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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세상을 사는 데에 '말' 말고도 '글자'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적잖이 낙담을 했다. 밥을 먹고, 똥을 싸고, 잠을 자고, 노래를 부르고, 울고 웃고, 동무들과 딱지치기를 하거나, 혹은 팽나무 가지에 앉아 있는 핀치(우리는 이 새를 '삔추'라고 불렀다)를 향해 돌팔매질을 하고, 바닷가에 내려가 멱을 감고… 내가 영위하던 그 모든 일상은 말과 몸짓만으로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내게 본격적으로 글자를 가르치기 전에 왜 그것을 배워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토방마루에다 낫 한 자루를 올려놓았다.

"시상에서 기중 불쌍한 사람이 어뜬 사람인 중 알어? 낫 놓고 기역자도 몰르는 무식한 사람이여."

"낫 놓고 기역자도 몰른다는 말이…뭔 말이다우?"

"여그 나락 비고 나무하는 낫꾸가 안 있다고. 요놈을 앞에다 딱 놓고도 기역자를 써보라고 하면 '몰르겄는디' 하고 고개를 흔단다, 이 말이여. 그랑께 글자를 배와야 하는 것이여."

'글자를 모르면 무식하다, 무식한 사람은 불쌍하다'…그러나 나는 무식하고 불쌍한 것을 면하기 위해서 글자를 배워야 한다는 아버지의 말뜻을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버지는 자식에게 문자 체득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는 데에 실패했다고 생각되었던지 한참을 더 고심하는 눈치였다.

"잘 들어. 시방부터 아부지가 너한테 심바람을 시킬 것잉께. 돌아오는 장날 평일도에 가서 석유 반 되하고, 성냥 한 통하고, 고무신 두 켤레하고, 되야지괴기 두 근 반하고, 고무줄 다섯 가닥하고, 사카린 80환어치를 사갖고 와야 돼. 잘 들었제? 시방 아부지가 뭣뭣을 사오라고 했는지 다 알겄어?"

"되야지괴기 두 근하고, 석유 80환어치하고…그라고는 잘 몰르겄는디."

"그래서 글자를 알어야 하는 것이여. 사야 할 것들을 종우때기에다가 딱 적어갖고 가면 걱정을 안 해도 된단 말이여. 말이나 소리는 공중으로 날어가불면 그만잉께 고놈을 안 잊어불라면 글자를 배와서 적어놔야 한당께."

내가 고개를 끄덕거리자 아버지는 그때서야 흡족한 표정을 했다. 잠자코 마당을 쓸고 있던 어머니가 우리 쪽을 흘끔거리더니 한 마디를 툭 쏘았다.

"느그 아부지는 글을 원체 많이 배와서 유식한 사람잉께, 면에 출장 갈 때 실 두 타래하고 양잿물 조깐 사갖고 오라고 내가 신신당부를 했는디, 잡기장에 딱 적어갖고 갔음시롬도 두 번이나 잊어불고 빈손으로 왔단다."

"씰 디 없는 소리를…"

아들 앞에서 한 방을 제대로 얻어맞은 아버지가 헛기침을 했다. 기실 어머니가 쓸 데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은 글줄이나 안다는 사람들의 유식타령인지도 몰랐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어머니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문맹자였다. 그러나 친척들의 생일이며 바닷물의 물때며 뒷산에 고사리가 팰 시기며 식구들의 고무신 문수 따위를 어머니는 빈틈없이 외우고 있었다.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아하, 그랑께 엄니맹킬로 똑똑한 사람들은 몰라도 되지마는 아부지나 나같이 멍충한 사람들은 꼭 알어둬야 하는 것이 글자라는 것이구먼.' 

그러나 아버지가 한 말 중에서 무릎을 칠만한 대목이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았다. 말이나 소리는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면 그만인데 그것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기록하는 수단이 바로 글자라는 대목이었다. 나는 내가 배워야 하는 글자가 풍뎅이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름철 느릅나무에 붙어 있는 풍뎅이 한 마리를 잡으면, 우리는 가슴과 배가 갈라지는 부분, 즉 사람으로 치면 겨드랑이쯤에 해당하는 곳을 실로 감아 묶었다. 실 끝을 붙잡은 채로 공중으로 던져 올리면 풍뎅이는 부웅붕 날개를 떨며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커다랗게 원을 그리며 맴돌았다. 우리는 그 실 끝을 아예 기둥에 묶어 두었다가 다음날 또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 녀석의 날갯짓이 시원찮으면 풀어서 날려 보내곤 했다. 그러니까 입으로 내는 소리와 귀에 들리는 소리들이 공중으로 날아가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붙잡아두는 것이 바로 글자가 하는 역할이라는 것이다. 기둥에 풍뎅이를 묶어두었다가 아무 때나 가지고 노는 것처럼.

