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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으로 가서 모를 심는데 잘 안 된다. (농사짓는)할머니는 내가 제일 눈에 안 차는지 계속 내 옆으로 와서 (모 심는 법을)가르쳐 주신다. 처음 하는 일이니 잘 할 리가 없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한다 한들, 그 곳 농부들의 눈에 차지 않을 것이다. 우스갯소리인지 진짜인지 우리가 가고 나면 그 모들을 다시 뽑아 심는단다. 그래. 모를 심어 도와드린다는 것은 그저 상징적인 의미일 뿐, 정말로는 이렇게 사람들이 와서 관심을 보여준다는 것이 그들이 원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 필리핀 라살대학 개발학과 이소영 참가자의 에세이 중

 나카가단 계단식 논을 가로질러 이동 중인 공정여행 참가자들.
 나카가단 계단식 논을 가로질러 이동 중인 공정여행 참가자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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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나도 관광업에 치중하면 우리의 터전마저 잃게 된다"

열 두 시간 여를 달려온 14명의 참가자들만 힘든 건 아니었다. 이른 새벽부터 '공정여행'이란 거창한 이름을 걸고 오는 이들이 언제올까 목빠지게 기달리던 NGO '이푸가오 계단식 논 지키기 운동' 사람들 역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해발 2천여 미터를 들락날락하는 이푸가오 지역에 위치한 제법 큰 도시 키안간에서 젊은 운영위원장 '말론' 씨를 비롯한 자원봉사자들은 두 손 벌려 우리를 환영했다.

'이푸가오 계단식 논 지키기 운동' 사무실은 필리핀의 수도 메트로 마닐라에서조차 찾아가기 힘든 곳에 위치하고 있었지만, 국제 교류와 활동력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였다. 국제연합개발계획(UNDP), 유네스코 일본위원회·필리핀위원회·한국위원회, 미국 몇몇 대학 등 수많은 단체들은 이푸가오 계단식 논 지키기 운동과 함께 '계단식 논'으로 일컬어지는 이푸가오 지역의 보존과 대체에너지 개발을 위한 여러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했거나, 진행 중에 있었다.

"지방 정부도 우리의 회원 중 하나입니다. 계단식 논과 관련된 사항은 대부분 우리와 논의하곤 하죠."

말론 씨는 전통복장을 입은 채 홍보 현수막에 얼굴을 내밀고 있는 지방 정부 관료들의 모습을 가리키며 위와 같이 설명했다.

 이푸가오 지역 관련 교육 영상을 시청 중인 공정여행 참가자들.
 이푸가오 지역 관련 교육 영상을 시청 중인 공정여행 참가자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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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런 점들을 다 차지하고라도 이푸가오 계단식 논 지키기 운동이 진심으로 부러웠던 것은 조직을 운영하는 이들이 대부분 30대 전후의 젊은이들이라는 점이었다. 젊은이들은 지역적 한계를 인터넷으로 극복하려 노력하고, 경험적 미숙은 마을의 원로들에게 항상 물음을 구하곤 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나카가단 계단식 논의 바이니난 마을은 급속한 관광화와 이촌향도 현상 등으로 한 때 공동체 및 유산 파괴가 급속하게 벌어졌다. 이 때 마을 주민들은 끊임없이 마을을 드나들며, '계단식 논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는 이푸가오 계단식 논 지키기 운동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고 한다. 하는 일이 미숙할지언정, 그 지치지 않는 열정에 반해버리고 만 것이다.

"관광은 우리 생활에 도움이 될 수는 있을지언정, 우리 생활의 중심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계단식 논은 수 천년 간, 사람의 손으로만 만들어지고 보존된 문화유산입니다. 잠시라도 그것을 소홀히 했을 때엔 돌이킬 수 없는 파괴로 이어집니다. 관광은 어디까지나 이 계단식 논이 있을 때만 가능한 사업입니다. 누구도 계단식 논을 돌보지 않으면 관광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지요."

사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진 곳은 비단 이푸가오 지역만은 아니다. 필리핀 수빅만의 박쥐로 유명했던 '뱃킹덤' 지역의 경우, 몰려드는 관광객과 난개발 등으로 수많은 소음을 발생시켰고 결국 박쥐가 이 지역을 떠나는 일이 벌어졌다. 박쥐가 떠난 자리엔, 모든 것이 파괴되고 말았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사람들은 박쥐만 쳐다보고 살았던 탓이다. 뱃킹덤을 비롯한 비슷한 사례들은 급속한 관광화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필리핀에 중요한 시사점이 되고 있다.

"결국, 너도나도 관광이 좋다며 서비스업에 치중하다간 우리 삶의 터전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말거니까요."

이푸가오 계단식 논 지키기 운동과 농민들은 이렇게 급속한 관광화와 이촌향도, 그리고 그들의 터전을 지키는 사이에서 끊임 없는 고민을 이어가고 있었다.

