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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로 건너간 티코 한글이 쓰여진, 문짝 색깔도 다른 각양각색의 티코들은 페루에서 택시로 사용된다.
▲ 남미로 건너간 티코 한글이 쓰여진, 문짝 색깔도 다른 각양각색의 티코들은 페루에서 택시로 사용된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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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를 두 부류로 나누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인도를 여행할 수 있는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 자기 키만한 배낭을 들고 다닐 수 있는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 30개 침대가 깔려 있는 싸구려 도미토리를 이용할 수 있는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 그리고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능통하게 사용하는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

나는 앞에 열거한 부류 중에서 대부분 전자 쪽이지만, 딱 하나 그렇지 못한 부류에 속하는 게 하나 있다. 바로 '영어'. 이제껏 중학교 수준의 영어로 세상을 누비고 다녔다.(이렇게 이야기하면 요즘 중학생들이 얼마나 영어를 잘하는데, 그런다. 1980년생 기준이다. 그때는 중학교 가서야 알파벳을 외웠다.)

언제나 차가운 이성보다 뜨거운 가슴이 앞서고, 논리정연한 말보다 무턱 댄 행동이 앞서는 나로서는 인내심이 필요한 영어공부에 매번 실패하고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중학교 때 배웠던 영어단어와 저질 문법으로 3개월을 버텼다. 

#. 눈빛만으로도 우린 통하잖아!

몇 년 전 남아메리카를 여행하게 되었을 땐, 그 나라 국민들도 대부분이 영어를 못하고 스페인어만 사용할 줄 안다기에, 혹시나 굶어죽을까 봐 떠나기 전 음식이름만 스페인어로 달달 외워 지구 반대편으로 향했던 나로선 사실 속으로 쾌재를 부를 일이었다.

그렇게 떠난 남미 여행의 초반은 정말 힘들었다. 간단한 인사 정도도 영어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스페인어만을 사용하는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 친화력은 어찌나 좋은지 내가 알아듣든 말든 구름떼처럼 몰려와 2시간씩 스페인어로 이야기를 하곤 했다. 멀기만 한 이곳 땅에(특히 관광지가 아닌 일반 마을에서) '동양인 여자 여행객'은 신기하고 친해지고 싶은 존재였던 듯하다.

나 역시 신들린 사교성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인물이기 때문에 가끔은 '내가 동물원 원숭이쯤으로 보이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들만큼 과도하기까지 했던 그들의 관심에 거부감이 들지만은 않았다.

이 사람들의 친화력 사진을 찍고 있으면 슬금슬금 와서 같이 찍는 사람들이 있다. 하굣길에 만난 아이들도 구름떼처럼 모여 함께 사진을 찍었다.
▲ 이 사람들의 친화력 사진을 찍고 있으면 슬금슬금 와서 같이 찍는 사람들이 있다. 하굣길에 만난 아이들도 구름떼처럼 모여 함께 사진을 찍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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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 신기하기도 하지.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 혹은 길을 걷는 중에, 심지어 버스를 타고 대륙을 열 시간이 넘게 달리던 시간 동안에도 끊임없이 내게 와서 스페인어로 대화를 시도하던 사람들과 의사소통이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내가 알아들을 때까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몇 번이고 반복하는 것에 지치지 않았다. 나는 한 번, 두 번, 세 번, 열 번, 스무 번을 들으면, 대충 이 사람이 무엇을 물어보는지를 자연스럽게 깨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여행하는 동안 현지어를 꽤 많이 배울 수 있었다.

사람보다 소중했던 배경 페루 마추픽추를 돌 때 현지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었다. 배경과 사람을 모두 놓칠 수 없었던 현지인은 마침내 이런 사진을 찍어주었다. 나는 너무 웃겨 줄줄 울면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
▲ 사람보다 소중했던 배경 페루 마추픽추를 돌 때 현지인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었다. 배경과 사람을 모두 놓칠 수 없었던 현지인은 마침내 이런 사진을 찍어주었다. 나는 너무 웃겨 줄줄 울면서 감사 인사를 전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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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꼬르도바에서 일곱 시간 정도 걸리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그런데 30분이 되어도 버스가 오지 않는 것이다. 한국인 특유의 조바심을 온몸으로 피력하며 나는 또 혹시나 버스를 놓친 것은 아닌가 싶어 옆 사람에게 표를 내보이며 께 빠사?(어떻게 된 일이냐)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이 사람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도 길~고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듣고 있어도 대체 무슨 소린지 단 하나도 알아듣지 못한 나는 지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나는 한국어로, 그것도 경상도 억양이 가득 묻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아직 버스 안 왔다꼬?"
"Si~! Si, si, si, si(응, 맞아. 그래, 그래, 그래,)

나의 한국어가 지구 반대편에서 통하던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맞아, 정답'이라는 표정으로 고개까지 끄덕이던 현지인 친구가 너무 귀여워서 나는 한바탕 웃었다. 버스는 정말 연착됐던 것이고, 버스가 올 때까지 그 친구에게 1부터 10까지의 숫자를, 한국어,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로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내게 '무이 인떼레헨떼(너, 정말 지적이구나)'라고 말했다. 나는 또 한바탕 웃어젖혔다. 

