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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나라당이 22일 전례없는 재표결에 대리투표 논란까지 일으키며 미디어법을 강행처리하자 야당의원들이 '원천무효'를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이윤성 국회부의장이 산회를 선포하고 있다.
 한나라당이 22일 전례없는 재표결에 대리투표 논란까지 일으키며 미디어법을 강행처리하자 야당의원들이 '원천무효'를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이윤성 국회부의장이 산회를 선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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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미국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사 때문에 희희낙락이라고 한다. 그 신문이 미디어법 처리에 대해 "표결을 통해 법안 통과를 추진한 데 대해 높은 평가를 보낸다"고 썼기 때문이다. 마치 하교(下敎)에 황송하여 어쩔 줄 모르는 격이다.  

누굴 탓할 수도 없는 박근혜 전대표의 자승자박

WSJ은 미국 우파의 중추 신문이다. 미국에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설을 쓴 신문이다. 레이건의 반공주의와 공급 사이드 경제학을 옹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얼마나 악의적인 보도를 일삼았는지 클린턴 백악관에서 일하던 한 사람은 자살까지 했다. 그는 유서에 "결론도 없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WSJ 편집자들"이라고 썼다. 도대체 어떤 마인드면 이런 신문의 칭찬에 기꺼워할까.

지난 7월 22일자 WSJ에 칼 로브의 칼럼이 실렸다. 로브는 미국 공화당의 꼴보수가 추진한 이라크 전쟁과 친기업(pro-business) 정책, 복지축소 등의 최고 브레인이었다. 칼럼은 오바마 대통령이 난관에 봉착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근거로 오바마의 의료보험개혁에 대해 49%가 찬성하고, 44%가 반대하고 있는 여론을 들었다. 60% 내외의 지지율을 보이는 미국 대통령이 불과 44%가 반대하는 정책을 밀어붙여 위기라면, 지지도 30% 이하의 한국 대통령이 70%가 넘는 여론이 반대하는 법을 밀어붙인 행위는 일종의 광태(狂態)다.  

각설하고, 어쨌든 이번의 날치기 파동에서 단연 눈에 띄는 사람은 박근혜 전 대표다. 그는 그간 쌓아놓은 덕을 일거에 날려버렸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7월 '본회의에 참석해 반대표를 던지겠다'고 한 박 전 대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64.6%가 국민 여론에 따르는 온당한 처신이라고 했다. 또 반MB 여론은 61.6%에 달했다. 누가 봐도 박 전 대표의 위상은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미디어법 날치기 이후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박 전 대표가 강행처리에 반대하다가 갑자기 찬성으로 돌아선 것에 대해 국민의 60.3%가 실망스럽다고 했다. KSOI의 7월 27일 조사다. 이에 앞서 실시한 윈지코리아컨설팅의 조사에서도, 박 전 대표의 행보에 대해 '일관성이 없고 입장변화의 명분도 적어 문제가 있었다'는 여론이 57.1%였다. 박 전 대표는 졸지에 초라해지고 궁색해졌다.

생각해 보면, 박 전 대표가 대선 후보 지지도에서 부동의 1위를 누리는 것은 일차적으로 구도의 산물이다. 대선과 총선 패배로 극도로 진보 개혁 진영이 많이 위축됐다. 게다가 제1 야당은 강경투쟁보다는 대안정당을 모색했다. 진보정당은 분열했다. 그러다 보니 국민들은 잘못하고 있는 MB에 대해 다른 누군가 견제해 주기를 바랐다. 게다가 MB가 박 전 대표를 계속 홀대했다. 박 전 대표가 간간이 반기를 드니 여론이 당연히 그에게 온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근혜 불패',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도

 미디어법을 둘러싼 여야간 대치와 관련해 끝까지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처리해야 한다고 밝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1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이성헌 의원과 얘기하고 있다.
 미디어법을 둘러싼 여야간 대치와 관련해 끝까지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의처리해야 한다고 밝힌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15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이성헌 의원과 얘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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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9 재·보궐 선거, 노무현 전대통령의 서거 등으로 인해 여권이 위기에 처했다. 여기에다 민주당이 야성을 회복하면서 정치적 대결이 격화됐다. 그 결과, 당파성이 우선 가치로 부각했다. 마침 당내 원내대표 선출을 둘러싸고 박 전 대표가 흔들렸다. 김무성 추대 카드를 일언지하에 거부해 화합론에 찬물을 끼얹었다. 뒤이은 표 대결에서 패배하자 친박의 결속력은 흐트러졌다. 박 전 대표에 대한 아스팔트 우파들의 공세도 점차 거세졌다.

