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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초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3월 실시된 일제고사 진단평가 결과 부진아로 판명된 아이들을 위한 보정 교육 자료를 내보냈다. 일명 '교과학습 부진학생 교정을 위한 보정자료'. 뭔가 다른 게 있을까 싶어서 영어 교과 보정 자료를 우선 살펴보았다. 자료를 쭉 살펴보면서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아니, 이 사람들이 학교에서 초등 영어 부진아를 한번 만나보기라도 한 것인가?'이다.

지난 4년간 강북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영어 교과 전담 교사로 아이들을 지도하면서 왜 이 아이들이 부진아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는지를 수없이 고민했던 나는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영어 부진아 정책이 왜 실효성 없는 삽질 정책인지 얘기하려고 한다.

지난 해 여름 방학, 6학년 영어 교과 전담 교사였던 나는 6학년 담임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아 각 학급에서 영어 단어를 읽고 쓰는 것을 어려워하는 아이들 20명 정도를 추천받고 아이들을 만나러 다녔다. '지금 영어 단어 읽고 쓰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나중에 배우기는 더 어려울 수 있으니까, 이번 여름 방학때 한 번 배워보자'는 것이다. 몇몇 아이들은 영어에 관심이 없으니 안 배워도 괜찮다고 했지만, 대다수 아이들은 절실함을 느꼈는지 함께 하기로 했다. 여름 방학 2주 동안 오전에 학교에 나와 2시간은 나와 함께 기본적인 음철법을 배우면서 영어 동시를 외웠고, 나머지 2시간은 원어민과 함께 영어 회화를 배웠다. 결과는, 힘들다는 것이다.

6학년 C양, 그림을 참 잘 그린다. 반 아이들도 모두 인정하고, 담임 선생님도 인정한다. 그림 때문에 아이들한테 인기도 많다. '화가'가 되고 싶어서 미술학원 다니고 싶지만 엄마가 돈 없어서 못 보내주고, '화가'는 가난한 직업이니까 안 된다고 해서 미술에 대한 꿈은 포기했다. 하지만, 틈만 나면 그림을 그린다. 글을 읽고 쓰는 문해력도 전혀 뒤지지 않는다. 국어, 사회, 과학 같은 교과 성취도는 높다. 그런데 영어는 짧은 단어조차 읽지 못한다. 왜? 사교육을 못 받았으니까=학교 영어 시간 외에 영어 공부를 할 기회도, 그럴 형편도 안되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졸라도 미술학원 보내지 못하는 형편이니 영어 학원은 한 번도 다녀본 적이 없다.

3․4학년 영어 시간은 일주일에 한 시간,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림 카드 갖고 게임하고 노래 부르다 보면 훌딱 지나간다. 영어 단어라는 게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도, 이걸 왜 이렇게 읽는지도 모르고, 그냥 알파벳 읽기를 해야 한다니까 그걸 수업 시간에 조금 읽다 지나갔다. 5학년이 되었다. 단어를 읽어야 한단다. Thursday, Saturday, straight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런 단어를 읽어야 한다고 한다. 그냥 포기했다. 일년 동안 배운 회화는 대충 들으면 무슨 말인지 알지만 말로는 못한다. 단어 읽는 것은 아예 못한다. 6학년, 이제 문장을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단다. 포기했다. 그렇게 C양은 영어 부진아가 되었다.

여름 방학 2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영어 캠프에 참여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더듬 더듬 영어 단어를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원리'를 깨우친 것이다. 남은 여름 방학 동안도 열심히 공부해 보라고 격려했다. 2학기가 되었다. 영어 시간 조금 자신감이 생겼지만, 아이들은 문장을 술술 쓰고, 과거형이나 비교급이니 이런 문법 용어를 술술 얘기한다. 영어, 다시 포기했다.

6학년 H군, 쌍둥이 형제이다. 복잡한 가정 사정으로 어려서부터 전학을 많이 다녔다. 이 학교에서 저 학교, 어떤 때는 전학간 지 몇 달만에 다시 우리 학교로 전학 온 경우도 있었다. 학교에서 이 형제는 웬만한 선생님들이 다 알 정도로 유명하다. 자기가 관심 있는 일에는 무척 적극적이며 쾌활하다. 하지만 수업 태도며 생활 태도는 영 아니다. 준비물, 숙제 제대로 챙겨서 해 오는 적이 별로 없다.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수유영어마을 4박5일 영어캠프에도 몇 차례나 다녀왔다. 그런데도 6학년이 되도록 영어 알파벳도 제대로 모른다.(MB가 시작한 영어마을이라는 사업의 허구성은 학교 현장에서 이렇게 드러난다.)

이 아이들도 지난 여름방학 영어 캠프에 함께 했다. 그런데 생활이 안 되니 늦잠 자고, 늦잠 자면 나오기 싫고, 그러다보면 더 재미있는 다른 일들이 생각나고, 그래서 출석률이 저조했다. 아빠의 손전화는 있지만, 집 전화가 없어서 집으로 전화를 해서 깨워 줄 수도 없다.

그러나 누가 이 아이들을 탓할 것인가? 성실하지 못하다고, 그렇게 의지가 없어서 어떻게 인생 살겠냐고 훈계할 수 있는 사람 있나? 모두 우리의 잘못인 것을. 이 아이들은 한 번도 왜 배우는 삶이 소중하며 가치 있는 것인지를 배워본 적이 없는 것이다. 말초적 흥미 이상의 것을 경험한 적이 없는 것이다. 진정으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하는지 고민할 계기도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 영어 단어 읽고 쓰는 것은 소 귀의 경 읽기다. 지금 그 아이들에게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영어 교육 관련 토론회장에서 만났던 청소년 인권 활동가 D군, 여러 청중 앞에서 자신의 영어 공부 족적을 스스럼 없이 밝혔다. 초등학교 3학년, 그 반에 영어를 너무 잘하는 아이가 있어서 주눅 들고 자신은 하나도 못 알아듣는데 그 친구는 더 어려운 것을 말하고 있기에, 자신은 해도 안해도 똑같다는 생각에 영어가 싫어졌단다. 매 시간 게임하고 노래하는데 그게 정말 재미없고, 안하면 안한다고 뭐라 해서 더 싫어졌단다. 그렇게 초등학교를 마치고 청소년의 인권에 대해 눈을 뜨게 되면서 다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단다. 목적은 단 하나, 국제 청소년 영문 인권 선언문을 내 스스로 읽고 번역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란다.

지금까지 예를 들었던 C양, H군, D군, 지금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들에게 인생은 무한한 가능성이다. 그런데 그 가능성을 무한 봉쇄시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부진아'라는 낙인 아닐까? 모든 교과 중에서, 특히 영어는 그 아이의 사회 문화 경제적 배경에 절대적인 지배를 받는다.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애써 감춰두고 아이의 성실성의 문제인 양, 교사들의 무책임한 교육 때문인 양 호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교과학습 부진학생 교정을 위한 보정자료'를 집필하신, 많이 배우신 선생님들은 이런 아이들을 현장에 만나 보셨나요? 그 아이들에게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셨나요? 왜 영어 부진아가 만들어지는지 생각해 보셨나요? 지금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을 떠나 아주 낮은 곳으로 오셔서 한 번 만나보세요.


#영어 부진아#일제고사#보정교육자료#교과부#사회안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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