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ㄱ. 맹모삼천지교의 가르침

 

.. 오타미는 무사 집안의 딸로서 어릴 때부터 맹모삼천지교의 가르침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었다 ..  《시모무라 고진/김욱 옮김-지로 이야기 (1)》(양철북,2009) 15쪽

 

 "무사 집안의 딸로서"는 "무사 집안 딸로서"나 "무사 집안에서 자란 딸로서"로 다듬고, "않을 정도(程度)로"는 "않을 만큼"이나 "않도록"으로 다듬습니다. 그러나, '교훈(敎訓)'이라 하지 않고 '가르침'이라 적은 대목은 반갑습니다.

 

 ┌ 맹모삼천지교의 가르침을

 │

 │→ 맹모삼천지교라는 가르침을

 │→ 맹모삼천지교 같은 가르침을

 │→ 맹자 어머니가 아이를 가르쳤던 이야기를

 │→ 맹자 어머니가 아이를 가르친 이야기를

 │→ 맹자 어머니가 집을 세 번 옮기면서까지 아이를 가르친 이야기를

 └ …

 

 한문 '맹모삼천지교'를 그대로 두어야겠다고 생각한다면, "맹모삼천지교라는 가르침"이나 "맹모삼천지교 같은 가르침"이라고 적어야 올바릅니다. 어떠한 가르침인가를 나타내자면 토씨 '-의'가 아닌 '-라는'을 붙여야 하니까요.

 

 또는, '맹모삼천지교'를 손쉽게 우리 말로 풀어냅니다. '맹모'란 맹자 어머니입니다. '삼천'이란 세 번 옮겼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교'란 가르침입니다. 그러니까, "맹자 어머니가 세 번 집을 옮기던 가르침"으로 풀어내게 되는데, 이렇게 풀어내고 보니 '-敎'와 '-의 가르침'이 겹말이 되네요.

 

 ┌ 맹자 어머니 가르침

 ├ 맹자 어머니가 베푼 가르침

 └ …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집을 세 번 옮긴 일"을 따로 밝히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맹자 어머니 가르침"이라고 한다면, 으레 맹자 어머니가 살림집을 세 번씩 옮기면서 아이를 가르치려 했던 이야기이구나 하고 떠올리게 되거든요. 그저 있는 그대로 손쉽게, 군더더기 없이 부드럽고 단출하게 가다듬어 줍니다.

 

 

ㄴ. 언제의 일인가

 

.. 글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반은 놀면서 조금씩 배운 것이지만, 언제의 일인가는 생각나지 않는다 ..  《베라 피그넬/편집부 옮김-러시아의 밤》(형성사,1985) 9쪽

 

 가만히 생각해 보면, 너무 어릴 적부터 글을 가르치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일찍 가르치지 않아도 어련히 깨닫고 배웁니다. 걸음을 일찍 걷고 말을 일찍 하고 글을 일찍 깨우친다고 '천재'가 되지는 않아요. 더욱이, 일찍부터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다고 해서 더 착한 사람이 된다거나 더 아름다운 사람이 된다거나 더 마음씀씀이가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아요.

 

 무엇이든 일찍 배우면 좋다고 말합니다만, 어떤 재주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도움이 될지라도 제 깜냥을 헤아리며 됨됨이를 다스리는 일에는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고 느껴요. 사람이든 짐승이든 푸나무이든, 알맞는 때에 알맞게 자랄 때가 한결 아름답고 싱그럽다고 느낍니다.

 

 "읽을 수 있게 된 것은"은 "읽을 수 있게 된 때는"으로 손보고, "조금씩 배운 것이지만"은 "조금씩 배우기는 했지만"으로 손봅니다.

 

 ┌ 언제의 일인가는

 │

 │→ 언제 일인가는

 │→ 언제 적 일인가는

 │→ 언제였는가는

 │→ 언제인가는

 └ …

 

 "야, 우리가 서울에 간 게 언제의 일이지?"처럼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야, 우리가 서울에 간 때가 언제이지?"처럼 말해야 올바릅니다. "서울에 간 때가 언제 적이지?"처럼 말해야 알맞고, "우리가 서울에 언제 갔지?"라든지, "언제 서울에 갔지?"처럼 말해야 올바릅니다. 사람마다 제 말씨를 살려서, "언제 서울에 갔더라?"처럼 적거나 "서울에 갔던 때가 떠오르지 않아."처럼 말해 보아도 괜찮습니다.

 

 

ㄷ. 살상의 무기

 

.. 작은 풀이나 풀벌레를 함부로 밟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살상의 무기를 들지 못하며, 다른 이의 불행을 지나치지 못하며,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일을 쉽게 하지 못합니다. 그들의 마음이 자비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  《지율-초록의 공명》(삼인,2005) 169쪽

 

 "자신(自身)의 양심(良心)을 속이는"은 "자기 양심을 속이는"이나 "제 마음을 속이는"으로 다듬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자비(慈悲)로 무장(武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는 "그들은 마음 가득히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나 "그들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쯤으로 손질합니다.

 

 ┌ 살상(殺傷) : 사람을 죽이거나 상처를 입힘

 │   - 인명 살상까지 예사로 하였으니 / 대부분 살상되고 말았다

 │

 ├ 살상의 무기를 들지 못하며

 │→ 남을 죽이는 무기를 들지 못하며

 │→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들지 못하며

 └ …

 

 토씨 '-의'를 붙인 "살상의 무기"가 아닌 "살상하는 무기"처럼 적을 수 있으면, 아쉬우나마 반가운 노릇입니다. 그런데, 이렇게나마 내 글투를 가다듬는 한국사람은 얼마나 되려나요. 이쯤이라도 마음을 쏟아 글다듬기와 말다듬기를 해 주는 이 나라 지식인은 몇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으려나요.

 

 더욱이, 한자말 '살상'이란 '사람 죽이기'인데, 좀더 손쉽고 뜻이 또렷한 '사람 죽이기'라는 말로 우리 생각과 느낌을 펼쳐 보이고자 하는 분은 얼마나 되려는지요. 신문기자이든 대학교수이든 역사학자이든 어떻습니까.

 

 ┌ 인명 살상까지 예사로 하였으니 → 사람까지 아무렇지 않게 죽였으니

 └ 대부분 살상되고 말았다 → 거의 모두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다

 

 총과 칼이 사람을 죽입니다. 총과 칼은 사람이 만듭니다. 사람이 서로서로 죽고 죽이고자 총과 칼을 만듭니다. 사람을 죽이는 총과 칼로는 평화를 지킬 수 없습니다. 죽이려는 쓰임새인 총칼이란 전쟁과 독재만을 낳으니까요.

 

 말 한 마디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사람을 낫게 하는 글이 있으며 사람을 다치게 하는 글이 있습니다. 어쩌면, 사람을 죽인다며 만드는 총과 칼 또한, 이 무기를 다루는 사람에 따라 사람을 살리는 자리에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말이나 글은, 서로서로 다치게 하거나 아프게 하려고 만든 소리마디나 그림모둠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같은 말이라도 한결 싱그럽고 알차게 펼칠 수 있고, 같은 말이지만 한결 짓궂고 씁쓸하게 내쏠 수 있습니다. 한 마디 말을 하면서 좀더 올바르고 손쉽게 추스를 수 있지만, 한 마디 말을 하면서도 자꾸자꾸 어렵고 딱딱하고 메마르게 내팽개칠 수 있습니다. 모두 우리 몫입니다. 언제나 우리 하기 나름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토씨 ‘-의’#-의#우리말#국어순화#한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