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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이 글은 한국에서 (범)진보세력이 어떻게 소생할 수 있는가에 관해 나름대로 심사숙고해 본 것입니다. 그 대안적 방법의 하나로 '정치연합'을 창조적으로 궁리해보고자 정리해 봤습니다.

 

먼저 '(범)진보세력'이 무엇을 뜻하는지 잠깐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흔히 '진보'라는 용어는 그것이 사용되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 뜻이 다르고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마다 뜻이 제각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글에서 진보란 무엇인가, 혹은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관해 논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범)진보세력은 한국 정치사에서 권위주의·보수주의 세력에 대립하면서 성장·분화해 온 여러 갈래의 세력 전체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서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국의 (범)보수세력에 대한 상대적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이러한 용법은 미국 정치에서 Republicans / Democrats의 구분과 유사하다로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범)진보세력은 한국 정치체제의 변동과정에서 꾸준히 민주적 변화를 추구해 온 세력을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서 쓸 것입니다. 조금 구체화하면 현재의 민주당,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과 이의 적극적 지지층, 그리고 한국 민중운동 및 시민운동의 주요 단체들을 망라합니다.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도 물론 포함되겠네요. 그래서 (범)진보세력은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민주화 세력'이라고 바꿔 표현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뜻의 (범)진보세력을 논의의 중심 대상으로 설정한다는 것은 한국의 정치적 역학구도를 진보와 보수로 잡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구도를 잡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진보 / 보수의 양자 구도가 아니라 진보 / 중도 / 보수의 삼자 구도로써 한국 정치를 바라봅니다. 이 경우 단순화하자면, 진보세력은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중도세력(혹은 중도 자유주의세력)은 지금의 민주당(이에 더해 창조한국당)을, 보수세력은 한나라당과 자유선진당을 꼽게 됩니다. 이러한 삼자 구도의 설정이 어쩌면 한국의 정치현실을 보다 정확하게 반영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정도는 이 점을 분명히 수긍합니다. 민주당과 진보적 정당들 사이에는 정치적 이념과 비전,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구성성분, 정치문화 등에서 일정한 차이, 쉽게 해소될 수 없는 차이가 있음은 분명하지요. 실제로 민주당과 진보적 정당들은 전혀 서로를 동류로 인식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래도 진보와 보수 양자 구도로 한국 정치를 보고자 합니다. 무엇보다 - 여태까지도 그랬지만 - 현재 삼자의 정립이 매우 불완전하고 불확정적이기 때문입니다. 명목이 아닌 실질을 놓고 볼 때, 앞으로 얼마든지 양자 구도로 회귀할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반대로 더 갈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 가능성은 상존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한국의 보수세력은 상대적으로 보다 안정적인 편입니다. 하지만 민주당과 진보적 정당들은 상대적으로 매우 유동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민주당은, 물론 호남이라는 지역 기반과 정치 기득권 덕분에 진보적 정당들보다는 그 존속의 여지가 더 넓은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래도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새로운 미래가치를 창조하지 못하고 계속 현상유지 수준에서 안주하다가는 제1야당에서 정말 군소 지역정당으로 추락해버릴 수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진보적 정당들은 더 심한 유동적 상태에 있습니다. 그 후유증이 결코 가볍지 않은 결정적인 갈라섬 - 그것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 을 이미 한번 겪었습니다. 무엇보다 국민 일반의 안목에서 진보적 정당들은 수권 가능한 정치세력으로서의 존재감을 아직 획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보적 정당들에게는 정치적으로 가장 곤혹스런 문제입니다.

 

이렇듯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보수세력, 불신의 늪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하는 중도세력, 존재감 부족으로 줄곧 주변부에서 맴도는 진보적 정당들, 이를 두고 어떻게 삼자 구도를 온전히 그려낼 수 있겠습니까. 이는 흔히 말하듯 양당체계도 아닌 1.5 정당체계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아무리 민심을 거스르더라도, 또 한나라당이 아무리 많은 실책을 저지르고 그 내부 분열이 잦아지더라도, 보수 우위의 1.5 정당체계는 적어도 다음 총선 때까지는 지속될 수밖에 없는 하나의 하드웨어입니다. 이 점을 꿰뚫어 본다면 한국 정치를 삼자 구도로써 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민주당과 진보적 정당들의 세를 다 합쳐도 0.5의 구실조차 하기 힘든 상태, 이런 심각한 불균형 상태는 정치를 정치가 아니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지금의 이 1.5 정당체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한국의 보수세력이 갈라짐으로써 전체적으로 힘의 불균형이 완화되고 권력게임의 양상이 다원화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범)진보세력이 소생하고 재구축됨으로써 보수 우위의 현상태를 변경하는 것입니다. 저의 논의는 후자의 견지에서 (범)진보세력이 어떻게 소생할 수 있는가에 목적을 두고 있는 것이죠. 

 

민주당을 중도 자유주의 정당으로, 진보적 정당들을 진보주의 정당 혹은 좌파정당으로 규정하는 것은 실상 그 절반쯤은 참이 아닙니다. 지금 진보적 정당들이 한국 정치의 시공간적 특수성에 알맞은 진보주의를 확립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민주당이 자주 내세우곤 하는 '중도개혁'이 보수주의나 진보주의와 뚜렷이 구별되는 비전이나 정책노선으로 확립됐느냐 하면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중도 개념은 최근 들어서는 '온건'이나 '절충', 심지어 보수로의 접근을 뜻했습니다.

 

한국의 보수주의가 영국이나 미국 등지에서의 보수주의와는 현격히 다른 역사성을 띠고 있고 덜 여물었듯이, 한국의 진보주의 역시 서구와는 다른 토양 속에서 그 싹이 틔워졌고 새롭게 구성되는 과정에 있습니다. 때문에 (범)진보세력의 재구축 논의는 한국 정치의 역학을 가급적 양자 구도로써 보겠다는 설정과 동시에 한국의 진보주의가 한국의 보수주의와 대립하는 상대적이고 포괄적인 비전이자 경향성으로서 새롭게 구성돼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부연하자면 한국의 진보주의는 민주당과 진보적 정당들의 상호작용, 나아가 혁신적 융합에 의해 새롭게 구성돼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이 글에서 논하고자 하는 '정치연합'은 이런 맥락에 닿아 있습니다.

 

서설이 좀 길어졌습니다만, 이쯤에서 한 가지만 더 보탤까 합니다. 한국 정치를 진보와 보수의 양자 구도로 본다면, 이 진보와 보수가 앞으로 어떤 관계에 들어서야 한국 정치가 보다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

 

진보와 보수 간의 갈등과 대립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서로 다른 세계관과 정치적 비전 사이의 부딪힘과 다툼입니다. 그 갈등과 대립의 일정한 매듭은 다양한 변주가 있겠지만,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완전히 제거하는 사태는 일어나기 힘들 것입니다. 정치현실에서 일시적으로야 그런 사태가 빚어질 수도 있겠지만 진보와 보수의 관계가 또 어떤 형태로든지 재생될 것입니다. 때문에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의 존재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인간의 정치생활 자체를 부정하는 하나의 억단입니다.

 

그래서 진보와 보수의 합리적 경쟁과 공존을 흔히들 기대합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것이죠.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다음 두 가지 중요한 주장을 만나게 됩니다.

 

첫째, '사회적 대타협론'입니다. 이는 서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다양한 형태로 창안되고 실행된 사회협약 모델을 우리나라에도 응용해보자는 주장입니다. 한때 지대한 관심과 많은 의논을 불러일으켰는데, 지금은 다소 잠잠해진 듯한 느낌입니다. 실제로는 우리나라에서도 노·사·정 합의나 범국민 사회협약의 형태로 간헐적이나마 구현된 바 있으니 아예 사그라진 논의는 아니고 앞으로도 꾸준히 검토돼야 할 문제입니다만, 사회적 대타협론이 한국에서 아직은 적극적으로 실현될 수 없는 까닭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 간의 힘의 현저한 불균형 때문입니다. 좀 더 정확히는 한국 보수세력의 협량과 단견 때문입니다.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역사적 공동체에서 공화적 전통과 역량이 매우 미약하기 때문입니다. 한국 보수세력은 너무 과도하게 자신들의 기득권 수호에 매달리는 특성을 보여 왔습니다. 지난 정부와 현 정부의 시기에 보수세력의 행태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놀라울 정도로 그러합니다. 한국 보수세력의 지나친 탐욕은 적절한 양보와 타협을 통한 공동체의 안정이 자신들에게 보다 큰 이익이 된다는 안목을 철저히 막아버립니다. 그러니까 사회적 대타협이라는 형태의 진보-보수 간 공존시스템이 한국에서 갖춰지려면 어쩔 수 없이 한국 (범)진보세력이 보다 강건해져 힘의 균형, 아니 힘의 우위를 달성함으로써 보수세력을 길들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봅니다. 또 그 과정에서 한국의 진보세력과 보수세력 공히 공화적 전통과 역량을 세우고 배양해야 합니다.

