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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전기철 그는 왜 스스로를 버리기 위해 시를 쓰고 있는 것일까
▲ 시인 전기철 그는 왜 스스로를 버리기 위해 시를 쓰고 있는 것일까
ⓒ 이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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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는 바느질 자국이 선연하다. 시트들로 뒤덮인 하늘을 누군가 꿰매고 있는 것이다.
빗방을이 재봉틀 소리를 내며 바느질을 하고 있다. 세상을 바느질하는 비!
상처 많은 구름은 거리 곳곳에서 펄럭이도 가위질 당한 곳마다 빗방울은 재봉질을 한다.
그때 얼굴 없는 누군가가 귀에 대고 속삭인다.
장기 삽니다. 간은 천만 원 이상, 폐는 오백만 원 이상, 위장은 삼백만 원 이상... 생각 있으면 따라와요. -61쪽 '로깡땡의 일기' 몇 토막

로깡땡은 사르트르가 쓴 소설 <구토>에 나오는 주인공이다. 그는 '가끔 카페 여자와 만나 생리적인 욕구를 풀지만 혼자 고독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그는 프랑스혁명이란 혼란기 때 이중첩자였던 룰루봉 후작이라는 인물에 대해 도서관 자료를 통해 조사한다. 왜? 역사적인 한 인물이 걸어온 삶을 통해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실존'을 연구하기 위해서다.

로깡땡은 어느 날 바닷가로 나갔다가 물수제비 뜨는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만난다. 그는 그 아이들과 물수제비 뜨는 놀이를 하기 위해 작은 돌을 집어 든다. 그 순간 구토를 느끼게 되며 계속 이어진다. 카페에서 컵에 담긴 맥주를 보아도, 카페 급사 멜빵에 매달린 주름진 셔츠를 보아도 구토를 느낀다. 구토를 가라앉혀 주는 것은 오래된 재즈 음악뿐...

문학평론가나 교수보다 시인이라 불러주기를 더 바라는 시인 전기철. 그는 시집 제목을 왜 <로깡땡의 일기>라 지었을까. 그 스스로 룰루봉 후작이 걸어온 삶을 쫓다가 마침내 '탈출'을 위한 삶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로깡땡이라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현대문명이 남긴 폭력과 부패 등을 바라보며 구토하고 있는 전기철 시인이 쓰는 시는 어쩌면 '탈출'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시인 자화상'이자 '이 세상 자화상'

"내 자신을 버리기 위해
나는 시를 쓴다."

전기철 네번째 시집 <로깡땡의 일기> 모두 5부에 시 64편이 실려 있는 이번 시집에는 '혼란'과 '혼돈'으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보며 구토를 하기도 하고, 저항을 해 보기도 하다가, 급기야 '탈출'을 하려는 '시인 자화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전기철 네번째 시집 <로깡땡의 일기> 모두 5부에 시 64편이 실려 있는 이번 시집에는 '혼란'과 '혼돈'으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보며 구토를 하기도 하고, 저항을 해 보기도 하다가, 급기야 '탈출'을 하려는 '시인 자화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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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전기철(56, 숭의여대 문창과 교수)이 네 번째 시집 <로깡땡의 일기>(황금알)를 펴내며 짤막하게 두 줄로 남긴 '시인의 말'이다. 그는 왜 스스로를 버리기 위해 시를 쓰고 있는 것일까. 시어 하나 하나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시인 몸을 돌아다니는 백혈구와 적혈구가 쑥쑥 빠져나간다고 여기기 때문일까.

글쓴이가 전기철을 만난 것은 지난 1980년대 허리춤께였다. 그때 그는 마악 문단에 나온 새내기였지만 작가회의 문인들과 술좌석에서 자주 어울렸다. 그에게는 묘한 술버릇이 하나 있었다. 문인들이 거나하게 술에 취해 술집을 빠져 나올 때쯤이면 계산대로 가서 마시던 500cc 생맥주컵 값을 내고 술이 반쯤 남아 있는 잔을 들고 나왔다. 

그는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그 컵에 남아 있는 생맥주를 마시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도 생맥주를 달게 마시며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와 문학 이야기를 했다. 그런 그가 지금은 머리를 길게 길러 여자처럼 머리핀을 꽂고 다니고 있다. 왜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가. 그가 쓴 시를 알려면 그가 살아온 발자취를 살짝 엿보는 것이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모두 5부에 시 64편이 실려 있는 이번 시집에는 '혼란'과 '혼돈'으로 가득 찬 세상을 바라보며 구토를 하기도 하고, 저항을 해 보기도 하다가, 급기야 '탈출'을 하려는 '시인 자화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아니, 조금 더 꼼꼼하게 속내를 들추자면 이 시집은 '시인 자화상'이자 '이 세상 자화상'이다.

"당신은 나를 위해서 그것도 못 참아요"

아내는 나를 조금씩 바꾼다. 쇼핑몰을 다녀올 때마다
처음에는 장갑이나 양말을 사오더니
양복을 사오고 가발을 사오고
이제는 내 팔과 다리까지도 사 온다. 그때마다
내 몸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투덜거리지만 아내는 막무가내다.
......
내 심장이나 성기까지도 바꾸고 싶어 하는
아내는 늘 돈이 모자라서 쩔쩔 맨다.-14쪽, '아내는 늘 돈이 모자란다' 몇 토막

시인 전기철이 바라보는 이 세상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살 수 있는 그야말로 물질 만능주의가 판치는 세상이다. 시인은 아내가 사오는 여러 가지 생활용품을 바라보며 사람 몸마저도 돈으로 팔고 사는 그런 무서운 세상이라고 여긴다. "얼마 전에는 술을 많이 마셔 눈이 흐릿하다고 했더니 / 쇼핑몰에 다녀온 아내가 눈을 바꿔 끼라"고 했다.

