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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안트베르펜적

 

.. 거기에는 어깨가 넓고, 힘세며, 혈색 좋은 플랑드르 수부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완전히 안트베르펜적인 무리가 떠들썩하게 격렬한 동작으로 홍합을 먹거나 술을 마시고 있고 ..  《빈센트 반 고흐/박홍규 옮김-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아트북스,2009) 364쪽

 

 '수부(水夫)'는 '뱃사람'으로 고쳐씁니다. 이런 낱말 '수부'를 알아들을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아니, 이런 낱말 '수부'는 우리 말이라 할 수 있을까요.

 

 '완전(完全)히'는 '어디로 보나'나 '어느 모로 보나'로 손보고, "격렬(激烈)한 동작(動作)으로"는 "거칠게"나 "사납게"나 "투박하게"로 손봅니다.

 

 ┌ 안트베르펜적 : x

 │

 ├ 안트베르펜적인 무리

 │→ 안트베르펜다운 무리

 │→ 안트베르펜 냄새를 풍기는 무리

 │→ 안트베르펜 냄새가 나는 무리

 │→ 안트베르펜 느낌이 드는 무리

 └ …

 

 도시이름 뒤에 '-적'을 붙인 보기입니다. 이런 보기글대로라면, "서울적인 무리"나 "인천적인 무리"나 "제주도적인 무리" 같은 말마디도 쓸 수 있는 셈입니다. "뉴욕적인 사람들"이나 "파리적인 사람들"이나 "베이징적인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는 노릇입니다.

 

 그야말로 어디이든 못 갖다붙이는 데가 없는 '-적'이라 할 만합니다. 어디에든 붙이면 그만인 셈인 '-적'이구나 싶습니다.

 

 ┌ 서울다운 모습 (o)

 ├ 서울 같은 모습 (o)

 │

 └ 서울적인 모습 (x)

 

 그렇지만, 우리한테는 '-다운'과 '같은'이 있습니다. 어떤 느낌을 잘 나타내거나 어느 모습을 넉넉히 보여준다고 할 때에는 '-다운'이나 '같은'을 뒤에 붙입니다. 예부터 이렇게 말했고, 오늘에도 이처럼 말하며, 앞으로도 이와 같이 말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말이니까요. 우리 말투이니까요. 우리 삶이니까요. 우리 모습이니까요.

 

 다만, 어제까지 '-다운'이요 '같은'이었다 하더라도, 오늘은 '-적'이 훨씬 자주 쓰인다고 느낍니다. 이리하여 앞으로는 '-다운'이나 '같은'을 넣으면, 외려 얄궂거나 어울리지 않거나 낯설다고 여길는지 모릅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읊는 데에도 어딘가 안 어울린다고 느끼면서, 어딘가 얄궂다고 생각하면서, 어딘가 낯설다고 여기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말투를 내동댕이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라밖 책을 우리 말로 옮긴다는 대학교수님께서 '안트베르펜적'이라고 버젓이 적는 모양새를 보나, 또 이런 말마디를 걸러내지 못하는 출판사 사람들 매무새를 보나 그렇습니다. 이 땅에서 옳고 바른 말이 옳고 바르게 뿌리내리면서 싱그러운 줄기를 올려 아름다운 꽃을 피우거나 소담스런 열매를 맺기를 꿈꾸는 일이란 한낱 부질없는 꿈이 아닌가 싶습니다.

 

 

ㄴ. 일본적

 

.. "소심하긴!" "포기하지 마! 모든 일에는 도리와 순서가 있는 법이야. 작은 것부터 하나씩!" "너무나 일본적인 악마잖아!" ..  《후루야 우사마루/김동주 옮김-최강 여고생 마이》(애니북스,2006) 143쪽

 

 '소심(小心)하긴'은 그대로 두어도 나쁘지 않으나 '쩨쩨하긴'이나 '시시하긴'으로 손보면 한결 낫습니다. '포기(抛棄)하지'는 '그만두지'로 손보고, "도리(道理)와 순서(順序)"는 "바른 길"이나 "차근차근 밟을 바른 길"로 손봅니다.