 

둘째, 성찰적 진보와 합리적 보수가 결합해 극단주의를 배격함으로써 중도세력을 형성하자는 주장입니다. 그 가운데 매우 권위 있는 하나의 주장을 인용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존의 잣대에 얽매임이 없이, 성찰하는 진보와 합리적 보수가 만남으로써 폭넓고도 줏대 있는 중도세력을 형성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예컨대 민주주의 문제에서는 분단체제가 남한의 독자적 민주화에 부과하는 한계를 인정하고 남북화해의 진전과 결부된 현실적인 개혁노선에 합의하며, 민생문제에서도 자본주의 세계체제 및 그 하위범주로서의 분단체제가 떠안은 조건을 일단 수용함으로써 세계시장으로 열린 한반도경제권의 건설과 남한경제의 발전을 도모할 새로운 종합적 설계를 짜야 합니다. 이는 남북관계의 발전 역시 합리적 보수와 성찰적 진보가 동의할 수 있는 내용으로 채워진다는 뜻이 되겠지요. 물론 이런 중도세력 사이에도 견해차와 갈등이 있을 테지만, 어디까지나 변혁적 중도주의라는 큰 틀에 동의하는 세력 내부의 생산적인 갈등이요 차이로 작용할 것입니다." (백낙청, "2009년 분단 현실의 한 성찰," 프레시안 2009.4.16.)

 

앞의 사회적 대타협론이 진보와 보수의 실체적 구별을 인정하고서 그 공존질서를 창안해 보려는 논의라면, 여기의 변혁적 중도세력 형성론은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더 큰 목적을 위해 진보와 보수의 구별을 넘어선 제3의 정치질서를 추구하는 논의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심정적으로는 아주 수긍이 가는 얘기지만, 냉정하게 보면 우리의 정치현실은 그와 정반대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좀 과도하게 말하면 지금 한국에는 성찰적 진보도 합리적 보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개인 차원에서는 몰라도 집단 차원에서는 정말 그렇습니다. 사회적 대타협이 적극적으로 구현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유로 한국에서 합리적 보수집단의 형성은 당분간 난망한 일입니다. 한나라당 내의 개혁성향 정치인들을 합리적 보수로 볼 수 있을까요? 민주당 내의 우파 성향 엘리트들을 합리적 보수로 볼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단언컨대 그들은 분단체제로 인한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며, 자신들의 정치적 사익과 한반도 전체의 공익을 결합시킬 수 있는 식견이 없습니다. 지금의 (범)진보세력이 개명되어 성찰적 진보의 수준으로 오르면 그 다음에 변혁적 중도주의를 모색해 볼 수는 있겠지요. 한국에서 합리적 보수는 아마도 성찰적 진보의 산물일 것입니다. 성찰적 진보의 형성이 급선무라는 얘깁니다.

 

몇 가지 사고방식들에 대한 비판적 검토

 

한국의 (범)진보세력이 어떻게 소생할 수 있는가, 혹은 보수세력의 압도적 우위라는 현 상태를 어떻게 변경시킬 수 있는가에 관한 논의로 이제 한 발 들어가 보겠습니다. 선명한 형태로 제출되거나 다듬어지지는 않았지만 이 논의에 실마리를 제공하는 몇 가지 생각들이 나와 있습니다.

 

우선, 반MB투쟁을 열심히 하면 된다는 소박한 생각이 있습니다. 좀 더 나가면 반MB연합전선을 강력하게 구축하자는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이미 (다행히도?) 민심이 이명박 정부로부터 이반한 상황에서, 비록 제도적으로는 소수이긴 하지만 반MB투쟁을 잘 조직해나가면 다가오는 지방선거와 이후 총선에서 세를 회복할 수 있고 또 정권 탈환의 가능성을 열어갈 수 있다는 것이죠. 이른바 '선명야당론'도 비슷한 사고방식입니다. 이런 생각은 - 달리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 민주당과 진보적 정당들의 주류에 스며들어 있는 정서이기도 합니다.

 

얼핏 보면 이런 생각에 딱히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열심히 하자는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반MB투쟁을 힘 모아 줄기차게 잘 하는 것은 (범)진보세력의 재구축에서 필수적인 과정입니다. 하지만 좀 따져보면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반MB투쟁을 열심히 하자는 것은 기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은 것이고, 반MB연합전선은 구체적인 교섭과 실행계획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한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사고방식에는 '현상유지주의'라는 독소가 끼어들기 십상입니다. 스스로를 어떻게 변화시켜 달라진 환경에 능동적으로 작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왜 지난 실패에 대한 뼈를 깎는 반성이 없느냐, 근본적인 반성에서 출발해라, 반MB투쟁을 하더라도 좀 '창조적 반대'의 방안을 고민해라 등의 질책이 잇따르는 것입니다. 또한 반MB투쟁론, 선명야당론은 현재의 정치질서를 어떻게 재편할 수 있을까 하는 구조적 인식과 전망이 빈약하다는 점에서도 마땅히 재고돼야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전략적 사고가 없는 것이죠.

 

다음으로 '인물대망론'이 있습니다. 이는 이명박 정부의 날개 없는 추락에도 불구하고 (범)진보세력, 그 중에서도 특히 민주당의 세가 회복되지 않는 것은 결국 인물, 곧 (범)진보세력의 미래를 상징할 수 있는 얼굴이 없기 때문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정운찬이나 박원순 같은 분들을 영입해야 한다, 정치권 스스로 인물을 키워야 한다, 스타 발굴·육성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는 등의 방책을 내놓습니다. 지난 미국 대선의 바람이 한국에도 불면서 나타났던 '한국의 오바마'에 대한 소망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저는 지난 '신진보리포트 11'호의 <후기 - 오바마의 승리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글에서 "… 비범한 인물을 찾기 위해 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니는 대신, 변화의 정치를 위한 집합적 의지를 창출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필요하다 …"고 적었습니다.

 

너무나 복잡한, 하지만 어이없이 단순한 현대 대중정치에서 '인물'은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니까 인물대망론은 백날 투쟁이다 정책이다 그래봤자 그 모든 것을 상징할 수 있는 도구로서의 인물이 없으면 아무 소용없으므로 인물을 부상시키는 것이 (범)진보세력 재구축과 대선 승리의 관건이 된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왜 한나라당에는 박근혜 등 그야말로 인물이 다수 도드라져 있는데 반해 이쪽에서는 그렇지 못할까요? 그것은 인물을 키워내는 한나라당만의 무슨 비법이 있어서일까요? 여기서 좀 뜬금없이 요즘 제가 열심히 읽고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문명론의 개략>의 한 구절을 인용하고자 합니다.

 

"세상의 형세는 마치 증기선과 같고 세상의 일을 담당하는 사람은 항해사와 같다. … 항해사의 직분은 오직 그 증기기관의 힘을 방해하지 않고 운전 작업에 정성을 바치는 데 있을 따름이다. 만일 두 차례의 항해에 있어서 첫 항해사는 15일을 소비하고 두 번째 항해사는 10일 걸렸다고 하면, 이것은 후자가 능란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자가 서툴러서 증기의 힘을 방해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사람의 서툶에는 한이 없어서 그 증기기관으로 15일도 걸리고 20일도 걸릴 수 있을 것이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그 기관이 아예 작용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능란하다 하더라도 기관 그 자체에 없는 힘을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세상의 치란흥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 예부터 영웅호걸이 세상에서 큰일을 이루었다는 것은, 그 사람의 재주로 국민의 지덕(智德)을 발전시켰다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지덕의 발전을 방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할 따름이다."(후쿠자와 유키치, <문명론의 개략>, 정명환 역, 홍성사, 1986, pp.70-71.)