글자를 익히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 이름이 '이서노'가 아니라 '이선호'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버지는 동아일보를 펴놓고서 한글 부분을 짚어가면서,
"요거이 뭔 글자여?"
"요놈은?"
하는 방식으로 학습을 시키는 것이었는데 당시의 신문기사가 워낙 한자투성이였기 때문에 차라리 '새농민'이라는 잡지를 펴놓고 하는 쪽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문제는 내가 신문에서 읽을 수 있는 글자라야 고작 '-을, -에서, -으로부터' 따위의 조사 정도에 불과했음에도 이웃 사람들 사이에서 '아무개 집 아들놈은 학교도 들어가기 전에 벌써 신문을 읽는다네' 어쩌고 소문이 나버렸다는 점이다.

어찌 되었든 한글을 몰랐을 때는 하나도 보이지 않던 글자들이 조금쯤 익히고 나자 너도나도 읽어 달라며 도처에서 제 가끔의 얼굴을  내미는 바람에 나는 그것들을 소리 내어 읽느라 아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당시 우리가 집을 새로 지어 들었다고는 하나 그야말로 초가삼간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작은방 하나를 더 들이기 이전까지는, 단칸방에서 여섯 식구가 함께 복대기며 지내야 했다. 방에서 광으로 통하는 판자문에는 일 년 열두 달을 한 장에 모두 담은 달력들이 두어 장 붙어 있고, 그 달력의 위쪽 한가운데에는 넥타이를 맨 정치인들의 사진이 어김없이 박혀 있었으며, 사진 양 편으로는 이런 저런 정치구호들이 세로로 한두 줄씩 박혀서는 내게 읽을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동생 선길이는 걸핏하면 먹고 난 고구마 껍질이나 제 코딱지를 가져다가 그 정치인들의 볼따구니며 콧구멍쯤에다 짓이겨 뭉개놓기 일쑤였다. 나는 선길이가 그런 해찰을 피울 때마다 녀석을 한바탕 욱대겨서 울리곤 했지만, 나 역시 누나의 크레파스를 몰래 훔치거나 부엌에서 부지깽이를 가지고 와서는, 그들의 턱에다 수염을 그려 넣기도 하고 혹은 검은 안경을 그려서 들씌우기도 했다.

그런데 애써 검은 색 안경을 그려 넣을 필요가 없는 사진도 있었다. 아버지가 주로 앉아 지내는 아랫목의 벽에는, 달력은 인쇄되지 않고 이런 저런 사진들만으로 채워진 흑백 화보 한 장이 붙어 있었다. 그 화보의 한가운데에는 키가 작은 어떤 남자가 콧수염이 난 다른 남자와 악수를 하는 장면의 사진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키 작은 남자는 까만 안경을 쓰고 있었고, 외국인으로 보이는 다른 남자는 콧수염을 달고 있었다. 아마도 나나 선길이가 그렇게 할 줄 알고 자기들이 지레 알아서 눈에다 검은 칠을 하고 콧잔등에 수염을 달고 나온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만 둘 우리가 아니었다. 선길이가 키 작은 사람의 콧잔등이며 턱에다 수염을 그려 넣었고 나는 외국 남자의 눈에다 숯검정을 발랐다. 나는 더듬더듬 그 사진 아래에 씌어있는 글자들을 짚어가며 읽었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한국을 방문한 아유브칸 파키스탄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다.

내가 난생 처음으로 입에 올린 외국 사람의 이름은 케네디도 흐루시초프도 아니었다. 박정희보다 이삼년 앞서서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파키스탄의 군 출신 정치가 아유브칸이었다. 그러니까 당시 우리 방에 붙어있던 그것은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특집'의 화보였던 것이다. 나는 '아유브칸' 혹은 '파키스탄'이라는, 생경하지만 제법 고상해 뵈는 그 말들의 음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 대목을 외우기 시작했다. 같은 또래 동갑내기인 만철이와  희갑이를 만나 자치기를 하면서도,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한국을 방문한 아유브칸 파키스탄 대통령과 악수를 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큰집의 사촌형이 라디오라는 것을 구경시켜 주었는데, 거기서 흘러나오던 목소리를 제법 그럴 듯하게 흉내 내어서 똑 같은 말을 쉼 없이 중얼거렸던 것이다.

"그거이 뭔 소리여?"

아이들이 영문 몰라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이 나를 부러워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뭔 소린지는 나도 잘 몰르겄는디 하여튼 겁나게 좋은 말이여. 시방부터 내가 갈쳐줄 것잉께 따러서 해보드라고 이.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자 우선 거그까지만 따러서 해봐. 시이작!"

나는 아예 자치기 하던 막대들을 탱자나무 울타리 속으로 쑤셔 넣어버리고는 녀석들이  그 어려운 말들을 암기할 때까지 반복훈련을 거듭하였다. 드디어 우리는 입을 모아 그 주문을 합창할 수 있었다. 어른들이 장기를 두고 있는 동각 앞마당을 지날 때면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어느 날 저녁, 밖에서 놀다 집에 돌아온 나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예의 그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어쩌고 하는 주문을 습관처럼 중얼거렸다. 그런데 느닷없이 아랫목에서 신문을 펴들고 있던 아버지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너 이놈, 그 따구 소리 한 번만 더 쫑알거려봐!"

