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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하하. 네. 많이 드십시오."

"변변치 않습니다. 많이 드십시오."

"아. 네. 하하. 많이 드십시오."

 

평화봉사단원 출신인 스티븐스 주한미국 대사의 초청을 받아 대사관저에서 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에서 40년도 더 된 기억을 더듬으며 잊었던 언어를 끄집어내려고 애쓰던 이들은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활동했던 이들이다.

 

이미 백발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50여 명의 전직 미국 평화봉사단원들과 그 가족들을 만난 자리에서, 식사 시간이라 그런지 몰라도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라는 인사였다.

스티븐스 주한미대사 스티븐스 대사는 평화봉사단원으로 예산에서 활동한 바 있다.
스티븐스 주한미대사스티븐스 대사는 평화봉사단원으로 예산에서 활동한 바 있다. ⓒ 고기복

 

이들은 뷔페를 앞에 두고 너나없이 인사하기를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저 한 사람에게 지나가는 말로 들었다면 그저 한국어를 좀 하는 외국인이 식사 전에 인사하는구나 하고 생각했겠지만, 한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고 테이블에 앉은 사람마다 또박또박한 말투로 그런 인사를 하는 데는 달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 한국어 실력이 좀 낫다 싶은 사람은 표현을 달리하여 "변변치 않습니다, 많이 드십시오"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뷔페를 앞에 두고 하는 체면치례 인사치고는 다들 너무 정중하고 진지하였다. 그래서 생각해 봤다. 왜 이들이 이런 인사를 하는 걸까? 우리나라 사람들의 괜한 체면치례 인사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그들이 활동했던 그 시절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참 먹고살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손님을 모셔놓고도 변변하게 대접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식사를 할 때면 집주인은 응당 "변변치 않습니다, 많이 드십시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라는 인사를 손님에게 했을 것이다.

 

차린 음식도 변변치 않고, 입에 잘 맞지도 않았을 음식을 앞에 두고 미국평화봉사단원들이 매번 들었을 그 인사는, 그들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인사가 차린 음식이 부실해서가 아니라, 식사 때면 당연 그렇게 인사하는 게 예의인 줄로 알고 배웠기 때문에 뷔페식으로 차려진 밥상 앞에서도 그런 식으로 인사를 나눠야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시절엔 다들 그렇게 인사를 했던 것이다. 얼마나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면 4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또록또록 기억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자 순간 마음이 짠해졌다.

 

미국에서 편하게 지낼 수도 있었을 텐데, 젊어서 사서 고생했던 그들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갖고 있던 나에게 그들은 40여 년 전 봉사활동을 통해 더 많은 것을 얻었다며 오히려 대한민국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감사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했다.

 

파울라 렌즈 여사 그녀는 평화봉사단원 활동을 통해 자신이 성숙하게 변화됐다고 고백했다.
파울라 렌즈 여사그녀는 평화봉사단원 활동을 통해 자신이 성숙하게 변화됐다고 고백했다. ⓒ 고기복

 

"제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저는 세상(대한민국)을 구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세상이 저를 구했어요. 저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세상이 저를 변화시켰어요. 세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한국에서의 봉사활동은 저를 성숙하게 변화시키는 경험이었어요."

 

1967년부터 68년까지 미국 평화봉사단원으로 한국에서 봉사를 했던 파올라 렌즈 여사의 고백이다. 낮은 목소리로 차분하게 40년도 더 된 기억을 회상하던 그녀는 한 손을 가슴에 대고 잠시 숨을 고르며 어떠한 감동이 몰려오는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파올라 렌즈는 그때만 해도 낙후된 촌이었던 경기도 가평에서 보건 분야 봉사활동을 했다. 2년간의 봉사활동 중에 가장 힘들었던 점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자신의 가족사를 먼저 이야기했다. 그녀는 9남매나 되는 대가족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형제가 많은 집이 늘 그렇듯이 가족간의 우애가 남달랐던 그녀에게 가장 힘든 일은 무엇보다도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그리움과 외로움이 사무칠 때마다 한 일은 냄새가 풀풀 나는 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수세식 화장실만 사용하던 20대 초반의 젊은 아가씨가 냄새가 풀풀 나는 푸세식 화장실 청소를 하며 향수를 달랬다는 것이다. 2년간 외로움과 문화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매진하며 파울라 렌즈는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녀와 대화하며 봉사라는 것이 일방적으로 누군가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서로 나누고 함께 하는 것임을 새삼 느꼈다.

덧붙이는 글 | 미대사관저 방문은 7월 10일에 있었다. 기자는 (사)한국해외봉사단원연합회 이사장 자격으로 초청받아 참석했다. 


#평화봉사단원#한국해외봉사단원#스티븐스 미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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