#. 내 자녀에게 전수할, '생존 다국어 학습법'

이 사람들의 친화력 2 탄자니아 잔지바에서만 볼 수 있는 트럭 버스, 촘촘히 끼어앉은 사람들이 예뻐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흭의 턱을 잡고는 포즈를 취한다
▲ 이 사람들의 친화력 2 탄자니아 잔지바에서만 볼 수 있는 트럭 버스, 촘촘히 끼어앉은 사람들이 예뻐 사진을 찍자고 했더니 흭의 턱을 잡고는 포즈를 취한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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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미에 비해 아프리카는 영어를 꽤 잘한다. 하지만 처음 도착해서 그들의 발음을 들으면 전혀 영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심한 영국식 발음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너무 생소했다. 예를 들면 쏘까(축구), 쏙스(양말), 만(남자), 노트굿(낫 굿)…. 뭐 이런 식이다. 이렇게 간단한 단어도 내가 알아들을 수 없으니 여행 초반엔 거의 귀머거리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한국 와서도 노트 굿, 노트 굿(not good) 하며 그들의 발음에 완전 동화되어서 가뜩이나 좋지 않은 발음 더욱 저질이 되고 말았지만.

그래서 영어 쓰기를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들의 현지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간단한 인사라도 스와힐리어를 쓰면 그들은 너무너무 좋아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외국인이 한국어를 하면 신기해하듯, 우리 입에서 그들의 나랏말이 나오면 반색한다.

아프리카에서 내가 가장 많이 쓴 말은 '하바리 가니'(안녕), '키도고'(조금)이다. 현지어로 인사하면 그들은 깜짝 놀라며 묻는다. "너 스와힐리어 할 줄 알아?" 그러면 나는 손가락으로 작은 표시를 하며 '조금 할 줄 알아'라고 말한다.

그러면 '키도고'라는 단어를 쓰는 나의 모습을 보며 매우 잘한다고 칭찬한다. 나를 춤추게 하는 칭찬에 더욱 열심히 스와힐리어를 배웠고, 배운 것은 어떻게든 써먹으려고 노력했다. 심지어 부족언어인 끼꾸유어로 1부터 10까지 외웠을 때, 마을 사람들은 내게 박수를 쳐주었다.

가끔 외국에서 미국 사람들이 현지어 전혀 배우지 않고, 아주 간단한 말도 영어로만 쓰는 모습을 보면 얄미운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결국 그들은 모국어 하나로 온 세계를 누리는 특권이 있는 거니까. 그래서 다른 나라 언어를 배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거니 좀 무식해 보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어설픈 발음으로 하나부터 열까지 세는, 그런 지극히 사소한 것에 기쁨을 느낀다. 마음 문을 조금 더 열기도 한다. 물건 값을 조금 더 빼주기도 한다. '베리 굿'이라는 표현보다 '무이 부에노' '싸와'라는 나의 말에 더욱 미소 짓곤 한다.

유치원 때부터 죽어라고 배운다는 영어 공부, 영어학습법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아직 생기지도 않은 자녀에 대한 걱정을 하곤 한다. 어떻게 양육할 것인가!
남미에서 만났던 한 친구가 생각이 난다. 미학을 전공한 그녀는 졸업을 앞두고 혼자 6개월 정도 중남미 전역을 여행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중학교 때 처음 혼자 여행을 갔다고 한다. 여행 중에 정말 살기 위해 영어를 습득했다. 우스갯소리로 우리는 그것을 '서바이벌 잉글리시(생존 영어)'라고 불렀다. 나 역시 이 생존 학습법을 써먹어볼 참이다.

중요성을 알아야 즐겁게 배울 수 있는 법이니까. 그러면서 왜 배워야 하는지를 뼈저리게 체험할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된다면, '영어'란 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혹은 영어가 매우 중요하지만, 취직을 잘하기 위해서 배우게 되진 않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돈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나름의 경제 가치관도 생길 것이고, 그 나라의 문화나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빚을 내서라도 사교육비에 목숨 거는 사람들, 단지 그 돈으로 취직 잘하기 위한 영어만 배울 수 있다면, 나는 같은 돈으로 여행을 보낼란다. 아무리 객관적으로 따져봐도 여행을 보내는 것이 일거양득인 것 같다. 물론 아이가 동의하는 조건에서.

아, 물론 나는 그전에 결혼부터 해야 한다.^^

글. 니콜키드박

덧붙이는 글 | 아프리카 여행기 열세 번째



#아프리카#박진희박#영어#남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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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도 순식간에 뒤집어 즐겁게 살 줄 아는 인생의 위트는 혹시 있으면 괜찮은 장식이 아니라 패배하지 않는 힘의 본질이다.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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