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말, 봉하마을에 다녀왔다. 지난해 8월 대통령을 만나 뵙기 위해 처음 찾았던 기억이 떠 올랐다. 날씨가 너무 더워서 나중에 선선해지면 다시 와야지 했었는데 그 두 번째 방문을 조문으로 오게 될 줄이야.
봉하마을 진입로에 들어서자 소나무 숲 사이로 소나무 만큼 들어서 있는 현수막을 보는 순간, 다시 목이 '탁' 하고 막혀왔다. 봉하마을은 아직도 상중이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다. 정토원에 올랐다가 다시 사저로 내려와 분향소에서 분향을 했다.
복분자를 재배하는 하우스 옆길을 지나며 딸내미가 한 마디 한다.
"엄마 우리 작년에 여기서 앉아 있었잖아 그치?"그랬었다. 여기 앉아 복분자를 보며 이게 복분자가 맞나 안 맞나. 저 앞에 보이는 저 바위는 왜 저렇게 큰지, 이 산엔 웬 바위들이 저렇게 많은지, 여기 보초 서는 저 전경은 서울에 있는 전경들에 비하면 낙원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라며 대통령이 나올 때를 기다리면서 두시간 가까이를 앉아서 그런 저런 수다를 떨었더랬다.
내 딸아이도 기억이 날 정도니 그렇게 오래된 일은 아니었는데, 그 새 이곳은 노란 리본이 팔랑거리는 그리고 떠나간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곳이 되고 말았다.
노무현 서거 한 달, 일상이 달라졌다서거 한 달이 지났다. 서거 후 얼마 동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각종 포털 사이트에 마련된 추모게시판에도 아무 글을 남길 수 없었고, 내가 가지고 있는 미니홈피, 블로그, 내가 가입한 카페… 그 어느 곳에도 대통령의 죽음과 관련된 글들을 적을 수가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우는 것 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추 보름을 보내고 난 뒤, 닫혔던 내 미니홈피에 '난 노무현을 지독하게 좋아했던 사람 중 하나'였음을 알리는 것을 시작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불치병에 걸렸다가 다시 새 생명을 얻은 기분이 이럴까? 생각하면서.
머릿속에 '우공이산('어리석은 영감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쉬지 않고 꾸준하게 한 가지 일만 열심히 하면 마침내 큰 일을 이룰 수 있음을 비유한 말. 네이버 백과사전 참고)'이란 고사가 떠올랐다. 노통께서도 여기서 힌트를 얻어 '노공이산'이라 했다 했는데, 참 좋은 말이다. 대통령을 죽게 만든 이 사회의 악들을 내몰기 위해서 난 우공이산이 가지고 있는 철학을 따라가기로 했다. 하나하나 하면서 끝까지 하는. 맘을 그렇게 먹으니 참 할 일이 많았다.
예전엔 인터넷을 해도 댓글 한 번 달지 않았던 나였는데, 요새는 여기저기 댓글 달러 다니느라 바쁘다. 피디수첩 게시판에 가서 격려도 해야되고, 정치포털 서프라이즈에 가서 서명도 해야되고 꼭 가야될 곳을 누군가 링크 걸어놓으면 어김없이 비집고 들어가 항의 댓글을 단다던지, 아무튼 하루에 최소한 한번씩은 뭔가 표현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잘한 사람에겐 잘하라고, 못된 놈들에겐 그만두라고.
또 일하는데 필요한 자료수집 차원에서 만든 개인블로그에 '오늘의 대한민국'이란 주제로 글을 올리고 있다. 나도 나중에 기억이 노쇠해지면 이곳을 보리라. 하루에 몇 명에 불과한 방문자들이지만, 그들에게라도 보여주기 위해 유시민의 시를 퍼오거나, 딴지일보의 정말 재미있는 시국선언문을 옮겨 놓거나, 피디수첩 김은희 작가가 심경을 토로한 기사를 옮겨 놓는다. 적극적으로 알리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한 행동들이다. 모르고 사는 게 미덕이 아닌 요즘이다.