 

여기서 후쿠자와가 인물의 의미를 경시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영웅을 나오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영웅이 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영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에 관해 중요한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 중요한 점은 후쿠자와의 표현으로는 "증기기관의 힘", "국민의 지덕"이고, 제 표현으로는 "집합적 의지"입니다. 그러니까 전체 구성원의 지덕 혹은 집합적 의지의 상승·발전이 영웅을 만들고 영웅이 되려는 자는 그 지덕의 발전에 정성을 다 바쳐야 한다는 것이죠. 한나라당의 비법은 그 집합적 의지의 상승·발전에 있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지난 정부 시절에 목격했습니다.

 

(범)진보세력이 회생하는 데 필요한 인물은 (범)진보세력의 지적·의지적 능력이 발전하게 되면 자연스레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인물대망론은 이 점을 자꾸 거꾸로 생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어리석음은 도저히 인물을 찾지 못하겠다는 한탄, 특정 인물에게 줄 서는 구태(舊態), (범)진보세력의 공사(公事)보다 특정 인물의 사사(私事)를 앞세우는 해악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인물의 영입이나 스타 발굴·육성시스템의 도입이 필요 없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아무리 뛰어나고 흠 없는 인물이 있어도 (범)진보세력 전체의 지덕이 발전하지 않고서는 헛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강조할 따름입니다. 정치연합과 관련해서 이 점은 매우 중요한 신조입니다.

 

다음으로는 이념·정책을 새롭게 가다듬고 세련화해서 진보적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한마디로 '컨텐츠 강화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흔히 한국의 진보가 왜 총체적 위기를 맞았는가, 앞으로 진보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등의 물음 앞에 서면, 대부분은 컨텐츠가 없어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해서라고 생각하며 진보적 이념·정책을 새롭게 세울 것을 고민하게 됩니다. 정말 콤플렉스가 지나치다 싶을 정도입니다. 아무튼 컨텐츠 강화론은, 민주당의 이념·정책은 혼란스럽고 보수세력의 그것과 뚜렷한 차별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 진보적 정당들의 이념·정책은 관념적이고 급진적이어서 다수 국민들에게 어필하기 힘들다는 판단에 기초해 있습니다. 이런 이념·정책상의 어설픔으로 인해 (범)진보세력은 지난 대선·총선에서 보수세력에게 완벽하게 패배할 수밖에 없었고, 오늘날 총체적 위기 속에서 자신의 의제를 상실하고 방황하고 있다고 진단합니다. 이런 점을 반성하면서 여러 의견그룹들이 이미 다양한 대안들을 제출하고 있습니다. 사회연대국가론, 사회민주주의론, 역동적 복지국가론, 신진보적 사회경제체제론, 그리고 민주당의 뉴민주당 플랜 등 일일이 꼽기가 힘들 정도로 사실 많습니다. 여기서 그 각각의 내용을 살펴볼 의향도 능력도 없습니다. 다만 뉴민주당 플랜은 뒤에 가서 약간 거론할 작정입니다.

 

이념·정책상의 대안 마련은 (범)진보세력의 재구축에 필수적인 과정임은 두말 할 나위가 없습니다. 더구나 이명박류의 경제 살리기 담론이나 뉴라이트류의 선진화 담론의 허구성을 국민들이 점점 더 강하게 인식하게 되고 미국 주도의 세계화와 극단적 시장주의 흐름이 뚜렷이 퇴조하기 시작한 지금, 이 시대적 전환의 길목에 선 지금, 새로운 비판 담론과 진보적 가치·비전의 제출과 확산은 한국 (범)진보세력의 소생과 재구축을 급진전시켜 줄 것입니다. 따져봐야 할 점은 이념·정책상의 대안들, 진보적 비전들이 여기저기서 제출되고 있음에도 그것이 왜  (범)진보세력의 소생과 재구축으로 뚜렷이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그것은 첫째, 그러한 작업들이 자족적으로 진행됨으로써 그 정치적 정련(精鍊)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범)진보세력의 재구축에 필요한 이념·정책상의 대안 제시는 철저히 담론의 정치와 정책경쟁의 과정입니다. 담론의 정치와 정책경쟁은 투 트랙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보수세력과 다투고 경쟁하는 과정입니다. 이 트랙에서는 공공성의 견지에서 간명하고 단일한 주장을 펴는 것이 관건입니다. 한국의 보수세력이 극단적 시장주의로 대중들을 사로잡은 과정을 생각해보면, 그들이 이 점을 월등히 잘 체득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다른 하나는 (범)진보세력 내에서 때로는 세찬 사상투쟁·노선논쟁을 동반하기도 하는 경쟁·조정·합의의 과정입니다. 다수의 정치인들이 이 과정을 저어하고 업신여깁니다. 뭔가 시끌벅적하고 왈가왈부하는 것을 피곤한 일로 여기는 것은 정치적 기득권자, 현상유지주의자들의 습성입니다. 특히 민주당의 정치인들이 그렇습니다. 정치가 단순한 권력투쟁이 아니라 역사적 공동체 차원의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라고 했을 때, 이념·정책상의 대안 마련을 위한 지난한 사상투쟁·노선논쟁과 조정·합의의 노력을 백안시하는 것은 정치를 속물들의 게임으로 전락시키는 데 일조하게 됩니다.

 

둘째, 이념·정책을 새롭게 가다듬는 일은 고정관념을 깨고 낡은 정신을 부단히 정화하는 것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내거는 구호는 달라졌는지 몰라도 사고의 습관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어 보입니다. 진보의 보수화는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새로운 진로를 밝힌다고 하면서 실은 다른 나라에서 유용했던 관념이나 언어를 그대로 가져와 들이밀거나 그것을 생각의 표준으로 고집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가령 진보와 보수를 초월한 '제3의 길'이라거나 세계화와 세계시민주의, 실용주의,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새로운 교조로 삼는 일이 그렇습니다. 이념·정책을 새롭게 가다듬는 일은 정교한 논리체계를 짜거나 특정 언어의 조합을 상품화하는 작업이 아닙니다. 거칠어도 우리가 발 딛고 선 현실에 대한 통찰에서부터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대중적이고 창조적이며 매력적인 컨텐츠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거버넌스론'과 '생활정치론'의 논쟁입니다. 한번 간추려 보겠습니다.

 

백낙청 : 지금은 거버넌스(governance, 나라 다스리기)의 새로운 체계를 만들지 못하면 국가 전체가 일대 혼란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 시민사회가 다양한 분야에서 국가 거버넌스의 일부를 담당할 만한 책임성과 전문성을 함양하면서, 정당·사회단체·노동조합·종교계 등이 연대해 입법부의 활성화, 사법부의 독립, 언론의 건전성 등을 확보할 범국민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한다. 어차피 선택은 파국 아니면 새로운 거버넌스다. 언론과 시민사회가 정당들과 함께 건설적으로 국정에 기여하는 - 단순한 시위 참여가 아니라 국가 거버넌스에 참여하는 - 길을 마련해야 한다.(백낙청, "거버넌스에 관하여," 창비주간논평 2008.12.30.)

 

정상호 : 백낙청 교수의 '거버넌스론'은 큰 틀의 정치 비전으로서 새로운 거버넌스 체계, 즉 합리적 보수와 책임성 있는 진보가 주도하고 시민사회가 적극 동참하는 중도 거국체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논의다. 그러나 MB정부와 시민사회 간의 소통과 협력은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거의 불가능한 기대이며, 무엇보다 우리 시민사회가 취약한 조건에서 자칫 거버넌스는 현실의 문제를 은폐할 위험이 있다. 거버넌스를 논하기에 앞서 연대를 통한 시민사회 내부의 역량 강화와 자기혁신이 선행돼야 한다. 오늘 한국의 진보개혁세력은 단기적으로는 MB정부에 대항하고 장기적으로는 집권할 수 있는 공동의 대안과 정책, 통일된 전략과 리더십을 갖고 있지 못하다. 현재의 시점에서 안으로부터의 혁신과 연대를 가능케 할 비전과 화두는 '생활정치'이다. 이를 실천하려면 진보개혁진영은 일자리(비정규직 입법), 교육(3불정책), 개방(한미FTA), 경제(수출주도 재벌경제의 극복) 등 4대 현안에 대해 공동코뮤니케를 작성해야 한다. 그 형태는 진보개혁진영의 다양한 싱크탱크와 지식인들이 폭넓게 참여해 초안을 작성하고 정치세력들이 합의하는 정책협약 방식이 바람직하다. (정상호, "대안은 거버넌스가 아니라 생활정치다," 창비주간논평 2009.3.25.)

