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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BS

<추노>는 감히 <모래시계> 이후 최고의 드라마라고 생각해본다. 나는 이 드라마를 '민중사를 넘어선 민중사'라고 부른다. <추노>는 스스로 세 가지 질문을 던지며 또 답하고 있다.

첫째, 노비는 인간인가. <추노>는 역사적 관심에서 왕따 당해온 노비의 세계에 시선을 돌린다. 궁궐과 왕의 이야기, 권력자의 정치게임으로부터 이 땅 다수 민초의 세계로 눈을 돌린 것이다. 그것으로도 훌륭하지만 <추노>가 더 뛰어난 이유는 노비에 대해 묻고 또 물어 노비를 전형적 집단이 아닌 주체적 개인으로 발견해냈기 대문이다.

양반 중심의 사극에서 노비는 그저 무지랭이 종복이었고 민중사적 관점을 가진 극 속에서도 사회경제적 집단 내지는 민란의 '떼거지' 군중이었다. 그러나 <추노>는 노비에 대한 기존의 상을 깨고 노비를 생각하고 갈등하고 사랑하는 복잡다단한 개인이자 관계로 바라본다. 

극 초반에 다소 이야기를 산만하게 만들었던 다양한 캐릭터들은 다 이유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노비였던 초복이, 노비가 아니었다가 노비로 떨어진 업복이나 송태하, 노비였다가 그 신분을 탈출한 언년이, 노비보다 나을 것 없는 주제에 악착같이 노비를 쫓는 대길과 천지호 패거리, 노비를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반짝이 부모, 노비를 거부하고 해방을 꿈꾸는 개놈이와 노비당. 이런 다양한 시선을 통해 노비는 실체를 가진 인간이 되었다. 극적 긴장감도 높아졌다. 

둘째로, 쫓는 자와 쫓기는 자는 어떻게 만나는가. 추노꾼과 도망노비의 갈등은 <추노>의 1차적 재미다. 대길과 송태하는 서로 죽자고 싸운다. 궁중의 암투가 아니라 복근을 꿈틀거리며 붙는 살전이라 보기에도 흥미진진하다. 그런데 그들의 싸움엔 아무런 정치적 이유도 뿌리 깊은 원한도 없다. 사회의 악폐가 낳은 대리전일 뿐이다. 대길은 양반이었지만 저자의 싸움꾼으로 몰락했고 태하는 무사였지만 지금은 도망노비다. 그들은 닮았으면서도 싸워야 한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으므로.

이런 싸움은 역사 속에 비극적으로 반복됐다. 동학 농민군은 역시 농민의 자식인 관군과 싸워야했고, 지리산 빨치산은 역시 가난한 집안의 아들인 토벌대랑 죽고 죽여야 했다. 오늘날은 다른가. 대길은 용역깡패고 노비는 철거민이다.  원인 제공자는 따로 있는데 화염병과 쇠파이프로 치고 박는 건 못 먹고 못 사는 두 집단이다.

그런데 대길과 송태하는 자기들끼리의 싸움을 멈춘다. 그리고 같이 뛰기 시작한다. 공동의 적과 싸우기 위해서. 그때부터는, 조용히 숨어만 있던 권력이 다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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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둘이 달리고 있는 걸 아나.
예전에도 같이 달렸다
나란히 뛴 건 아니지 않나.
어쨌든 발품 파는 인생은 말이야, 아주 지랄 같은 거거든.

난 이 장면이 참 마음에 든다. 닮은 것들끼리 아등바등하다가, 한 팀을 이루고 적을 향해 뛴다.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 역사도 이렇게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셋째, 그들은 어떤 세상을 꿈꿨는가. <추노>에는 '세상을 바꾼다'는 대사가 많이 나온다. 하지만 각각 생각하는 '바뀐 세상'은 다르다. 송태하나 조 선비는 정치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도 송태하는 주군과의 신의에 바탕한 보다 이상적 질서를 꿈꿨다면 조 선비가 원하는 건 자기를 중심에 둔 권력 교체일 뿐이다. 송태하도 노비나 여성에 대한 유교적 편견을 갖고 있었으나 언년과의 관계 속에서 이 시각을 고쳐 나간다. 하지만 조 선비에게 그런 문제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반면 언년이나 업복에게 세상을 바꾸는 것은 자신의 실존과 직결된 문제다. 주군을 위해 노비보다 더 비참한 것도 감수하겠다는 태하에게 언년은 말한다. "노비보다 더 비참한 것은 세상에 없답니다." 업복에게도 현실은 자기들을 소나 말처럼 팔아버릴 수 있는 세상이다. "양반을 싹 다 쥑이고, 임금도 쥑여야" 생존과 존엄성을 보장받을 수 있는 세상이 오는 것이다.

한편 대길에게 세상을 바꾸는 의미는 좀 달랐다. 그는 양반 도령 시절에 언년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양반 상놈 없는 세상을 만들 거다. 그래서 너랑 살 거다." 그런데 언년이가 도망가자 대길은 악귀처럼 변해 노비를 쫓는다. 그의 변혁관이 사실은 개인적 경험 차원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런 대길이 마지막에는 황철웅에 맞서 싸우며 언년과 태하를 보내면서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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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년아...잘 살아라... 살아서 좋은 세상 만들어야지...다시는 우리 같은 사람들 없도록..."

이 순간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은 한층 높은 인간애로 성숙한다. 이것은 가장 높은 수준의 변혁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 같은 불행한 연인이 없는, 누구나 행복할 수 있는 세상. 업복이와 태하가 꿈꾼 세상도 이 결론으로 모인다. 업복은 초복이 없이 살 수 없어 개죽음은 안하겠다고 중얼거린다. 그러면서 말한다. "우리 같은 노비가 있었다고 세상에 알리고 죽을게. 그러면 개죽음은 아니라니." 태하도 피 흘리면서 말한다. "언년이 혜원이 두 이름으로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 만들어야지요."

이들은 누군가를 몹시 사랑했고, 그로 인해 세상을 바꿔야 한다는 구체적 결론에 이른다. 변혁은 결국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하고, 행동은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길 원할 때 시작된다. 사상이나 이론이 있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의 혁명이 실패하면 그 이론도 버려지지만, 사랑은 남아 다음 사람에게로 이어진다. 하기에 마음껏 사랑할 수 없는 세상, 사랑하는 사람이 불행해지는 것을 보아야 하는 세상에서는 밟아도 밟아도 새로운 변혁의 움이 싹튼다. 이론이며 사상은 이를 설명해줄 뿐이다.

<추노>는 주인공들의 죽음으로 비장한 결말을 맺는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눈덩이처럼 구르면서 커져갈 사랑과 희망 이야기의 시작일 뿐이다. 혁명가 김산은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이름없이 죽어간 수백만의 피와 뼈 하나하나를 빠뜨리지 않고 자신의 저울 위에 올려놓는다고. 마지막 장면에 초복과 은실의 대화는, 그래서 마음을 찡하게 한다.

너 저 해가 누구건지 아니?
누구 건데요?
우리 거...
왜요?
우린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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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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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기본소득당 공동대표. 기본소득정책연구소장. <기본소득이 세상을 바꾼다><기본소득 쫌 아는 10대> <세월호를 기록하다> 등을 썼다. 20대 대선 기본소득당 후보로 출마했다. 국회 비서관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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