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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인문한국지원사업(HK) 선정 과정에서 1차 전공심사 및 2차 면접심사를 거친 결과 월등한 1위를 차지했던 중앙대학교 독일연구소가 마지막에 석연치 않은 이유로 탈락하고 만 사태는 학계에 큰 충격을 던지고 있다.

이 연구소는 2009년 HK 해외지역연구 소형분야에 지원해, 객관적이고도 엄정한 심사를 거친 결과, 총 12개 과제 중 2위와도 현저한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런데 최근 한국연구재단의 최종 결정에서 놀랍게도 탈락했다. 정부의 인문사회분야 학술연구지원 사업에서 1위 후보 과제가 탈락한 일은 과거의 군사 독재 정권 시절조차 없던 일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민주당 이종걸 의원실에 따르면 지난 9월 한국연구재단이 주관한 '2009년 대학중점연구소 사회과학분야 지원 사업'에서 상지대·성공회대·한신대 연합연구소인 '민주사회정책연구원'이 '사회·사회복지·정치 부문'의 2단계 전문가 심사 결과 1위(평균 93.17점)를 차지했지만, 결국 지원 대상에서 탈락했다. 대신 전문가 평가 2위였던 ㅅ대학의 사회과학연구소(평균 90.00점)가 최종 선정된 것이다.

한국연구재단 관계자는 "대학 부설 연구소 육성이라는 사업취지와 달리 3개 대학 연합 컨소시엄이라는 것이 확인돼 최종 탈락시킨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신청 요강에는 '대학 연합 형태를 배제한다'는 내용이 없었다. 연구원측은 "시국선언에 참여한 진보성향 교수들이 주축인 것이 밉보여서 탈락했다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언행일치, 이제 한국사회에선 사라졌다

명실상부, 지행합일, 언행일치, …. 이런 표현들은 모두 말과 실천의 일관성을 강조한다. 그런데 요즘 한국 사회를 보면 이런 가치들과는 거꾸로 달리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예컨대, 말로는 '섬김의 리더십'을 이야기하면서 용산 참사나 쌍용차 사태에서 보듯 실제로는 섬뜩한 리더십이 많이 보이고, 나라 경영의 '선진화'를 강조하면서 여전히 공권력 투입과 일방통행 식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4대강 '살리기' 사업을 한다면서 사실상 4대강 생태계를 죽이려 든다. 국토의 '균형 발전'을 한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수도권 집중을 강화하며, 노사 간 '상생의 문화'를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는 노동 탄압을 일삼는다. '선진 일류'를 앞세우는 국세청의 수장이 실제로는 비리와 부패로 얼룩지고 있다. 이에 질세라, 교육과학기술부는 '미래를 위한' 교육과 학문의 '국제 경쟁력'을 강조하면서도 실제로는 학습자나 연구자의 내재적 동기를 짓밟는다. 위험천만한 고속도로 '역주행'을 상기시킨다.

이번의 중앙대 독일연구소의 HK 지원 사업 최종 탈락 사태도 바로 이러한 '역주행'의 생생한 예다. 세계적으로도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 역주행의 주인공은 2009년 예산 규모가 2조 7천억 원에 이르는, '한국연구재단(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인데 그 홈피엔 이렇게 외치고 있다.

"창의적이고 다양한 연구 및 인력 양성 활동을 지원함으로써 국가의 연구 경쟁력을 제고하고 나아가 선진국가로의 발돋움에 초석이 되겠습니다."

한국연구재단은 2009년 6월 26일, 기존의 한국과학재단, 한국학술진흥재단, 국제과학기술협력재단 등이 통합되어 "국가 기초연구지원시스템의 효율화 및 선진화"를 위해 새로이 출발한 교과부 산하 국가 기관이다.

그런데 최근 중앙대 독일연구소 사태는 그 좋은 구호와는 달리 "창의적이고 다양한 연구 활동"을 지원하기는커녕 방해하며, "연구 경쟁력"을 제고하기보다는 억압하며, "선진화"보다는 후진화의 가능성이 높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

이와 관련 중앙대 독일연구소는 2일 "재단 측이 신청요강에 기재되지 않은 요건을 이유로 전문가 평가에서 1위를 차지한 연구소를 최종 탈락시킨 것은 부당하다"며 한국연구재단을 상대로 한 인문한국 연구지원사업 탈락처분 취소소송을 대전지방법원 행정부에 제기했다.