 

이남주 : 진보개혁진영에서는 이명박 정부와 새로운 거버넌스를 만들자는 주장에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러나 거버넌스론은 현 정부에 대한 어떤 기대에서 제기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정국이 특정 정치세력의 힘만으로는 풀기 어려운 방향으로 전개될 경우 진보개혁세력이 이에 어떤 대안을 내놓을 것인가에 대한 답으로 제시된 것이다. 또한 진보개혁세력의 역량 강화와 거버넌스 논의는 상충하지 않는다. 생활정치의 중요성은 동의하지만, 어떻게 생활정치가 발전될 수 있는가는 더 논의가 필요하다. 정책적 논의가 진보개혁진영의 자족적 논의에 그쳐서는 안 되며, 국민적 요구를 반영하고 국민적 역량을 결집할 수 있는 논의를 바탕으로 정책협약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거버넌스론은 그러한 논의의 지평을 제시하는 것이다.(이남주, "거버넌스 개편과 시민사회 역량강화, 대립하지 않는다," 창비주간논평 2009.4.1.)

 

거버넌스론과 생활정치론 모두 맞는 얘기입니다. 또 좋은 얘기입니다. 거버넌스론은 (범)진보세력, 특히 시민사회세력에게 책임성과 전문성을 키워 비판과 투쟁 모드에서 건설적 참여 모드로 바꾸라고 주문하는 것입니다. 또한 민주공화국의 정상적 작동을 위한 범국민적 합의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는 진보와 보수의 끝없는 갈등과 대립이 대한민국을 파국으로 치닫게 하지 않을까 하는 위기감이 깔려 있는 것 같군요. 하지만 (범)진보세력의 소생, 재구축을 논의의 본위로 하는 처지에서 거버넌스론은 상당히 막연하게 들립니다.

 

생활정치론은 (범)진보세력 내부의 혁신과 연대를 강조하고 그 방편으로 정책협약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는 거의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다만 한 가지만 따져 묻고 싶은데요, 그것은 생활정치라는 개념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4대 현안을 적시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아마 생활정치는 국민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의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해결하는 데 모든 힘을 쏟는 정치라고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생활정치가 아닌 정치는 어떤 것일까요? 예컨대 남북관계에 관련된 사항이나 정치제도의 개선 문제, 이런 것을 의제로 설정하는 일은 생활정치에 속할까요? 아니면 개헌 문제나 티베트 문제는 어떻습니까? 아무튼 잘은 모르겠지만 생활정치라는 개념이 정치를 이익집단 간의 조정으로 협소화하고 그것이 자칫 탈정치화의 도구로 악용될까 염려할 뿐입니다.

 

끝으로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서 새로운 출발을 하자는 생각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기성 정당들을 신뢰할 수 없거나 기대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어떻게든 새로운 모습의 진보정당이 출현하면 좋겠다는 소박한 의견에서부터, 예전에 유시민 등이 주도해서 성사시켰던 개혁정당을 모델로 촛불 시민들에 기반을 둔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 등 다양하게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주로 하는 이들은, 지금의 민주당은 정치적 지역주의의 덫으로부터 헤어날 수 없는 영원한 전라도 정당이며 진보적 정당들은 낡은 20세기형 좌파 이데올로기의 덫에 걸려 한국에서는 결코 튼튼한 뿌리를 내리지 못할 불임정당으로 봅니다. 그래서 21세기의 세계화, 다원화, 탈근대화 흐름에 맞는 새로운 스타일의 개혁정당이 필요하고, 그것이 촛불 시민들의 잠재적 에너지와 결합하게 된다면 얼마든지 기성 정당들을 대체할 수 있는 정당으로 자리 잡을 수 있다고 봅니다. 행간을 읽자면 한국에서 (범)진보세력의 재구축은 이미 낡아버린 것을 복원하는 길이 아니라 지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길로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 역시 절반의 진실은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절반의 진실이 무엇이냐 하면, 지금의 민주당과 진보적 정당들의 고형(固形)을 유지한 채로는, 한국에서 (범)진보세력의 소생·재구축의 본 뜻이 실현될 수 없을 것이란 점입니다. 기존의 틀을 깨고 재편의 동력을 확보하는 길로 가야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새로운 정당 건설이라는 사고방식은 치명적인 문제점을 갖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새로운 정당 건설을 추진할 수 있는 인적 자원 그리고 정신적, 물질적 자원이 지금은 모두 고갈돼 있다는 것입니다. 촛불 시민들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기대하지만, 그 에너지가 직접적으로 새 정당 건설의 동력으로 전화하기란 무척 난망한 일입니다. 예전 개혁정당의 사례를 재현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아시다시피 그 개혁정당이 기성 정당들을 대체하면서 (범)진보진영을 재편하는 데로 나아가지는 못했지요. 결국 새로운 정당은 물론 시도할 수는 있으나 중도 포기될 확률이 높고, 설령 창당된다 해도 'One of Them'이 될 것입니다. 다만 새 정당 건설을 추진하고자 하는 그 속뜻은, (범)진보세력을 재구축하는 길을 모색함에 있어 충분히 고려돼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재의 <민주당/창조한국당/민주노동당/진보신당/시민운동세력 …>이라는 틀은 분명 어떤 형태로든 재편돼야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틀에 추가될 혹은 단절된 또 하나의 정당을 만드는 것으로는 재편의 물꼬를 틀 수 없을 것입니다. 기존의 틀을 놓고 양생과 수술을 통해, 북돋워야 할 부분은 북돋우고 제거할 부분은 제거하고 되살려야 할 부분은 되살리고 새 살이 나야 할 부분은 새 살이 나게 해서 전체적으로 단련시켜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정치연합론의 의미

 

앞서 논의한 반MB투쟁과 반MB연합전선, 집합적인 지적·의지적 능력의 함양과 인물 키우기, 이념·정책의 혁신과 대안 마련, 생활정치에 기초한 정책협약, 기존 정당체계와 정치질서의 재편 등은 (범)진보세력의 소생·재구축에 필수적인 과정들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결핍된다면 중대한 차질을 빚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이 과제들을 따져본 것은 이를 사고함에 있어 은연중에 퍼져 있는 미혹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취지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과제들이 모두 적절하게 수행된다 해도 (범)진보세력이 소생되고 보수 우위 체제에 중대한 변화가 올 것이라는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뭔가 전략적인 틀, 현상변경의 방법적인 기초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저는 그 답안으로서 (범)진보세력의 소생·재구축을 위한 전략적인 틀, 방법적 기초로서 '정치연합'을 제시하고 탐구하고자 합니다.

 

'연합'의 사전적 의미는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이 서로 합동하여 하나의 조직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지만 연합을 '통합'과 구별해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정당통합이 완전히 하나의 정당으로 거듭나는 것을 뜻한다면, 정당연합은 기존 정당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한 상태에서 그 정당들 간의 협력 혹은 동맹관계를 형성하는 것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사용하는 '정치연합'은 어떤 뜻일까요? 우선 연합과 통합을 구별함에 따라 합당, 정당통합 등 하나로 합쳐서 하나의 조직을 만드는 행위는 일단 정치연합 개념의 바깥에 두고자 합니다. 물론 연합이 통합으로 전화해 갈 가능성은 열어 둡니다. 다음으로 일시적 제휴, 사안별 공조, 정책연합, 선거연합 등과 심지어 그러한 과정에서 수반되는 가치의 융합과 지지기반의 융합 등도 '정치연합'의 개념 범주 속에 포괄하고자 합니다. 여기서는 정치연합을 이런 의미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제 '정치연합'이라는 의제와 관련된 여러 측면의 논설들을 끌어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은 원문의 취지를 훼손함이 없이 제가 적절히 재구성한 것입니다(밑줄 첨가).