 필리핀 세계문화유산, 나카가단 계단식 논에 이푸가오 농민들과 모내기를 하고 있는 공정여행 참가자들의 모습.
 필리핀 세계문화유산, 나카가단 계단식 논에 이푸가오 농민들과 모내기를 하고 있는 공정여행 참가자들의 모습.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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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도 관광지 파괴를 고민해야

몇 년 전, 말론 씨는 이푸가오 계단식 논 지키기 운동에 '생태관광' 개념을 도입하게 된다. 보통의 여행이 여행자의 편의에 맞추어 모든 것을 준비하기에 현지인이나 현지 상황을 배려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에 비해 생태관광은 환경을 생각하며 조금 더 걷고, 현지인들의 생활방식이나 문화 등을 체험하면서, 현지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결국 파괴되는 계단식 논을 지키기 위한 모내기나 돌벽 보수 등에 여행자들이 참여하고, 홈스테이나 전통 축제 등에 참가함으로써 이푸가오 계단식 논 지키기 운동은 비교적 성공적으로 생태관광을 진행하게 됐다.

 바이니난 마을 대표 '라문' 씨(맨 오른쪽). 그들은 조상들이 수 천년 간 지어온 계단식 논 농사를 이어가길 바라면서, 관광은 그저 생활에 조그마한 보탬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바이니난 마을 대표 '라문' 씨(맨 오른쪽). 그들은 조상들이 수 천년 간 지어온 계단식 논 농사를 이어가길 바라면서, 관광은 그저 생활에 조그마한 보탬이 되길 바랄 뿐이었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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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친환경 홈스테이 마을을 조성 중에 있는 바이니난 마을의 대표 '라문' 씨는 "한 때, 여행자들이 마을에 올 때마다 논둑을 밟아 무너뜨리고, 우리를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해서 기분이 좋지 않은 적이 많았다"며 "하지만 생태관광 도입으로 우리도 여행자와 함께 여행을 공유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했다.

결국, 이런 고민을 이어가고 있던 이푸가오 계단식 논 지키기 운동과 우리의 공정여행은 손쉽게 의기투합 할 수 있었다.

 '이푸가오 계단식 논 지키기 운동'과 공정여행 참가자들.
 '이푸가오 계단식 논 지키기 운동'과 공정여행 참가자들.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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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용들을 참가자들이 고민한 뒤, 계단식 논의 절경에 감탄하고 절구질과 모내기 등을 이푸가오 농민들과 함께 진행했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하늘에 떠 있는 별을 세던 밤, 이푸가오 계단식 논 지키기 운동의 젊은 봉사자 '조나단' 씨는 내게 말을 건넸다.

"좋은 경치를 보고, 좋은 경험을 한 만큼 이 곳에 대해 공부하고, 유산 보호를 위해 모내기도 했으니까 제 값은 한 거네요. 이게 공정여행 인가요?"

이것에 대한 대답은 바이니난 마을의 할머니가 건넨 말로 대신하려 한다.

"젊은 사람들이 여기까지와서 자기들 놀기도 바쁜데 훌륭한 생각들 하네. 딱 아는 만큼 하면 되는거지. 여기서 보고 듣고 느낀 것만 글로 잘 정리해서, 한국에 돌아가거든 많은 사람들한테 알려줘. 그러면 원더풀한 공정여행일거야."

 피나투보의 모습.
 피나투보의 모습.
ⓒ 고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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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여행의 간단한 실천 방법 하나!
필리핀의 피나투보, 1991년 화산이 폭발했던 이 곳은 현재 생명체들이 다시 살아나고, 화산재가 뒤덮은 하얀 대지와 에매랄드 빛 칼데라 호로 여행자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다.

한국인들이 많이 찾아오기에 삼계탕과 김치가 근처 식당에서 팔린다. 인근의 원주민 아예따족은 화산폭발 직후 다른 지역으로 강제 이주 되었다가 다시 자신의 터전을 찾아 돌아오고 있으나 먹고 살길이 막막한 상태. '까모떼'라 불리는 고구마와 비슷한 작물을 재배하여 먹고 더러는 팔기도 하며, 움막 비슷한 곳에 살아가고 있다.

넓디넓은 피나투보는 대부분 여행자들을 위해 할애된 공간인 탓에 이들에게 넉넉한 공간을 배려해주긴 어려운 상태. 매일 먹는 한국 음식을 이곳까지 찾아가 먹기보다 현지인들이 즐겨먹는 음식을 한끼만 먹는다면 색다른 체험도 할 수 있고, 현지 작물을 구입하니 지역 경제에 보탬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관광자원을 내 후대에게 보여주기 위해 실천해야 할 일은 이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SBS 유포터와 개인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공정여행#필리핀#대학생#아시안브릿지 필리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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