이런 터에,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로 여권 전체가 수세로 몰리자 박 전 대표의 운신 공간은 급격히 축소됐다. 미디어법을 놓고 박 전 대표가 보폭을 넓히려 하자, 친이가 이때다 하며 강하게 압박했다. 박 전 대표로서는 불가피하게 어떤 선택을 해야 할 상황에 내몰렸다. 

결국 박 전 대표는 굴복을 선택했다. 군말 없이 당론에 따랐다.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의 고민은 국민 여론과 당내 여론이 다른 데서 비롯됐다. KSOI 7월 조사에서 미디어법 개정에 대해 국민 여론은 60.8%가 반대, 33.2%가 찬성의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한나라당 지지층에서는 찬반비율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찬성이 63.5%, 반대가 29.9%였다. 당보다 자신을 앞세운다는 비판을 불식시키기 위해 박 전 대표는 당내 여론을 선택했다.

이것은 자멸책이었다.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되지만, 한나라당의 지난 서울시장 경선과 대선 후보 경선을 보더라도 이런 결론이 나온다. 당시 한나라당 당원은 당의 적자보다 확실하게 이길 수 있는 후보를 선택했다. 당에서 3선이나 한 맹형규 후보를 내치고 별로 한 것도 없는 오세훈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길거리에 내몰린 한나라당을 살려낸 박 전 대표를 제쳐두고 '탈 많은' 이명박 후보를 뽑았다. 오 후보나 이 후보나 모두 본선 경쟁력에서 앞섰기 때문이다. 당 기여도보다는 승리 가능성을 가장 중요시하는 한나라당 당원들에게 이번에 박 전 대표가 당론에 따랐다고 하더라도 별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박 전 대표가 범한 잘못 중에서 가장 큰 것은 프레임 문제에 있다. 이번 선택으로 박 전 대표는 MB와 하나로 묶여버렸다. 이런 프레임 하에서라면 그에게 다음 대선은 '어떤 경우에도 이길 수 없는'(no win) 싸움이 돼버리기 때문이다. 실패한 전임자와 한통속으로 보인다면 속수무책인 것은 숱한 선거에서 확인되는 철칙이다. 열린우리당이 별의별 수를 다 썼지만 결국 대선과 총선에서 패배한 것이 가장 가까운 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포인트는 이번에 친이의 강공이 먹혔다는 사실이다. 친이는 표면적으로는 박 전 대표의 안을 수용하는 척하면서 사실상 원안대로 밀어붙였다. 그 기세에 박 전 대표가 굴복했다. 4.29 재·보궐에서 미디어법 처리까지 이어진 친이·친박 대결에서 완패한 것이다. 힘에서만 진 게 아니라, 전략과 명분에서도 졌다. 친이는 그에 대한 두려움을 이번에 씻어냈다. 박 전 대표 대세론을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일까, 미디어법 날치기 후에 MB가 이렇게 말했다. "성적 좋은 사람만 인정받는 시대는 마감하겠다"고 했다. '좋은 성적'이라 함은 박근혜의 대선 지지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닐는지. 박 전 대표의 행보를 보노라면, 박 전 대표를 대중성이 아니라 실질로 평가하려는 MB의 접근법이 어쩌면 옳은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정세균 대표에게 열린 기회의 창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28일 오후 영등포 당사에서 열린 '언론악법 원천무효·민생회복 투쟁대책위원회' 발대식에서 "한나라당에 의해 일방 처리된 언론악법을 원점으로 돌려 무효화하기 위해서 강력히 투쟁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민주당 정세균 대표가 28일 오후 영등포 당사에서 열린 '언론악법 원천무효·민생회복 투쟁대책위원회' 발대식에서 "한나라당에 의해 일방 처리된 언론악법을 원점으로 돌려 무효화하기 위해서 강력히 투쟁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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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법 날치기가 박 전 대표에게 많은 것을 잃게 했다면, 정세균 대표에겐 기회를 주고 있다. 속담에 바람이 불어야 배가 간다고 했다. 대선후보 지지도에서 1%도 안 되는 정 대표에게 지금의 시련은 그야말로 배를 움직일 수 있는 '바람'이 될 수도 있다. 지금이 정 대표에겐 자신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럼으로써 국민들에게 확실하게 인정받을 수 있는 호기다.