 

❶ 김윤태 : 이제 한국의 진보세력도 한국형 뉴딜연합의 형성을 통해 민주주의의 수호뿐 아니라 '경제위기 극복'과 '사회통합'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한국형 뉴딜연합은 정당을 초월하여 더 폭넓은 세력의 참여가 필요하다. 군사독재에 맞서 싸웠던 민주연합에 참여한 정치세력인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뿐 아니라 노동조합, 시민단체, 풀뿌리 지역단체, 진보적 연구단체, 그리고 빠르게 성장하는 웹 사이트의 가상공동체를 망라한 광범위한 연합이 필요하다. 한국형 뉴딜연합은 지속가능한 성장과 복지국가의 강화를 위한 구체적 프로그램을 제시하고 선거연합을 형성해야 한다. 다가오는 10월 재보선과 2010년 6월 지방선거의 승리를 위해서는 개혁과 진보를 추구하는 모든 정당의 정치연합이 필수적이다. 선거의 승리가 곧 진보의 목표는 아니지만, 진보의 도덕적 이상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려면 선거에서 승리해야 한다.(김윤태, "한국형 뉴딜연합의 형성을 위하여," 창비주간논평 2009.4.22.)

 

❷ 이상이 : 현 정부가 추진하려는 광폭한 신자유주의 정책들과 반민주적 행태에 반대하는 연대활동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연대에 신중한 입장을 견지하는 세력들이 존재한다. 연대의 전제조건이 필요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주로 진보정치진영의 입장이 그러한데, 연대의 핵심적 매개로 '반신자유주의' 노선을 내걸자는 것이다. 민주당 주류의 다수는 이념적으로나 정책적으로 신자유주의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고, 이것 외에는 마땅한 대안을 강구해본 적도 없다. 그러므로 연대의 조건으로 '반신자유주의'를 경직되게 고집할 경우, 이것만으로는 포괄할 수 있는 연대의 정치사회적 범위가 넓지 못하다는 데 문제가 있다. 그렇다고 신자유주의를 반대하지 않는 세력과의 정치적 연대를 추진할 수는 없는 일이다. '반신자유주의'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신자유주의 반대세력은 소수정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늘 다수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다양한 형식의 정치사회적 연대는 불가피하고, 오히려 매우 소중하므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 연대는 상대방이 있는 게임이므로 유연해야 한다. '반신자유주의 연대'라는 용어의 고수가 연대를 무산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럴 경우, '반신자유주의'의 핵심적 정책과 내용을 직접 열거하고, 이것을 합의하면 된다.(이상이?)

 

❸ 최태욱 : 이즈음에서 필자는 민주·개혁·진보세력들이 과거의 경험을 되살려 다시 하나로 뭉치기를 제언한다. 그리하여 권위주의적 신자유주의 정부에 맞서 다음 두 가지 연대사업을 펼치기를 기대한다. 하나는 '대안 수립을 위한 연대'이다. 즉 시민들이 그것의 실현에 희망을 걸고 결집할 수 있는 신자유주의의 대안을 공동으로 마련하여 제시하는 일이다. 그 대안은 세밀하거나 정치한 것일 필요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단순하고 명쾌한 것일수록 좋다. 그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기본철학이나 비전 혹은 굵은 정책기조 정도면 당장의 목표로서는 충분하다. 다른 하나는 '정치개혁을 위한 연대'이다. 이는 앞서 제시한 공동대안의 실현을 위해 어떠한 정치(제도)개혁이 필요한지에 합의하고 그것을 위한 정치적 노력을 공동으로 경주해가는 일이다. 여기서의 정치개혁도 그 내용은 굵고 단순한 것일수록 좋다. 요컨대 단순한 목표와 단순한 수단을 제시하고 실천해감으로써 신자유주의의 대안적 사회 건설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범시민적 공감대와 지지를 확보하라는 것이다. 이는 반신자유주의 세력들이 자신들의 다양한 해법들 중에서 최소한의 공통요소 혹은 최소 공통분모를 찾아내어 그것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올리는 소위 '최소주의 전략'(minimalist strategy)을 택하라는 요구이다.(최태욱, "민주·개혁·진보 정치가들을 위한 제언," 창비주간논평 2008.10.22.)

 

❹ 박동천 : 정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자세라면, 선거에서 진보의 연합이 언제나 최고의 전략적, 즉 기회주의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 정당이라는 조직의 울타리는 내부사정과 노선차이, 그리고 인간관계들이 복잡하게 얽히기 때문에 밖에서 합하라 말라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서류상으로 합했다가 이권이 걸릴 때마다 금세 찢어진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기도 하다. 문제는 선거연합인데, 그렇다면 선거 때에 연합공천을 할 수 있는 표준적인 규칙을 정해서 관행으로 정착시켜 놓으면 될 일이다. 프랑스의 결선투표제는 스스로 연합공천을 하지 못하는 좌파와 우파에게 후보 단일화를 제도적으로 강제하는 제도다.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문제는 선거법 개정이 필요하니까 접어둔다면, 사회의 개선을 원하는 정당이 상습적 분열증을 극복할 내부절차로 내 생각에는 다음과 같은 규칙이라면 합의가 가능하다고 본다. 이는 기본적으로 타이 브레이크를 인위적으로 강제할 필요에 충실한 합리성, 즉 정치적 합리성을 반영한다.

       a. 정당이든, 정당 내 파벌이든, 각 정파는 우선 예비 선거를 원칙으로 자기파 후보를 결정한다.

       b. 연합후보 선출을 위한 방식은 해당 정파들이 시한을 두고 협상한다.

       c. 시한까지 합의가 안 될 때에는, 그 시점에서 각자 제시한 최종안을 가지고 제비뽑기로 결정한다. 그렇게 뽑힌 선출방식으로 연합공천을 실시한다.

       d. 각 정파 안에서도 예비선거 방식에 관해 조정이 안 된다면 마찬가지 절차를 따른다. (박동천, "분열의 진보, '선거연합'이라도 해야 산다," 프레시안 2009.4.28.)

 

❺ 손우정 : 결국 울산 북구에서의 후보단일화는 두 정당이 공유하는 진보적 가치의 실현보다, '반MB 단일화'의 압박이 더 큰 동기가 아니었던가? 이번 단일화가 분열로 점철된 지난 과거를 넘어, 진정한 '이질적 진보세력의 폭넓은 단결'의 출발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민주노동당은 단일화에 대한 반발로 내부불만이 터져 나왔고, 원내진출의 숙원을 해결한 진보신당 내부에서도 민주노동당과의 단결의 동기가 커진 것도 아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선거에서 중요한 것은 반MB에 기반한 후보단일화를 어떻게 이뤄낼 것인지, 다시 말해 100퍼센트 여론조사로 결정할 것인지, 민중참여경선제로 결정할 것인지 따위가 아니다. 그들이 무엇을 반대하며 무엇을 창조하려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국민적 이해다.

      우리는 반MB로 형성된 대중적 저항전선을 부정하지 않고 받아들이면서도, 단순히 지지율만으로 저항의 돌파구를 찾을 것이 아니라 반MB로 결집된 다양한 세력 중, 누구의 대안으로 이행할 수 있을지를 찾아내야 한다.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중 누구를 어떻게 단일 후보로 선택할지에 대한 고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의 어떤 가치가 진정한 '대안'일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각 대안의 긍정적 결합도 가능하다. 어떻게 반MB로 결집된 대중의 힘을 유지한 채, 새로운 민주주의로 향해 갈 것인가? 그 답은 아마도 반MB연대를 추상적 수준에서 현실로 끌어내리고, 그 '내부'에서 해야 할 일을 구상하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손우정, "반MB승리, 자축만 하기엔 허전한 무엇," 오마이뉴스 2009.4.30.)