시인은 깜짝 놀라 "어떻게 눈까지 바꾸려고 하느냐, 그렇지 않아도 걸음걸이가 이상하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린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인 아내는 "그건 그 사람들이 구식이라 그래요"라며 시인을 비웃으며 나무란다. "옆집 남자는 새 신랑이 되었어요. 당신은 나를 위해서 그것도 못 참아요"라며. 

시인은 시무룩해진 아내가 안쓰러워 그냥 넘어간다. 그렇게 그냥 넘어가는 날이 이어질수록 시인 모습은 점점 다른 사람 모습으로 바뀌어간다. 시인은 스스로 옛 모습을 찾기 위해 아내보다 먼저 일어나 거울 속에서 내 자신이었을 흔적을 찾는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보아도 옛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탈출'은 곧 희망으로 가는 지름길

배우 옥소리가 간통을 당했다. 나는 도쿄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웃집 형은 직장을 잃고 개 사냥꾼으로 나섰고 친구 동생은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장난감이나 들고 다니며 공원에서 하루를 보내고 왔다.-36쪽, '샤도우 문' 몇 토막

인기 여배우, 인기 남배우가 간통 등으로 잇따라 고소당하는 세상... 도덕윤리가 깡그리 무너진 것만 같은 어지러운 세상... 시인이 사는 동네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지금 시인이 살고 있는 동네에서는 "더 이상 숨 쉴 곳이 없어 새들도 아침이면 와서 울지 않"고, 시인은 "도쿄로 도망 갈 날짜만을 달력에다 계속 바꿔" 달고 있다.

시인 "선배는 또 다른 세상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며 눈이 휘둥그레질 돌을 발에 묶고 강바닥으로 내려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시인은 "나는 곧 도쿄로 가야 한다"고 변명한다. 돌멩이를 발에 묶고 강바닥으로 내려간 선배가 새로운 세상을 찾았는지 궁금한 그때 하늘에서 "금세라도 무슨 말을 내뱉을" 것만 같다.

이 시에서 말하는 배우 옥소리는 시인 자신이기도 하고, 개 사냥꾼이 된 이웃집 형이기도 하고, 오늘도 골목에서 장난감을 굴리고 있는 친구 동생이기도 하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된 이 어지러운 세상을 벗어나는 길은 '현실 도피'가 아닌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탈출'뿐이다. 따라서 시인이 말하는 '탈출'은 곧 희망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 세상 피멍을 온몸에 새기며 함께 아파하는 시인

전기철 시인 시인 전기철이 바라보는 이 세상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살 수 있는 그야말로 물질 만능주의가 판치는 세상이다
▲ 전기철 시인 시인 전기철이 바라보는 이 세상은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지 다 살 수 있는 그야말로 물질 만능주의가 판치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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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있는데 술집에서 전화가 왔다. 술값을 계산하고 나를 데려가라는 것이다. 지금 전화를 받고 있는 사람이 바로 본인이라고 해도 술집 주인은 곧이듣지 않고 그런 거짓말을 하면 경찰에 신고하겠단다.-119쪽, '유레카' 몇 토막

시인이 자주 가는 술집도 이젠 더 이상 몸과 마음을 편하게 둘 곳이 못 된다. 이 어긋난 세상에서 '탈출'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만 같다. "나는 술집뿐만 아니라 어디에도 내 분신을 두고 온 적이 없"는 데도 술집 주인은 마구 다그치기만 한다. 시인은 다시 되뇌인다. "누가 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시인은 "조상처럼 액자에 갇혀 있은 지 오래인데 내가 밖을 떠돌고 있다니 일수 없다"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술집으로 간다. "결제할 수 없는 카드가 내 이름을 자꾸 찍어대는 것"인지 "남긴 발자국이 술집을 떠도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술집에 가자 낯익은 시인 이름이 계산서에 멱살이 잡혀 있다.

기가 찰 노릇이다. 시인은 "이 술집에 와 본 적도 없다 하고 싶지만 나를 확인시켜 줄 방법이 없다." 시인은 마침내 스스로에게 물음표를 달기 시작한다. 하지만 "백과사전만큼이나 두꺼운 사연이 담긴 얼굴에는 계산서에 항변할 만한 표정"조차도 찾을 수 없다. 나를 데려갈 수 있는 길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자본을 앞세운 현대문명 앞에서 온통 구겨지고 마구 비틀어져 엉망이 된 세상. 전기철 시인은 이런 볼썽 사나운 세상에서 자유롭게 '탈출'하고 싶다. 까닭에 그에게 있어 시 쓰기는 자신을 버리는 일이자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탈출구'이다. 새로운 세상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전기철 시인처럼 이 세상 피멍을 온몸에 새기며 함께 아파할 때 우리가 바라는 '더불어 살아가는 참 세상, 양극화가 없는 평등한 세상'이 오지 않겠는가.        

문학평론가 이경호는 "가부장제는 무너졌고 모성의 안식처는 사라졌다. 그런 현실에 대한 무기력한 권태가 위악의 제스처와 반어법을 불러낸다"며 "그러한 탈출에의 꿈은 그의 현실이 정신병동에 갇혀있을 뿐이라는 자각을 되씹게 만들기에 비극적이다. 미쳐가는 어릿광대의 말놀이-이것이 전기철 시세계의 핵심"이라고 평했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전기철은 1954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나 1988년 <심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나비의 침묵> <풍경의 위독> <아인슈타인의 달팽이>가 있다. 지금 숭의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맡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로깡땡의 일기

전기철 지음, 황금알(2009)


#전기철 시인#로깡땡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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