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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불면의 밤

 

.. 필리핀 아로요 대통령 '불면의 밤' ..  〈한겨레〉 2005.6.29.

.. 잠을 못 자고 계속 불면의 밤을 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머니투데이〉 2009.12.11.

 

 여느 책이든 학교에서든 어디에서든 마찬가지이기는 하지만, 다른 어느 곳보다 신문기사에 쓰는 말은 되도록 쉬우며 깨끗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설프게 지식 자랑을 하는 말을 늘어놓거나 어줍잖게 딱딱하고 메마른 말투를 이어붙이면, 신문을 읽는 사람들한테 도움이 안 되는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신문은 똑똑하고 잘나고 이름난 사람만 보는 매체가 아니라, 똑똑하지 않을 뿐더러 잘나지 못하고 이름도 안 알려진 사람들이 많이 보는 매체이기 때문입니다. 신문을 읽는 사람 스스로 '이런 어려운 말로 된 신문은 나하고는 동떨어진 이야기야' 하고 느끼지 않게끔, 가장 낮은 자리로 내려와서 여느 사람들 눈높이에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섣부른 유행에 끄달리지 말고, 짓궂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가운데, 가장 옳고 바르고 깨끗하고 아름답고 훌륭하기까지 한 낱말과 말투로 우리 삶을 밝혀 보여주어야 하는 매체가 바로 신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어린이책처럼 쉽게 쓰고, 만화책처럼 살아 있는 말투로 담아내야 할 매체가 다름아닌 신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 불면(不眠)

 │  (1) 잠을 자지 못함

 │   - 불면 때문에 고생하다 / 불면으로 눈이 충혈되다 / 불면의 밤이었다

 │  (2) 잠을 자지 아니함

 │

 ├ 불면의 밤

 │→ 잠 못 드는 밤

 │→ 잠 못 자는 밤

 │→ 잠 못 이루는 밤

 └ …

 

 신문글에 나타나는 "불면의 밤" 같은 말투는 신문글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신문을 엮는 다른 기자들 글에도 이어지며, 이 신문을 읽는 사람들한테 고스란히 이어집니다. 더욱이 어느 신문글에는 "잠을 못 자고 불면의 밤을 보내는"처럼 적어 놓습니다. 같은 말을 되풀이 적는 얄딱구리한 겹말을 보여줍니다. 어린이책 하나하나는 어린이들한테 '어른들이 들려주는 말마디'가 되어 고스란히 이어지듯, 신문에 적힌 글줄 하나하나는 온나라 뭇사람한테 '이러저러한 말투로 생각하고 살피고 들여다보라'는 투가 됩니다.

 

 바르게 적는 글 한 줄은 사람들한테 바른 글씀씀이를 퍼뜨립니다. 얄궂게 적은 글 한 줄은 사람들한테 얄궂은 글씀씀이를 퍼뜨립니다.

 

 우리는 사건사고 이야기만 신문으로 얻어 읽지 않습니다. '사건사고를 다루는 말'까지 함께 얻어 읽습니다. 사건사고를 올바르게 다루지 않을 때에 우리들이 잘못 생각하거나 엉뚱하게 생각할 수 있듯이, 사건사고를 다루는 말글이 올바르지 않을 때에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길을 담는 말그릇과 글그릇 또한 올바르지 않을밖에 없습니다.

 

 ┌ 걱정 깊은 밤

 ├ 근심걱정 밤

 ├ 바늘방석 밤

 ├ 두려운 밤

 └ …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아무 짓이나 함부로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른들 하는 짓이 옳든 그르든 아이들이 손쉽게 따르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조금이나마 있는 어른은, 아이들 앞에서뿐 아니라 이웃 어른이나 동무 어른 사이에 있을 때에도 말을 옳게 가누려 하고 매무새를 바르게 추스르려고 합니다. 아이들은 언제 당신 곁에 있을지 모르는 가운데, 아이들 앞에 있을 때에만 바르게 말하고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옳고 바르게 살아가고 생각하는 가운데, 누구 앞에서건 옳고 바르게 말해야 알맞습니다. 아름답습니다.