한국연구재단, 지원 대신 방해- 선진화 아닌 후진화

비판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절차적 공정성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학문의 자유라는 문제다.

절차적 공정성이란 모든 의사결정 과정에서 관련된 당사자들이 납득 가능하게 객관적이고 투명하며 합리적인 절차를 지키는 일이다. 한 마디로, 어느 누구도 그 최종 결과에 대해 '억울함'이나 '부당함'을 느끼지 않도록 그 과정을 진실하게 만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절차적 공정성을 제대로 지키려면 한편으로는 내재적으로 결정 기준의 일관성, 투명성, 객관성이 유지되어야 하며, 다른 편으로는 외재적인 영향력 변수, 예컨대, 정치적 고려나 연고 관계, 로비나 뇌물 등을 철저히 배제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 사태는 1차 전공심사와 2차 면접심사까지 합리적으로 종결한 결과에 대해 겉으로 내세우는 해명("제3세계 우대 원칙" 또는 "단일국가 연구 불리")과는 달리 '정치적 고려'에 의해 비일관적이고 비합리적인 결론을 내고 말았다는 점에서 절차적 공정성을 심대하게 훼손한다는 여론이다.

 중앙대 김누리 교수 등 67명의 교수들이 지난 6월 3일 오후 서울 흑석동 중앙대 대학원앞에서 '다시 민주주의의 죽음을 우려한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현 시국에 대한 중앙대학교 교수들의 입장'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중앙대 김누리 교수 등 67명의 교수들이 지난 6월 3일 오후 서울 흑석동 중앙대 대학원앞에서 '다시 민주주의의 죽음을 우려한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현 시국에 대한 중앙대학교 교수들의 입장'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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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학문의 자유는 대한민국 헌법 제22조에서 보장하는 국민의 기본권에 속한다. 학문의 자유란 보다 구체적으로 학자적 양심에 따른 학문의 독자성을 보장함과 동시에 국가의 간섭이나 침해로부터 보호받을 권리를 말한다. 이번 중앙대 사태도 그 이면엔 연구 책임자인 김누리 교수가 2009년 6월 3일, 중앙대 교수 시국선언을 주도했다는 점이나 공동 연구자들 대부분이 시국선언 참여자들이라는 점에서 '정치적' 고려가 작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점의 부당성 여부는 법적인 절차, 즉 행정소송을 통해서도 해명될 것으로 기대하지만, 그 이전에 이미 삼척동자가 보더라도 학문의 자유가 심각히 침해당하고 있음이 명백하다. 오죽하면 "세계적 투기꾼"이라는 오명까지 가진 조지 소로스조차 2001년 6월, 러시아 정부가 과학원의 (대외 접촉을 규제하는 등) 학문의 자유를 탄압한 데 대해 "러시아 내 투자와 박애주의 활동을 재고할 것"이라 경고까지 했겠는가? 이렇게 학문의 자유란 대한민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존중하는 가치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한국연구재단은 스스로 내세우는 구호와는 달리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며 절차적 공정성을 훼손함으로써 학술 연구의 선진화나 경쟁력 제고에 '걸림돌'이 될 소지가 크다. 잘못된 결정을 바로 잡는 데는 '시기'가 따로 없다. 2002년까지만 해도 '합헌'이라 결정되었던 '혼인빙자간음죄'가 2009년 들어 바로 엊그제 양성 평등 및 성의 자기 결정권 원칙, 사생활 국가 간섭 배제라는 관점에서 '위헌'으로 결정된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이번 부당한 중앙대 독일연구소 사태도 잘못된 결정을 솔직히 인정하고 바로잡는다면 어느 누구도 비난하기는커녕 뒤늦게나마 박수를 보낼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인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시민의 불복종>에서 강조한, "가장 좋은 정부란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 또는 "가장 좋은 정부란 전혀 다스리지 않는 정부"라는 말이 새삼 가슴에 와 닿는다. 다스리기보다는 겸허하게 배려하는 정부야말로 그 존재 가치가 있는 것이다. 중앙대 독일연구소만이 아니라 양심적인 학문 세계의 모든 관계자들은 교과부 및 한국연구재단의 양심적인 결단을 기대하고 있다. '너무' 늦기 전에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강수돌님은 고려대 교수입니다.



#인문한국지원사업#강수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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