 

한국형 뉴딜연합을 주장하는 위 ❶은 가장 포괄적인 진술인데, 정치연합의 방도로 '공동의 정책프로그램 제시' 및 '선거연합', 곧 정책연합과 선거연합을 말하고 있습니다. '반신자유주의 연대'를 추구하는 위 ❷는 민주당 주류의 다수를 연대의 틀로 포괄하기 위해서는 '반신자유주의'라는 명목에 얽매이지 말고 반신자유주의의 실질로서의 핵심 정책내용을 열거해서 일일이 합의하는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공동 정책프로그램의 합의, 곧 정책연합을 유연하게 추진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최소주의 전략을 주장하는 취지의 위 ❸은 '대안 수립을 위한 연대'와 '정치개혁을 위한 연대', 곧 연합의 정치적 기초를 확보하는 데 방점을 둔 정책연합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선거연합을 (범)진보세력의 최상의 선거 전략으로 보는 위 ❹는 연합공천을 달성하기 위한 표준적 규칙과 관행, 곧 선거연합의 확고한 절차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 위 ❺는 선거연합의 절차보다는 더 근본적인 가치연합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정치연합을 어떤 식으로 할 것이냐 하는, 곧 정치연합의 방도로는, 정책연합과 선거연합이 주로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주목할 것은 '정책연합'이 합의를 통한 공동의 정책프로그램 수립이라는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정책연합은 위 ❶, ❷, ❸과 같이 생각해야 합니다. 정부·여당의 정책이나 입법에 대해 야당들이 힘을 합쳐 공동전선을 펼치는 것을 정책연합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사안별 공조'라고 해야 될 것입니다.

 

사실 조금씩 편차는 있습니다만 다수의 진보적 지식인들은 어떤 형태로든 (범)진보세력 내의 정치연합을 원하고 있습니다. 일반 지지자들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부동층에서도 '별 수 없어, 서로 힘을 합쳐야지, 아니면 어떻게 이겨?'라는 말이 서슴없이 튀어나오곤 합니다. 앞으로 점점 더, 특히 선거철이 다가올수록 '정치연합론'은 중론(衆論)이 될 것입니다.

 

보통은 '분열은 악이고 단합은 선이다'라는 전제에서 정치연합을 사고합니다. 틀린 생각은 결코 아닙니다. (범)진보세력의 분열을 방치하고서는 결코 그 미래를 개척할 수 없음은 분명합니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진보의 최대의 적은 분열입니다. 하지만 분열은 곧 악이라는 변론은 다른 한편으로 다양성 혹은 소수자를 억압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무엇을 위한 단결인가에 대해서도 명확한 답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조건 단결하라는 것은 실제로는 단결을 저해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범)진보세력의 소생·재구축을 위한 전략적인 틀, 방법적 기초로서 정치연합을 사고해야 합니다. 요컨대 정치연합이라는 전략적 틀 속에서 반MB투쟁, 인물 키우기, 이념·정책의 혁신, 생활정치에 기초한 정책협약, 정당체계의 재편 등을 사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MB연합전선이나 정책협약, 정당체계의 재편 등의 과제들은 이미 정치연합이라는 개념 속에 내포돼 있습니다. 이념·정책의 혁신과 대안 마련도 공동의 정책 프로그램 합의나 대안 수립을 위한 연대 등 정책연합의 틀 속에 이미 들어와 있습니다. 인물 키우기도 정책연합이나 선거연합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또 효과적으로 전개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강조하고 싶은 것, 가장 기저에 깔고 싶은 것은 위 ❺ 논설의 취지입니다. 위 ❺ 논설은 선거정치의 이익을 교환하는 데 중점을 둔 정치연합보다는 가치의 경쟁과 가치의 융합에 진정성을 둔 정치연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범)진보세력의 소생·재구축은 지금의 민주당, 창조한국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시민운동세력, 지식인그룹 등 그 각각이 - 또 그 전체가 -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 밑에서부터 가치의 혁신적 융합이 일어나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가치융합은 정치적 기득권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정치권의 주요 활동가들과 시민운동가들, 특히 지식인들이 주도해야 할 일입니다. 덧붙이자면, 가치의 융합을 동반할 때만이 정책연합과 선거연합은 그 의미가 재생산될 수 있습니다. (범)진보세력의 집합적인 지적·의지적 능력의 함양도 이와 결부돼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탐구하고자 하는 정치연합론의 기본 철학이 이 점에 있습니다.

 

이런 관계로 지금 여기의 정치연합론은 예전의 '비판적 지지 vs. 독자성 강화' 논쟁이나 '민주연합론'과는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범)진보세력의 소생·재구축을 위한 창조적 전략으로서의 정치연합론인 것입니다. 가치와 비전의 혁신적 융합을 기저로 하는 정치연합은 곧 진보의 재구성을 위한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을 요청합니다.

 

실현가능성의 문제

 

정치연합에 관한 논의가 '정치권'에서 관심을 받게 된 것은 지난 해 11월 말 경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를 만난 자리에서 '민주당-민주노동당-시민사회단체'의 민주연합 결성을 권유하면서였습니다. 이어 '민생민주국민회의' 주도로 '경제·민생 위기 극복을 위한 제 정당·시민사회단체·각계인사 연석회의'가 열렸습니다. 무엇보다 강기갑 대표가 올해 초부터 "반MB연합을 위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 큰 정치행보를 해나가겠다"고 천명하며 사이사이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음에도 그 실천의지를 굽히지 않은 것이 정치연합의 분위기를 살려나가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습니다. 강 대표의 큰 정치는 결국 울산 북구 재선거에서의 (범)진보세력의 후보단일화와 진보후보의 당선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냈습니다. 올해 4월 국회의원 재선거 직전의 경기도 교육감 보궐선거에서 김상곤 후보가 당선된 것 역시 (범)진보세력의 선거연합 분위기에 힘입은 바 컸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였습니다. 부분적인 선거연합에서 나아가 정치연합을 더 심화시키기 위한 논의와 행동은 별로 진척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정치연합은 그 대의명분에도 불구하고 (범)진보세력의 소생·재구축을 위한 방법으로서의 실현가능성은 도저히 없는 것일까요?

 

사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을 떠받치고 있는 한국의 전통적 좌파들은 본격적인 정치연합에 대해 반대론을 펴거나 혹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곧 정체성의 차이를 덮어버리는 묻지마식 연대는 진보정당이 추구하는 정치연합이 될 수 없다거나, 올바른 정치연합은 낡은 민주연합이 아닌 '반신자유주의연합'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지금 한국에서 요청되는 정치연합의 기본 성격은 '반신자유주의'가 돼야 한다는 거죠. 좀 더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진보적 정당들과 민주당 간의 사안별 공조나 부분적 선거연합은 필요한 경우 전술적으로 용인할 수 있다. 둘째, 그러나 그 이상의 정치연합, 예컨대 공동의 정책프로그램을 합의·실천하는 정책연합이나 그에 기초한 전면적 차원의 선거연합이 되려면 그것은 반드시 반신자유주의연합이 돼야 한다. 셋째, 이러한 반신자유주의연합에 민주당이 참여하기 위해서는 민주당은 지난 10년간의 집권기 동안 추진했던 신자유주의 사회경제정책에 대해 분명히 반성하고 신자유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해야 한다. 넷째, 이러한 반신자유주의연합이 아닌 두루뭉술한 민주연합 따위는 결국 '죽어가는 민주당 살리기' 또는 민주당 강화론에 지나지 않는다. …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서 넷째의 점이 가장 문제인데 이는 뒤에서 논하기로 하고, 우선은 반신자유주의연합론에 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일단 저는 전통적 좌파들이 '반신자유주의'라는 입언(立言) 형식에 집착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반신자유주의라는 명칭에 대한 동의 여부로 정치연합의 문제를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면 참으로 난감할 따름입니다. 신자유주의라는 용어가 실체가 없는 언명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닙니다. 실체가 없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그릇된 주장입니다. 다만 신자유주의가 대중적으로 회자되는 데 적합한 용어인가, 담론의 정치에 알맞은 용어인가에 관해서는 약간의 의문이 있습니다. 어쨌든 저는 정치연합의 문제를 사고하는 데서 반신자유주의라는 입언 형식에 매달리는 것은 너무나 거칠고 유치한 태도라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반신자유주의연합이라는 언명에 포함된 내용, 실질이겠죠. 그것은 첫째로 기업규제 철폐, 비정규직의 양산과 노동 억압, 공공부문의 민영화, 무차별적 감세, 맹목적 FTA, 사회 제 영역에서의 공공성 약화, 형식적 법치를 내세운 신권위주의 등에 대한 명백한 반대 표명과 그 대안 제시. 둘째로 사회의 양극화와 민생의 황폐화를 조장하고 방기해 온 지난 10년간의 정부정책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수동적·절충적 정책노선의 변환. 좀 더 구체화돼야 하겠지만 대략은 뭐 이런 내용을 포함할 거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점이 반신자유주의연합의 주된 내용이라면, 제가 볼 때 지금의 민주당이 이에 동조할 수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신자유주의의 실질을 놓고 본다면 지금의 민주당도 상당 부분 수용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왜냐하면 이미 정치경제의 세계적 흐름과 한국적 상황·조건이 크게, 또 뚜렷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민주당의 일부 유력한 인사들은 아직도 시장주의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음을 부정할 순 없지요. 하지만 민주당 안에는 사회 양극화의 해결 및 '지속가능한 성장과 복지국가의 강화를 위한 구체적 프로그램'(김윤태) 마련에 공감하고 동참하려는 이들이 더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정규직, 조세, 한미FTA 등 만만치 않은 현안으로 들어가면 민주당과 진보적 정당들 간에 의견이 심하게 갈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반신자유주의연합을 하는 데서 그 정도는 어쩌면 당연히 따라오는 갈등입니다. 그 정도의 갈등에 대한 예상 때문에 연합의 상대방에 대해 미리 선을 긋고 배타적인 태도를 취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요컨대 저는 실질을 중심에 두고 살펴보면 민주당을 포함한 반신자유주의연합이 그렇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점을 논변하는 것입니다.