 

 이리하여, 아이들 말글이 엉터리가 되었다면 어른들 말글이 먼저 엉터리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건 푸름이들이건 얄딱구리한 범죄를 손쉽게 저지르거나 따돌림 따위를 마구 해댄다면, 바로 우리 어른들부터 얄딱구리한 범죄를 아무렇지 않게 저지르는 가운데 우리 이웃과 동무를 따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 스스로 어른 삶을 하나도 안 고치는 가운데 아이들을 나무라거나 꾸짖을 수 없을 뿐더러, 아이들한테 몽둥이를 든다 해서 나아지거나 달라질 구석은 없습니다. 머잖아 아이들과 푸름이들이 '어른이 되고' 나면 우리 삶터는 더 어지러워지고 형편없이 되고 맙니다.

 

 ┌ 불면 때문에 → 잠을 못 자 / 잠이 안 와

 └ 불면으로 눈이 충혈되다 → 잠을 못 자 눈이 벌겋게 되다

 

 한자말 '불면'은 그대로 두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불면증'이라고도 하니까요. 쓰고 싶으면 쓸 노릇이요, 괜찮게 여긴다면 써야 할 노릇입니다.

 

 다만, 우리들 말씨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오늘은 잠이 안 오네." 하고 말합니다. "오늘은 불면이네." 하고 말하지 않아요. "오늘은 잠이 안 오는 날이야." 하고 말하지, "오늘은 불면의 날이야." 하지 않습니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고, "자리에 누웠지만 눈만 멀뚱멀뚱할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은 말투 그대로 말을 하면 되고, 이 말투 그대로 글을 쓰면 됩니다. 굳이 '불면'이라는 한 낱말만 써야 하지 않습니다. '잠 안 옴'처럼 써도 잘 어울립니다. '잠 못 잠'이라 해도 괜찮습니다. '잠 못 듦'이나 '못 잠'이라 해도 될 테지요.

 

 내 삶을 보고, 내 생각을 다독이며, 내 말글을 일으킬 노릇입니다.

 

 

ㄴ. 불면의 이유

 

.. 그러나 정확한 사업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까 하는 걱정이 나의 불면의 이유였다 … 나는 JOMAS가 돈을 지원할 수 있는 조건이 없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잠이 오지 않았다 ..  《소노 아야코/오근영 옮김-왜 지구촌 곳곳을 돕는가》(리수,2009) 190, 193쪽

 

 "정확(正確)한 사업(事業)이라는 것이"는 "올바른 일이란"이나 "어김없고 바른 일이란"으로 다듬어 봅니다. '과연(果然)'은 '참말'이나 '참으로'로 손보고, '나의'는 '나의'로 손보며, '이유(理由)'는 '까닭'으로 손봅니다. '지원(支援)할'은 '댈'이나 '보탤'이나 '도울'로 손질하고, '조건(條件)'은 '곳'이나 '바탕'으로 손질하며, "없어지는 게 아닌가"는 "없어지지 않나"나 "없어지지 않을가"로 손질해 봅니다.

 

 ┌ 나의 불면의 이유였다 (x)

 └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o)

 

 우리한테는 우리 말만 있지 않기에, 우리 말투로 이야기하는 말마디가 하나에, 일본한자말이나 영어로 읊는 말마디가 여럿 있습니다. 이 보기글을 보면서도 느끼지만,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처럼 알맞게 잘 적을 수 있는 가운데, "나의 불면의 이유였다"처럼 엉뚱하게 적고 맙니다.

 

 ┌ 내가 잠 못 자는 까닭이었다

 ├ 내가 잠을 못 이룬 까닭이었다

 └ …

 

 틀림없이 한국사람 입에서 나오는 말이요, 한국사람 손에서 쓰이는 글입니다. 겉보기로는 모두 한글이니 한국말이나 한국글이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불면의 이유"는 참말 한국말입니까. 참으로 한국글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일본말을 껍데기로만 옮겨적은 셈 아닌지요. 일본글을 제대로 옮겨적지 못한 꼴 아닌지요.

 

 ┌ 참말 있을까 하는 걱정 때문에 잠을 못 잤다

 ├ 참으로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잠들 수 없었다

 ├ 그야말로 있을까 하는 걱정이 쌓여 잠자지 못했다

 └ …

 

 우리한테는 '번역자'와 '번역 전문가' 못지않게 '글다듬꾼'과 '글다둠쟁이'가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일본글이든 미국글이든 프랑스글이든 옳고 바르게 읽어내어 옮겨내는 사람이 하나 있고, 이렇게 옮겨낸 글을 우리 문화와 삶과 생각 어디에나 어긋나지 않도록 슬기롭게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 하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의#토씨 ‘-의’#우리말#한글#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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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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