다음 순간 아버지는 벽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문제의 그 화보를 북북 찢어버리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그처럼 무섭게 화를 낸 것을 본 적이 없었으므로 더럭 겁이 났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무엇을 잘 못 했는지를 일깨워 주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나는, 아버지가 나에게 화가 난 것인지 아니면 박정희나 아유브칸에게 화가 난 것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 때 밥상을 들고 들어오던 어머니가 그 모양을 목격하고서,

"쩌그 관청에서 누구래도 와서 보고, 왜 우리 집은 그것을 안 붙이고 띠부렀냐고 물어보면 어짤라고 그라요."

하며 화들짝 놀라던 모습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내가 아버지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게 된 것은 아주 많은 날이 지난 뒤의 일이이었다. 어쨌든 그것은 내 생애 최초의 설화(舌禍) 사건이었다. 글자를 일찍 배우지 않았으면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그런 영금을 당할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한바탕의 설화사건에도 불구하고 언제 그랬더니 싶게 글을 읽고 쓰는 것에 대한 내 호기심은 줄어들 줄을 몰랐다.

"오늘은 남새밭에 비료 조깐 주제 그라요."
"알었어. 아침 밥이나 얼릉 채려 줘."

이른 아침, 바다 쪽으로 앞이 트인 변소에 앉아서 끙끙대며 볼일을 보고 있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가 주고받는 이야기가 그랬다. 나는 서둘러 썩은 새끼줄 한 토막을 뭉뚱그려 밑을 닦는 둥 마는 둥 하고 헛간으로 달려갔다.

"아부지, 거름푸대 노끈 내가 풀 것잉께, 또 전번처럼 낫꾸로 짤러불지 마씨요이."

그러고는 달랑 하나 남아 있던 비료포대를 일으켜 세웠다. 비료나 밀가루를 담은 종이 포대들은 윗부분이 모두 기계로 바느질이 되어 있었는데 그 바느질의 실마리를 잘 찾아서 술술 풀어낼 수만 있다면 적잖은 양의 실을 얻을 수 있었다. 송남이 아버지나 희철이 아버지는 손수 아들에게 얼레도 만들어 주고 바다건너 오일장에 갔다가 연실도 한 타래씩 사다주고 했으나, 우리 아버지는 집이 가난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식의 여가생활 따위에는 일점 관심도 없는 탓이었는지(둘 다였던 것 같다), 어린 내가 직접 해결하지 않으면 겨우내 연을 띄워볼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어쨌든 돌아오는 겨울에 못 생긴 가오리연이나마 띄워 올려보자면 그 동안 비료포대나 밀가루포대의 주둥이를 박은 실을 잘 풀어서 모아두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을 푸는 것은 그야말로 그날 운수에 딸린 일이어서 어떨 땐 순식간에 술술 풀리기도 하지만 어느 땐 한 나절을 낑낑거려도 도무지 실마리가 찾아지지 않았다. 어른들은 영 참을성이 없어서 풀어내려고 몇 번 사도해보다가 여의치 않으면, 포대 주둥이 가운데에다 낫을 박아서 부욱, 당겨버리기 일쑤였고 그렇게 되면 박음질한 실들이 아예 지네다리처럼 토막이 나버리게 되므로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됐다!"

나는 비료포대의 바느질이 풀리자 나도 모르게 고함을 내질렀다.  

"나도 해보께!"

동생 선길이가 밥을 먹다 말고 내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 맨발로 마당으로 내려왔다. 나는 실을 다 풀지 않고 삼분의 일쯤은 선길이에게 당겨 풀게 해주었다. 이제 아침밥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글자를 익혀서 읽는 재미에 빠져 있던 내가 비료포대에 인쇄된 그 많은 글자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보갑비료…

나는 복합비료의 '복합'을 '보캅'이라 읽어야 옳다는 사실은 중학교에 가서야 알았다. 마찬가지로 '급하게'를 '그바게'로 읽던 버릇을 고치느라 훗날 고생깨나 해야 했다. 문제는 그 비료의 성분을 설명하는 부분에 인쇄된 글자들 중에 여태껏 내가 구경한 적이 없는 요상한 글자가 섞여 있더라는 것이다.

-질소 22응, 인산 17응, 칼리 17응…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 '응'이라는 글자가 이상스럽게도 옆으로 삐딱하게 씌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분명히 '응'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것이 무어란 말인가?

머리가 아팠다. 글자라는 것을 괜히 배우기 시작했다고 생각했다. 

이듬해 3월 2일, 나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이웃마을 용출리로 길을 나섰다. 국민학교에 입학하러 간 것이다. 가슴 설레는 출세(出世)였다. 그러나 그 설렘도 잠시, 나는 새로 참여하게 된 그 '세상'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또 모진 필화(筆禍) 사건을 겪어야만 했다.


#이상락 #성장소설 #돛단배 #생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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