어린이집 엄마들과 정치수다 떨게 될 줄이야뿐인가. 유시민의 시민광장에 가입하고 cms자동이체를 신청했다. 한 달에 만원. 별 거 아닌 돈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집은 저소득 가정이다. 저소득 3층. 정치인 혹은 정치를 했던 사람에게 돈을 내보는 건 노무현 대통령 때 저금통 모아본 이후 처음인 것 같다. 또 지역모임 있을 때마다 참석하기 위해 혹시 오늘 번개 없나 하며 돌아다니기도 한다.
집에서 남편과 나누는 대화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자기네 회사에 <조선일보> 본다는 그 사람 <조선일보> 끊었대?""아니 아직 못 끊었나봐. 작년에 끊었다고 했는데 내가 싫어하니까 거짓말 한 거래.""그래? 뭐 그딴 게 다 있어. 당장 만나지마!!""아냐, 그래도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야.""그러면 자기가 올 1년 안에 끊는다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좀 해봐. 자기나 나나 우리가 할수 있는 게 그런 거 밖에 더 있겠냐." 어린이집 엄마들과의 수다 주제도 바뀌었다. 예전엔 진짜 '정치'만 빼고 다 이야기했는데, 요샌 정치 이야기를 제일 먼저 한다. 전혀 정치와 무관하게 사는 듯한 엄마들도 다 나름대로의 정견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서거 이후 첨 알게 된 사실이다.
모두들 '커밍아웃'을 한 것이다. 그러고 나니 표현들도 참 솔직해졌다.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라고 시키면 80년대 운동권 노래들을 부르지를 않나. 한 엄마는 중학교 교사인데, 금요일날 "나 시국선언 했는데 잘리는 거 아냐?" 하면서 들어오더라. 거기서 우린 또 대꾸한다.
"그럼 우리가 또 자기네 학교로 촛불들고 가야 되는 거야? 아~~놔 이거." 별일 없이 살란다, 그게 내 무기다'다이내믹' 코리아에서 정치적 주제가 얼마나 나날이 새로운지, 엄마들의 수다는 무궁무진하다. 그 과정에서 신문얘기, 방송얘기, 4대강 이야기.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 없는 이야기들이 오간다. 메신저로 대화하는 일부 엄마들과는 매일 기사를 서로 퍼주고 받고, 성토하고.
"이 기사 봤어요? 이것들 진짜 미친 거 아냐?" "대한뉴스 나온대잖아." "어디서? 진짜? 진-------짜?" "우리 어린이집에서 부모들 참여하는 소모임 만들라고 자꾸 그러는데 정세토론 하는 거 하나 만들면 어때?" "누가 올라나?" "일단 우리끼리라도 하믄 되지 뭐." "어제 어떤사람 면접보러 왔었는데 NO 했어." "왜요? "이명박 좋아하는 거 같아. 말하는 게. 하나님얘기만 하고, 대한민국 얘기만 하고." "잘했네." "난 내가 그들에게 차별받으며 살고 있으니까 나도 역차별 할거야. 명박이와 한나라당 좋아하는 것들에게." 적어도 다음 선거때 까지는 이 분위기로 몰고 가련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것들은 늘 있는 일이었다. 아주 극소수였지만, 내가 아는 사람들과는 매일 이런 식의 대화를 했는데 이젠 그런 대화의 장을 이곳저곳으로 넓히고자 한다.
서거 이후 대통령의 죽음 만큼 컸던 충격은 '나는 과연 뭘 하고 살았던 걸까?'라는, 나 자신에 대해 드는 회의였다. 그 회의가 지금은 '나는 과연 무엇을 할까?'로 시제가 바뀌었다. 나는 과연 무엇을 할까?
별 거 안 할란다. 지금처럼 그렇게 살란다. 보고, 듣고, 느끼고,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그 모든 것들은 나 혼자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남들과 얘기하고 나눈다는 것. 난 그거 하나만 하면서 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