 

공동 정책프로그램을 합의·실천하는 정책연합이나 그에 기초한 전면적 차원의 선거연합, 가치와 비전의 연합 등 보다 진전된 정치연합의 실현가능성을 정작 어둡게 하는 것은, 민주당과의 정치연합에 대한 전통적 좌파들의 원초적인 거부감일 것입니다. 이 거부감은 민주당이 본질적으로 진보일 수는 없다, 민주당과 진보주의는 서로 섞일 수 없다, 현 단계에서 정치연합은 결국 민주당에 좋은 일 다 시키는 것이다 … 등으로 표현됩니다. 이러한 네거티브 감정·판단은 역사적 경험이라는 측면에서도, 사실관계의 일반적 경향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충분히 수긍할 만합니다. 결과론적 판단이긴 하지만, 그동안 민주연합을 내세우며 진보파의 독자적 발전의 문제를 팽개쳐버린 사람들이 한국의 진보정치에 과연 얼마나 기여했는가 하는 점을 되돌아보면 그러한 거부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 관계로 정당통합 같은 형태를 아예 정치연합의 범주에 두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정당통합 운운은 그 부작용이 훨씬 더 클 것이라 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전통적 좌파들의 그러한 네거티브 의식을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으로 그치면, 그래도 좋은 것일까, 괜찮은 것일까 하는 생각을 품게 됩니다. 그러한 네거티브 의식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않는다면, 전통적 좌파들은 민주당의 지지기반을 최대한 파고들어 민주당이 약화되는 만큼 진보적 정당들이 강화되는, 뭐 이런 전략적 구도를 앞으로도 계속 유지해가야 할 것입니다. 마치 과거 영국에서 자유당이 한 순간에 주저앉고 노동당이 새롭게 부상한 사례의 한국적 재연을 좇는 것이죠. 그런 전략적 그림이 얼마나 타당성과 현실적합성을 지니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한국에서는 그런 그림이 쉽게 단선적으로 이뤄지지는 않을 거라 봅니다. 더욱이 민주당과의 관계를 본원적인 적대관계로 설정하는 것은 한국의 진보정치를 위험천만의 도박으로 밀어 넣는 일일 겁니다.

 

저는 지금 한국의 전통적 좌파들이 민주당 못지않게 근본적인 혁신을 요구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근본적 혁신에는 민주당과의 연합에 대한 네거티브 의식에 보다 발전적인 변화를 주는 것, 진보정치의 전략적 구도를 보다 유연하게 실용적으로 설정하는 것도 포함된다고 봅니다. 또한 전통적 좌파들은 자신들의 진보주의가 대중적 설득력을 갖추고 정치적 파급력을 발휘하려면 무엇이 어떤 방향으로 혁신돼야 하는지에 관해 정말 진지하게 재고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진보적 정당들은 민주당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 정책담론과 정치문화를 접하면서 그로부터 옥돌을 찾아내든지 아니면 자기 안의 옥돌을 다듬는 방편을 구하든지 해야 한다고 봅니다. 보다 더 진취적으로 말입니다. 앞서 했던 말을 되풀이하자면, 정치연합은 자신을 변화시키고 상대방을 변화시킨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입니다. 

 

전통적 좌파들의 네거티브 의식보다 정치연합의 가능성을 봉쇄하는 더 크고 무거운 장애물은 사실 따로 있습니다. 바로 민주당의 교만한 현상유지주의입니다. 민주당은 겉과 달리 속으로는, 현 상황이 어떻든 막판에 한나라당을 물리치고 선거에 이기거나 정권을 잡을 수 있는 정당은 자신뿐이고, 나머지 야당들은 그저 한국 정치의 복잡다단함을 연출하는 액세서리에 불과하다고 여깁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공조도 하고 선거연합도 물론 할 수 있겠지만, 진보적 정당들은 그래봤자 결국 민주당의 하위 파트너일 뿐이라는 겁니다.

 

이쯤에서 조금 눈을 돌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뉴민주당 플랜'에 관해 먼저 몇 가지 비평을 하고 갈까 합니다. 지난 5월 17일 뉴민주당비전위원회는 <뉴민주당 선언(안) - 민주당 현대화의 길>(이하 '선언')을 내놓았습니다. 먼저 좋게 이해하자는 견지에서 밝혀둘 점이 있습니다. 비록 매우 추상적인 선언문이긴 하지만 그에 담긴 구석구석의 개별 사항들 중 다수는 결코 나쁘지 않은, 충분히 좋은 정책담론들이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선언 전체의 문법을 좌우하고 있는 "뉴민주당의 길은 중도개혁주의를 현대화하는 길"(선언 11)이라는 프레임입니다.

 

우선, 무엇이 NEW, '새로운'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지난 참여정부 시절에 이미 수없이 나왔던 얘기를 거의 앵무새처럼 반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앤서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의 어법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선언은 결코 '뉴'민주당의 길을 고민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런 지적 게으름에 실망감과 불쾌감을 감추기 어렵습니다. 더불어 이런 지적 게으름 때문인지 선언은 지난 10년의 집권기에 대한 성찰이 턱없이 부족하고, 또 맥을 잘못 짚고 있습니다.

"… 참여정부와 민주화세력이 표방한 기본가치와 정책방향은 옳았지만, 정책수단은 유효하지 못했다. 우리는 공정한 분배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였지만 성장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작았다.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은 정책목표는 좋았지만 유효한 수단을 국민에게 제시하지 못했다. 일자리 창출에 대한 시장역할을 강조하였지만 사회적 대타협에 대해서는 등한시했다."(선언 10)

 

그래도 정책방향은 옳았고 다만 정책수단이 유효하지 못했다?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정책방향, 바로 그것이 세계화와 시장만능주의를 과도하게 좇고 사회 양극화를 방기하는 데로 맞춰졌던 것이 아닌가요? 성장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목소리가 작았다구요? 아닙니다. 그것은 억측입니다. 실제로도, 목소리로도 성장주의자들의 세에 밀려 성장 문제로 골머리를 썩였고 공정한 분배에는 아랑곳 여기지 않았습니다.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하는 제3의 발전모델"(선언 12), 정말 이 부분에 혹시나 하고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허무했습니다. 선언 전체를 손에 땀을 쥐고 정독해봤지만, 또 뚫어져라 찾아봤지만, '성장과 분배를 동시에 달성하는 방법'에 관해 일말의 힌트라도 제시돼 있지 않았습니다. 매끈한 수사만 가득했습니다. 경향신문 기자가 김효석 위원장과의 인터뷰에서 물었습니다. 한나라당의 '성장'과 차이는?

