. 이 시집에 실린 모든 시들이 화장기 하나 없는 맨얼굴이라는 그 말이다.  

시인 정종연은 1963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나 2007년 계간 <만다라문학> 신인상과 2009년 <한국평화문학> 5집에 '홍매화' '매화꽃 피는' '보리밭' 등 시 3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공동시집으로 <멀리 사라지는 등이 보인다>(한국·버마 합동시집), <고마워요 미안해요 일어나요>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시집) 등이 있다. '늘푸른소나무' 동인.


지갑 속의 달

정종연 지음, 화남출판사(2010)


#지갑 속의 달#정종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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