지난 4월 KSOI 조사에서 정 대표는 매우 낮은 평가를 받았다. 잘하고 있다는 응답이 20.5%,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이 51.2%였다. 민주당 지지층에선 긍정 평가가 47.7%, 부정 평가가 40.8%였다. 이러한 수치는 과거 당 대표들에 비하면 많이 낮은 수준이다. 2006년 4월에 실시한 조사에서, 당시 정동영 의장은 37.6%로부터 잘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잘못하고 있다는 평가는 41.8%였다. 당 지지층을 대상으로 할 경우, 긍정과 부정은 각각 67.8%와 22.7%였다.

대선 후 당을 이끌었던 손학규 대표의 경우 잘하고 있다가 29.1%, 잘못하고 있다가 31.1%였다. 당 지지층을 대상으로 하면, 각각 47.5%와 27.9%로 나타났다. 이처럼 정 대표의 리더십은 기대 이하였다. 재․보궐 선거에서 수도권에서 1석 건지긴 했지만, 텃밭인 전주에서 2석 모두 내줬다. DJ까지 선거에 동원했다는 비판도 들어야 했다. 노 전 대통령 서거 국면을 거치면서 당의 지지도는 올라갔지만, 정 대표의 리더십은 오히려 흔들렸다. DJ가 전면에 나서고, 친노 세력이 부상했다.

여당의 미디어법 날치기를 앞두고 정 대표는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여론의 반응은 좋았다.  KSOI 조사에서 49.0%가 야당 대표로서 여당의 강행처리를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받아들였다. 정치인으로서 단식농성을 하는 것은 바람직스럽지 못하다는 대답은 40.3%였다. 단식은 극한 수단이다. 과연 야당 대표가 쓸 만한 카드냐 하는 회의론도 적지 않다. 따라서 이 정도의 여론 수치는 국민들이 정 대표의 단식농성에 제법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한다.

정 대표는 지난 4.29 재·보궐 선거에서 당의 대선 후보를 지낸 정동영 전 장관을 공천하지 않았다. 일반 국민에서는 공천 불가 여론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민주당 지지층에서는 공천을 해야 한다는 여론 비율이 더 높았다. 그럼에도 정 대표는 끝까지 버텼다. 상당한 모험이었다. 모험은 실패로 끝나는 듯했다. 정동영 전 장관이 신건 후보와 동반 당선되자 정 대표는 수세에 몰렸다. 하지만 이 때 노 전 대통령 서거 국면이 터졌다. 정동영 변수는 거의 완벽하게 주변화 됐고, 정 대표는 수세에서 벗어났다.

정 대표,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아야

정동영 전 장관의 모르쇠 행보도 정 대표를 도와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의 대선 후보를 지낸 사람이 탈당해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은 당연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것은 당선만으로 덮을 수 없는 부담이고 책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전 장관은 이런 점을 의식하지 않았다. 그는 사과했어야 했다. 그리고 봉하마을에 눌러앉아 상주를 자처하면서 신원했어야 했다. 지난 대선에서 MB와 맞붙었던 당사자로서 누구보다 거칠게 투쟁했어야 했다. 단식도, 의원직 사퇴도 불사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정 전 장관을 제외하더라도, 현재 민주당 안팎에서 정 대표에게 도전할만한 정치인들은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발이 무겁다. 예컨대, 손학규 전 대표는 방통위원을 잘못 인선해 막대한 손실을 초래했다는 멍에를 짊어지고 있다. 치열한 도전이 없다는 점도 정 대표가 누리는 행운이다. 그러나 이런 점들은 모두 상황변수일 뿐이다. 그의 성패는 무엇보다 자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특히 정 대표는 자신의 당 대표직과 민주당을 기득권화하지 않아야 한다. 지금의 민주당은 아직 총본산이 아니다. 창 밖에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들어오도록 문호를 열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당을 리모델링하고, 리더십을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필요하면 지금의 지도부는 2선 후퇴해야 한다. 사회적 약자와 경제적 열패자의 요구를 온전하게 정책으로 담아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표의 독주와 민주당의 침체, 이것이 지난 대선․총선을 거치면서 형성된 정치구도다. 이것이 지금 무너져 내리고 있다. 더불어 차기경쟁 또한 오픈 레이스(open race)가 되고 있다. 새로운 대장정이 지금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정세균#MB#정동영#이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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