 

위원장이 말했습니다. "한나라당의 성장이 성장만능주의라면 민주당의 성장은 성장의 몫이 골고루 돌아가고 사회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진 '지속가능한 성장'이다." 성장의 몫이 골고루 돌아가게 하는 것은 성장입니까, 분배입니까? 사회안전망을 제대로 갖추는 것은 성장입니까, 분배입니까? 모두 분배 얘기 아닙니까?

 

가치와 비전, 담론, 노선, 정책 등은 당면한 현실에서의 긴장과 충돌을 고뇌하고 반영한 것일 때, 비로소 살아 숨쉬는 것이 되고 대중들에게 어필할 수 있게 되며 따라서 문제해결의 능력을 품게 됩니다. 선언이 참여정부 출범 당시의 것이었다면 부족하지만 그래도 봐줄 만은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언은 지금 민주당이 '뉴'민주당이 돼야만 하는, 지금 여기의 팽팽하고 숨 막히는 현실과는 그저 곱디곱게 동떨어져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김효석 위원장은 이 안을 시발점으로 해서 범민주개혁세력의 가치를 담는 큰 그릇을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포부는 좋다고 말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노선투쟁을 낡은 정치문화로 자꾸 몰아붙이는 것은 정말 구태의연한 행태입니다. 큰 그릇을 만들려면 서로 다른 의견들의 충돌과 융합을 의도적으로라도 불러 일으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낡은 정신을 정화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진통의 과정 없이 만들어진 그릇은 겉은 커보일지 몰라도 반드시 스스로 금이 가고 깨져버릴 운명의 그릇인 겁니다. 그리고 지금 이미 선언(안)이 이미 노선투쟁을 일방적으로 일으켜내고 있지 않나요?

 

"그릇된 보수, 낡은 진보"(선언 12)

"낡은 진보의 결과적 평등"(선언 13)

"낡은 진보는 모든 사람의 기계적 평등만 강조한다."(선언 14)

"낡은 진보주의의 국가통제"(선언 15)

"낡은 진보의 비대한 정부"(선언 17)

 

이렇듯 기본 프레임인 '중도개혁주의'(선언 11)를 억지로 세우기 위해 '낡은 진보' 타령을 하고 있습니다. 중도개혁주의야말로 지난 정부 시절을 거치며 그 약발이 다 돼버린, 그래서 지금은 낡은 레퍼토리입니다. 애초부터 어정쩡해서 현대화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계적 평등'과 '국가통제'를 주장하는 그 '낡은 진보'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무엇을 지칭하는 겁니까?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을 지칭하는 겁니까? 설령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의 진보주의에 낡은 부분이 많다 해도, 그들의 진보주의는 지금 '기계적 평등'과 '국가통제'를 주장하진 않습니다. 진보가 낡았다고 하기 이전에, 정말 한국에서 진보의 의미가 무엇인지 먼저 묻고 곱씹어봐야 합니다. 지금! 미국 주도의 세계화주의와 시장만능주의가 한물가고 있는 지금! 이명박 정부는 1980년대 대처리즘, 레이거노믹스의 환상을 좇고 있습니다. 선언의 '뉴'민주당은 그래도 1990년대의 '제3의 길'을 좇고 있으니, 좀 나은 걸까요?

 

"창조적 융합의 길"(선언 12), - 앞서 정치연합의 철학으로 표현했지만 - 정말 전적으로 동의하는 방법론입니다. 그런데, 좌와 우를 어떻게 창조적으로 융합하겠다는 것인지요? 그래서 어떻게 좌우를 뛰어넘겠다는 것인지요? 제가 볼 때, 창조적 융합의 길은 차라리 (범)진보세력 전체가 공통분모로 삼을 수 있는, 그런 최소주의적 강령과 정책프로그램을 정성껏 작성해서 보다 발전된 정치연합의 주춧돌을 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뉴민주당 플랜에 관해 장황하게 비평했습니다만, 말하고 싶은 요지는 민주당이 새로운 길, 현대화의 길을 걷겠다하면서도 여전히 어설픈 모방, 성찰의 부재, 성장주의에 대한 콤플렉스, 노선투쟁에 대한 그릇된 관념과 태도, 시대적 전환을 도외시하는 교조적 중도개혁주의, 진보주의에 대한 억측, 좌우 초월에 대한 환상 등 지독한 허위의식, 지적 나태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달리 말해 민주당이 교만한 현상유지주의에 갇혀, 정녕 어떻게 해야 민주당이, (범)진보세력이 살아날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죠. 뉴민주당 플랜에 대해 좌파 신자유주의의 재탕에 불과하다고 과감히 비판의 날을 세우는, 민주당 안의 진보적인 인사들조차 실은 진보적 정당들과의 정치연합에는 관심이 없거나 눈을 감거나 침묵하고 있습니다. (범)진보세력의 소생·재구축을 위한 전략적 구도에 관한 관심과 숙고가 빈약하다는 겁니다.

 

민주당은 어쨌든 요지부동의 제1야당이며 반한나라당의 모든 것은 민주당으로 수렴될 수밖에 없다는 교만한 기득권의식, 중도개혁주의로 적당히 포장함으로써 유권자의 중간층을 포섭하면 정권 탈환을 못할 게 없다는 굴절된 위기의식, 이런 작용으로 민주당에는 진보적 정당들과의 연합에 대한 적극적 고려가 있을 수 없고, 시민운동과의 공동행동에 대한 적극적 의지가 있을 수 없으며, 촛불시민들과의 소통과 공감에 대한 실질적·집단적 노력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민주당의 화려한 말잔치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민주당에는 치열한 반성도, 창조적 혁신도, 냉철한 집권전략도 모두 없음을 간파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민주당에는 다만, 교만에 가득 찬 현상유지의 전략만 있을 뿐입니다. 이는 첫째, 이명박 정부의 과도한 실정에 따른 반사이익, 둘째, 제1야당이라는 기득권, 셋째, 중도개혁주의라는 장식을 통한 중간층 포섭 및 보수 상위계층의 거부감 순화, 이 세 가지를 요소로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범)진보세력의 소생·재구축이라는 목적과는 거리가 먼 것이고, 민주주의·민생 안정·한반도 평화·분단 극복 등에 관한 정치적 능동성·창조성이 결여된 것입니다. 과거 여당 시절의 청맹과니 정치의식·정치문화에 아직도 젖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민주당이 앞뒤로 막혀 있어서는 보다 발전된 정치연합은 기실 불발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정치연합의 실현가능성 문제에 관해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기존의 관성, 선거정치의 이해관계, 무엇보다 민심의 요청 등이 있으므로 사안별 공조, 부분적이고 간헐적인 선거연합은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공동 정책프로그램을 합의·실천하는 정책연합이나 그에 기초한 전면적 선거연합, 가치와 비전의 융합 등 보다 진전된 정치연합은 민주당의 현상유지주의, 전통적 좌파들의 연합에 대한 네거티브 의식이 서로 맞물려 있는 한 그 실현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민주당의 중간층 포섭전략, 전통적 좌파들의 '민주당 약화에 따른 진보정당의 강화'라는 관념이 헛된 기대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면, 그래서 서로를 흡수관계나 적대관계에 놓지 않고 전략적 파트너로 인정하게 된다면, 그래서 자기 당의 발전과 (범)진보세력 전체의 재구축이 맞물려 있다는 관점에서 스스로의 혁신을 꾀할 수 있다면, 보다 진전된 정치연합의 실현가능성은 얼마든지 높아질 수 있을 겁니다. 이를 위해서는 지식인 그룹과 시민운동세력이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됩니다. 공공적 지혜를 최대한 발휘해서 정치연합을 상식적 차원의 문제로 만들어버림으로써 한국 진보정치의 문화를 바꿔야 할 것입니다. 야심을 가진 정치인들도 정치연합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또한 정치연합의 효과가 드러나는 과정에서 자신을 리더로 부각시키기 위해 창조적인 욕심을 부려야 할 것입니다.

 

요는 이대로 각개약진해도 좋을 것인가, 아니면 변화의 정치를 위한 전략적 구도를 다시 짤 것인가 하는 선택의 기로에 있다는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 신기남(신진보연대 상임고문)


#신진보연대#신기남#정치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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