 

 ┌ 너무나 일본적인 악마잖아

 │

 │→ 너무나 일본 냄새 나는 악마잖아

 │→ 너무나 일본사람 같은 악마잖아

 │→ 너무나 일본사람처럼 구는 악마잖아

 └ …

 

 영어(英語)는 영국사람 말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영국말'과 '미국말'로 나누어서 적어야 올바르지 않으랴 싶은데, '영국 영어-영국식 영어-영국적 영어'라는 말하고 '미국 영어-미국식 영어-미국적 영어'라는 말이 널리 쓰입니다.

 

 언제부터인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 같은 말투가 퍼졌는데, 어느 누구도 예나 이제나 "가장 한국다운 문화가 가장 세계에 내놓을 만하다"처럼 말하려고 생각하지 않으며, 말뜻과 말느낌을 옳게 가다듬으려고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 일본적인 이질감을 주지 않는 영화 → 일본 영화 같은 느낌이 안 드는 영화

 ├ 일본적인 왜색풍이라는 이유로 → 일본 냄새가 난다는 까닭으로

 ├ 가장 일본적인 만화라는

 │→ 가장 일본 만화 같다는 / 일본 느낌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만화라는

 ├ 일본적인 특색을 지닌 자동차

 │→ 일본답다는 자동차 / 일본다움을 보여주는 자동차

 └ 일본적 미의식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 일본다운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어떤 느낌을 나타내려는 자리에 붙이는 말마디로 '-다운'이 있고 '-스러운'이 있습니다. 옛 느낌이 난다 하여 '예스럽다'고 합니다. 사내 느낌이 난다 하여 '사내답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 문화나 멋을 보여준다고 할 때에는 "한국다운 문화"나 "한국스러운 멋"이라고 적어야 올바릅니다만, "한국적 문화-한국적 멋"처럼 적는 분이 훨씬 많습니다.

 

 이리하여 일본 문화를 "일본 문화"라 하지 않고 "일본적 문화"라고 이야기해 버리고 맙니다. "일본다운 만화"를 "일본적인 만화"라 하고, "일본 냄새"나 "일본 빛깔"을 "일본적 향취"나 "일본적 색채"라 합니다. 일본다우니 "일본답다"고 할 뿐이나, "일본적인 특색을 지닌 자동차"처럼 읊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말을 한다고는 하나, 도무지 우리 말이라 여길 수 없는 말마디가 퍼진다고 할까요. 우리들은 우리 글을 쓴다고는 하나, 어느 모로 보나 우리 글이라고 느끼기 어려운 글줄만 나돈다고 할까요.

 

 서양사람이 '-tic'을 붙이건 일본사람이 '-的'을 붙이건, 서양사람은 서양말을 하니 서양 말투이고 일본사람은 일본말을 하니 일본 말투입니다. 우리는 우리 말투대로 '-다운'이나 '-스러운'을 붙이면 됩니다. 한국말답게 말하고 한국글스러웁게 글쓰면 넉넉합니다. 한국말이라 느끼도록 말을 해야 알맞고, 한국글 느낌이 나도록 글을 써야 올바릅니다.

 

 영어를 쓸 때에는 영어 느낌대로 써야 합니다. 일본말을 할 때에는 일본말 느낌이 배어나야 합니다. 한국말을 할 때에는 한국말이라고 느끼도록 해야겠지요.

 

 ┌ 일본다움 / 일본스러움

 ├ 일본 같음 / 일본 느낌

 └ 일본 빛깔 / 일본 냄새

 

 나는 나답고 너는 너다울 때 비로소 서로서로 다 다른 아름다움입니다. 나한테는 나를 찾고 너한테는 너를 찾을 때 바야흐로 저마다 다 다른 멋입니다. 좋아서 받아들일 수 있고, 반가우니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 느낌을 죽이거나 내 삶을 누르면서 남 느낌으로 떡바르면 어찌 될까요. 내 얼굴과 모습을 지우거나 내 삶을 옥죄면서 남 얼굴과 모습으로 고쳐 버리면 어찌 되나요.

 

 나 스스로 내 말을 찾아야 하고, 내 힘으로 내 글을 갈고닦아야 합니다. 내 입으로 내 말을 해야 옳고, 내 손으로 내 글을 써야 바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적#적的#우리말#한글#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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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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