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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삼봉 형!

요즘 들어 산다는 게 무엇인가? 지금 내가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부쩍 합니다. 오늘 아침 아내와 구봉산엘 올라 정상 들머리에 섰는데, 바람에 안개가 스멀스멀 몰려오더니 거의 앞으로 보지 못할 정도로 자욱하더군요. 갑자기 기분이 묘해지더라고요. 또 내려올 때는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불어서 우산을 가지고 갔지만 우산을 쓰나 마나였지요. 높지도 않은 동네 산엘 올라갔는데도 아무 것도 장담할 수 없더군요.

 아내와 함께 구봉산에서.
아내와 함께 구봉산에서. ⓒ 박철

아내와 결혼한 지 제법 오래 되었네요. 아내가 시집올 때 가지고 온 장롱은 이사 몇 번 다니느라 문짝이고 서랍이고, 맞는 게 하나도 없을 정도로 몰골이 말이 아니네요. 경기도 화성 남양으로 두 번째 임지로 갔을 땐 천정이 낮아서 장롱을 세울 수가 없어 톱으로 장롱 양쪽 귀를 20센티 잘랐지요. 그 흔적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냉장고는 지금 대학교 1학년생인 우리집 둘째 의빈이 출생 기념으로 산 것인데 20년이 되었지요. 냉동고는 그런 대로 작동을 하는데 아래 냉장기능은 제대로 작동을 안 해서 음식을 넣어두면 이틀이면 곰팡이가 슬지요.

세탁기도 강화 교동에 있을 때 장모님이 사 주신 것인데 아마 10년은 훨씬 넘은 것 같습니다. 수명을 다해가고 있지요. 바닥이 부식해서 푹 주저앉았고, 돌아가긴 돌아가는데 완전 탱크 지나가는 소리를 내고 있지요. 처음엔 놀랐는데 지금은 만성이 되어서 그런지 크게 신경을 안 쓰고 있지요.

텔레비전은 부산에 와서 산 것인데 햇수로 5년밖에 안 되었는데 소리가 나왔다, 안 나왔다 자기 마음대로이지요. 연속극을 보다가 결정적인 순간 소리가 안 나오면 아내는 자기가 대본이라도 쓴 사람처럼 대강 뜻을 맞춰서 설명해주곤 하지요.

소파는 인조 가죽으로 된 걸 샀는데 하도 사람들이 앉아서 그런지, 인조가죽도 다 찢어지고 도저히 사람이 앉을 수 없을 정도로 망가졌네요. 이것저것 살펴보니 온전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길에 내다 버려도 안 가져갈 고물짝을 끌어안고 살면서도 아내가 불평 한마디 없는 걸 보면 아마 정이 많이 들었나 봅니다.

어제는 오랜만에 냉면집에 가서 냉면을 먹고 오다가 아내가 잠깐 가전제품 매장에 들러보자고 해서 들렸는데 가격표를 보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가자고 하더군요.

언제인가 아내가 외출하면서 저녁에 옥상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어달라고 부탁을 해서 빨래를 걷으러 옥상에 올라갔는데 빨래를 보는 순간 마음이 참 아팠습니다. 아내의 속옷 중에 성한 것이 하나도 없더군요. 거의 걸레 수준의 속옷을 버리지 못하고 입고 있었던 겁니다.

아내와 결혼한 지 25년이 지나는 동안, 내가 아내에게 사 준 옷이란 게 22년 전, 우리 집 큰 녀석을 가졌을 때 지하철 상가에서 임산복 한 벌 사준 것이 전부였지요. 그 흔한 가방 하나 구두 하나 사준 적이 없습니다.

오늘 아침 비를 맞으며 산에서 내려오는 길, 아내가 저 보고 그러더군요.

"당신, 나 잘 만난 줄 알아요. 아들 둘에 딸 하나 낳아서 건강하고 착하게 잘 키워줬지. 시어머니한테 잘 한다고 칭찬받는 며느리지. 훌륭한 장모님과 처남을 만나게 해주었지. 무엇보다 가난한 목사 만나서 아무 군소리 안 하고 지금껏 살아주었지, 안 그래요? 당신, 진짜 나 잘 만난 줄 알고 감사해야 해!"

삼봉 형! 막상 산다는 것이 내 의지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또 내 의지대로 된다고 해서 꼭 좋은 것만도 아니고, 때론 멀쩡한 것 같지만, 겉만 그렇지 속은 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닐까요? 그저 적당하게 체념하기도 하고, 또 적당하게 포장하기도 하고 그렇게 사는가 봅니다. 삼봉 형이나 저나 아내 잘 만나 덕분에 이만큼이라도 사는 것 같습니다.

삼봉 형! 문경새재 움막이 그립습니다. 올 여름 행사 끝나고 햇사과가 빨갛게 익어 갈 무렵 꼭 달려가겠습니다. 군불 땐 움막 온돌방에서 등짝이라도 지져야겠습니다. 그리고 지나간 옛이야기 보따리를 풀고 여자들처럼 수다라도 떨어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건강하십시오.

(2009년 7월 15일 부산에서 박철 드림)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당당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내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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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기자는 부산 샘터교회 원로목사. 부산 예수살기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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