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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의 위해 부모형제를 헌신짝처럼 버리다
 
조국을 떠나서 외국에 나가 살면 모두들 애국자가 된다고 한다. 그러나 조국을 위해 대의멸친의 길을 택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대의멸친(大義滅親)'이란 중국 춘추 시대 임금 환공을 죽이고 자리를 차지한 주우의 부친이, 대의를 위해 그의 아들 주우를 처형케 해달라고 고발해서 나온 데 유래한 말이다.
 
이렇듯 나라를 위해서 부모나 형제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일은 쉽지 않다. 송재 선생은 개항 이후 밀어닥친 외세의 침투에 맞서 갑신 혁명을 일으키고, 이 혁명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의 부모와 아내와 아들 등이 참형을 당했다. 그래서일까. 그의 애국의 여정을 살펴보면, 여느 독립운동가와 달리 모국에 대한 애국심이 집요함을 엿볼 수 있다. 조선해방이 되어도 노구를 이끌고 고국을 방문해서, 통일된 민주 독립국가 수립을 위해 노심초사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한국 최초 민간신문, 독립신문 간행
 
사실 요즘 세태의 아이들끼리 '서태지'를 모르면 안되지만, 서재필을 몰라도 될 터이다. 그러나 서재필은 몰라도 학생이라면, 그가 만든 '독립신문'을 모르는 학생은 또 거의 없을 것이다. '독립신문'은 서재필 선생이 1895년 12월에 귀국하여 간행한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이다. 그는 독립신문과 함께 독립협회와 독립문 등을 만들어 자주· 민권 운동을 전개했다.
 
송재 서재필 선생은 이렇게 구한말부터 해방된 정국의 격동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개화와 독립 그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한 우리 민족의 위대한 선각자이다. 
 
위가 비어서는 애국자가 될 수 없다던데
 
송재 선생의 민중계몽과 선진 정치의식 고양을 위한 한글판 독립신문 발간은 사실 그의 생애에 가장 위대한 업적이다. 갑신정변 이후 그는 고달픈 여정을 걷게 된다. 미국으로 맨손으로 건너간 그는 가장 밑바닥에서 생존을 위해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그리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의학 공부을 하여, 한인으로서는 최초로 의학사가 된다.
 
그리고 한인 최초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여, 필라델피아에서 인쇄 및 문방구점을 경영해 성공한 사업가로 활동하여 모은 재산을 한국 독립 운동에 쓴 대가로 파산한다.
 

 
눈보라 비바람에 알몸이 드러나고
서릿발 동부새에 뼈마디가 갈리어도
조국의 이 한복판을 이 겨레와 지키리
 
<파고다의 열원> 중 '정현종'
 

한국 독립의 열망 만방에 알리는데 공헌
 
송재 서재필 선생은 전남 보성의 외가에서 1864년 1월 7일 출생한다. 1882년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교서관 부정자를 지내기도 한다. 1884년 12월 4일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박영효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켜, 1885년 4월 박영효, 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한 이후 3. 1 운동 발발 소식을 듣자, 이승만, 정한경 등 미주 한인 대표들과 함께 필라델피아에서 제 1차 한인 회의를 개최해 한국 독립의 열망과 새로운 독립국가건설의 방향을 만방에 알리는 데 공헌한다.
 
필라델피아에서 조직한 한국통신부를 통해 'korea review' 를 발간하고 강연활동을 전개했으며, 미국 21개 지역에 친한 미국인들을 중심으로 한국친우회를 결성해 전 세계에 한국의 독립여론을 형성시키는데 앞장섰다.
 
이렇게 그는 구미위원부와 워싱턴군축회의, 범태평양회의에서 한국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활발한 선전외교 활동을 전개했으며 국내외 주요 언론을 통해 수많은 글을 기고해 독립정신을 고취한다. 해방직후 미군정의 최고고문으로 한국에 돌아와서는 민주적이고 통일된 새로운 독립국가를 수립하는데 자신의 모든 열정을 다 바친다.
 

'근대 한국 민족 선각자'로서의 고독은 하늘만큼 컸다
 
오직 한길 한국 독립과 통일된 민주국가 수립을 위해 헌신 했던 송재 서재필 박사. 그는 '근대 한국 민족의 선각자'라는 상징적 존재로, 현대에 와서야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민족을 위해 손색 없이 살아온 인물이지만, 그의 애국으로 인해, 그는 부모와 아내, 자식의 참형 등을 홀로 감내해야만 했다. 그리고 한평생 이역만리 떨어진 낯선 미국땅에서 숨을 놓는 순간까지 조국의 앞날만을 생각하며 살다 간 고독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과 한국의 독립, 두 가지 모두에 투철했다
 
그 고독을 함께 나누었던 미국인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과의 사이에 '뮤리엘'과 '스테파니' 두 딸이 있다. 그는 이렇게 미국 정부로부터 시민권을 받은 인물이었지만, 자신의 삶과 한국의 독립, 이 두 가지 모두에 투철했다.
 
서재필 기념관을 탐방하면서 머릿속에 줄곧 떠나지 않는 말이 있었다. "애국심이야말로 순박한 기조 애정이어서 무력자나 무식자라도 배우지 않고 이미 이를 안다"는 어느 시인의 말이다. 누구나 조국처럼 갖고 있는 애국심… 그러나 피의 대가를 치르지 않는 이상, 그 누구나 갖고 있는 애국심은 탁상이론 같다는 생각 말이다. 
 
거리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서재필 생가에도 방문을 했으나 사진 촬영은 하지 못했다. 공교롭게 배터리가 나가서. 돌아오는 8. 15 광복절날 가족들과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한다. 
 
여름 태양은 쨍쨍 한데 서재필 기념공원의 우뚝 서 있는 서재필 동상 앞에서 찰칵 찰칵 관람 온 초등학교 학생들, 서재필 할아버지 동상이 잘 보이게 날 보고 잘 찍어달란다. 그런데 일회용 카메라가 아니라, 아주 고급 카메라라서 더듬대며 찍어주었다. 그리고 잘 나와야 할텐데 하는 말도 덧붙였다. 아이들은 잘 나오는 카메라라고 웃는다.
 
여행의 길은 낯선 길을 부르고, 육백년 넘는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의 거목의 그림자는 어느새 길을 저만큼 먼저 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서재필 기념공원은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1024번지에 위치 한다. 
관람문의 전화는 061-852-2815-6


#서재필#보성#서재필 기념공원#서재필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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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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