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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의 오스카급 전략 핵잠수함인 K-141 쿠르스크와 동급인 K-186 옴스크
 러시아의 오스카급 전략 핵잠수함인 K-141 쿠르스크와 동급인 K-186 옴스크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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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10년 전이다. 그건 내가 <오마이뉴스>에 쓴 두 번째 글이었고 톱에 올라서 오다 가다 읽혔던 첫 번째(관련기사 : 차가운 바다에서 숨져간 러시아의 젊은이들에게) 글이기도 했다.

2000년 8월 12일, 러시아 병사 118명이 탄 핵 잠수함이 훈련 중 침몰했다. 이 소식은 서방 언론에 의해 먼저 알려졌고 러시아 국민들은 사건 보도 후 이틀이 지나서야 정부로부터 사실이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늦은 건 정부 발표만이 아니었다. 취임 100일 전야를 맞은 푸틴의 새 정부는 악천후 등을 이유로 차일피일 구조를 서둘지 않았고 영국과 노르웨이의 해저 장비 지원도 거부했다. 핵 잠수함의 기밀 유출을 우려한 러시아 정부는 결국 자국의 인양 작업이 연거푸 실패를 거듭하자 노르웨이의 지원을 받아들여 잠수함을 인양했다. 

사흘 만에 시작된 구조가 인양까진 꼭 열흘이 걸렸다. 사고 원인도 계속 달라졌다. 처음엔 주변을 정찰하던 서방 잠수함과의 충돌이라고 했다가 같은 러시아 핵순양함의 어뢰에 맞아 침몰했다는 발표를 했다. 그건 사고가 발생한 지 한달만이었다. 

항의하는 유족에게 강제로 진정제를 맞춰서 끌어 내고 서방 언론에 실종 병사의 명단을 팔려한 러시아 해군 관계자가 적발되기도 했다. 당시 그들이 압도적인 표차로 뽑아준 새 대통령은 동계올림픽이 열릴 소치라는 곳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10년 전 러시아 침몰 사고와 꼭 닮은 천안함 침몰

 해군 초계함 '천안함' 침몰 나흘째인 29일 오후 경기도 평택 해군 제2함대에서 실종자 가족들이 조속한 구조작업을 요구하며 해군 관계자를 붙잡고 항의를 하고 있다.
 해군 초계함 '천안함' 침몰 나흘째인 29일 오후 경기도 평택 해군 제2함대에서 실종자 가족들이 조속한 구조작업을 요구하며 해군 관계자를 붙잡고 항의를 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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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난 그들이 안타까웠다. 북극의 그 차가운 바닷속에서 기약 없이 죽어갔던 118명의 러시아 젊은이들을 난 진심으로 추모했다. 그들이 지키려던 조국 러시아, 그들이 몸 담았던 군대가 저런 더럽고 흉한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해저·하늘 그 어딘가에서 몹시 슬퍼하고 있을 그들을 위로하고 싶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로서 말이다. 더불어 대선과 최악의 잠수함 사고 등의 위기를 체첸 사태같은 더 큰 위기로 넘기고 있는 계략과 기교의 푸틴이 앞으로 러시아란 나라를 어떻게 끌고 갈지 '주제넘게' 걱정하기도 했다.  

4월 1일로 꼭 이레째다. 초계함 천안함이 백령도 인근 해상에서 원인 불명의 사고로 두 동강이 나 가라앉은 게. 이제 더 이상 방송에도 나오지 않는 46명의 이병, 일병, 상병, 병장…. 이 명단 속 사람들은 여전히 실종자다. 함장은 나왔고 그들은 아직 잠겨있다.

살아온 이들은 입단속을 당하고 실종자 가족들은 정부와 군 당국과 날씨와의 싸움에 지쳐가고 있다. 정부의 늑장 대처, 어디 하나 똑 부러지는 곳 없는 사건 정황 속에서 어떡하든 북한과의 연관성을 찾아내려 눈을 부릅뜬 이들의 의지만이 자못 결연해 보일 뿐이다.

10년 전 나는 쿠르스크호의 침몰에 대처하는 러시아 정부의 태도에 분노하고 후진성을 비웃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우리를 보고 손가락질하고 있을 것 같다. 아이들 장난하냐고. 눈 가리고 아웅하냐고. 거긴 차가운 북극해 부근이었고 깊이도 100m가 넘었다고. 그건 천안함과는 비교가 안되는 154m짜리 거대한 잠수기였다고. 억울하지만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누구네 국가가 누구네 군대가 더 후진적인지 이젠 우리도 남 말 할 처지가 아니다.

지금 실종자들은 애타게 구조를 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2000년 당시, 열흘 만에 인양된 핵 잠수함에선 한 대위가 작성한 메모가 발견됐다.

'15:45분, 너무 어두워 글을 쓸 수 없지만… 손의 느낌으로 써나갈 것이다.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10~20%정도, 최소한 누군가가 이 글을 읽게 되기를 희망한다. 9번 격실에 모여 살아서 나가고자 하는 승무원들의 명단을 여기 적어둔다. 모든 이들이여 안녕… 결코 절망하지 마라.'

러시아 정부가 실종자들이 이미 사망했을 거라고 했던 그 시각, 그들은 108m 해저에서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정부가 악천후 핑계를 대던 그 시각이었다. 그 정부는 결국 메모에 적힌 '9번 격실에 모여 구조를 기다리고 있던 승무원들의 명단'을 밝히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각, 백령도 어느 해저 9번 격실 어둠속에서 '절망하지 말라'고 쓰고 있을 누군가가 아직 있을 것 같다.


#쿠르스크호#러시아#천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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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부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뉴욕 거주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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