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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분향소 전경 태안분향소는 중앙통 사거리 국민은행 앞에 자리잡고 있다. 사람들의 통행이 가장 많고 사통팔달인 곳이다.
태안 분향소 전경태안분향소는 중앙통 사거리 국민은행 앞에 자리잡고 있다. 사람들의 통행이 가장 많고 사통팔달인 곳이다. ⓒ 지요하

 요즘 내 일상은 오래 유지해온 일정한 리듬에서 다소 일탈되어 있는 듯싶습니다. 일정한 리듬을 일시적으로 변경하여 새로운 탄력으로 채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침미사이든 저녁미사이든 평일미사 참례를 중심에 놓고, '오전에는 글 작업, 오후에는 산책을 겸한 걷기 운동, 저녁에는 책이나 인터넷 글을 읽는 일' 등이 오랫동안(지난해 '기름과의 전쟁'과 병상생활로 한동안 그 리듬이 깨졌지만) 유지되어온 고정적인 일상이었습니다.

 

 지난해 여름 퇴원 후 서서히 예전의 일상을 회복해왔습니다만, 요즘에는 비교적 잦은 출타로 변동이 생기곤 합니다. 순전히 오체투지 순례 참여와 용산미사 참례 목적으로 출타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충남 태안이 내 사는 곳이므로, 그런 출타에는 대개 이틀 가량이 소요됩니다.

 

 그런데 그런 출타에는 묵주기도 실적을 더 많이 올리게 됩니다. 오후 일과인 '산책을 겸한 걷기 운동'에는 반드시 묵주기도가 결부됩니다. 묵주기도 때문에 오후의 일과가 잘 유지되는 면도 있습니다. 그런 묵주기도를 출타를 할 경우에는 더 많이 하게 됩니다. 운전을 하면서도,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지하철 안에서도 계속 묵주기도를 함으로써 하루 기본 40단을 문제없이 채우고도 훨씬 많은 실적을 올리게 됩니다.

 

마주하는 눈 분향소 앞을 지나다가 들른 아주머니 한 분은 절을 하기에 앞서 한참 동안이나 영정을 바라보았다. 서로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었다.
마주하는 눈분향소 앞을 지나다가 들른 아주머니 한 분은 절을 하기에 앞서 한참 동안이나 영정을 바라보았다. 서로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는 듯한 모습이었다. ⓒ 지요하

 (내가 굳이 묵주기도 '실적'에 신경을 쓰는 것은, 매주 화요일 저녁미사 후에 갖는 레지오 쁘레시디움 주회에서 묵주기도 실적을 보고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단연 내 실적이 최고지요. 그렇다고 레지오 보고 때문에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레지오 활동을 하기 훨씬 전인 청년 시절부터, 저 베트남 전장에서부터 묵주기도가 '습관화' 되었지요.)

 

 그런데 요즘은 묵주기도가 병행되는 오후의 일상에 변동이 생겼습니다. 출타를 하지 않고 집에서 생활을 하는 중에도 오후 일상이 연일 변경되는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닙니다. 오전에는 변함 없이 글 작업을 하지만, 오후에는 산책 겸 걷기 운동을 포기하고 달리 가는 곳이 있습니다.

 

 지난 23일부터는 내 묵주기도의 지향이 오로지 '노무현 유스토 형제의 영혼을 위해서'입니다. 참으로 노무현 유스토 형제의 영혼을 위해 진심을 다해 기도합니다. 내가 오늘 노무현 유스토 형제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에서 '슬픔 속의 기쁨', 각별한 다행스러움을 얻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오늘도 오후에는 묵주를 들고 산책을 나가고 싶습니다. 2시간 이상 들길과 산길과 해변길을 걸으며, '바보 노무현'을 그리워하며, 그를 위해 하루 40단 이상의 묵주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잠시 유보하고 있습니다. 지난 25일(월)부터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 날 새벽에 또 한번의 출타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전날 봉하마을에 가서 '최초'의 연도를 하고, 경기도 안성 유무상통마을에 돌아온 때는 밤 1시가 넘은 시각이었습니다. 거기에서 곧바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날 오전에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누워서 지냈습니다. 조금은 내 나이도 생각해야했고, 병상생활까지 한 건강치 못한 몸 생각도 해야했습니다. 하지만 오후에는 가뿐하게 몸을 일으켜 읍내 중앙통 사거리로 갔습니다. 그곳 국민은행 지점 앞에는 '노짱'의 영정을 모신 분향소가 차려져 있었습니다.

 

국화를 드리고 분향소를 알고 온 이 여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조문을 하고 나서, 우리 고장에 분향소를 차려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국화를 드리고분향소를 알고 온 이 여성들은 눈물을 흘리며 조문을 하고 나서, 우리 고장에 분향소를 차려주어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 지요하

 나는 그곳에 분향소가 차려진 사실을 24일 오후 봉하마을로 가는 유무상통마을 버스 안에서 알았습니다. 고장의 두 분이 내게 전화로 알려주셨습니다. 단순한 알림이기보다는 '보고'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기도 했습니다. 울컥 고마운 마음이었지요. 고장에 남아서 분향소를 설치하는 일부터 관여를 해야 하는데, 이렇게 바깥에서 '보고'를 받자니 적이 미안한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25일 오후 검은 양복으로 정장을 하고 검은 넥타이를 매고, 봉하마을에서 받아온 '謹弔' 리본을 달고 분향소로 걸음을 했습니다. 우리 고장에도 노짱의 서거 다음날인 24일에 분향소가 차려진 사실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마움을 안고 가볍게 걸었습니다. '슬픔 속의 기쁨', 그것의 실체가 내 가슴을 한없이 뿌듯하게 했습니다.

 

 분향소에는 윤형상 전 태안군수와 가덕소 태안군개발위원장을 비롯하여 지역의 여러 선배들과 시민단체 '참여연대' 멤버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매우 색다르고 각별한 정감을 안을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봉하마을을 갔다 온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봉하마을 얘기, 유무상통마을 얘기, 오체투지 순례와 용산미사에 관한 얘기 등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분향소 안에서의 상주 노릇은 젊은 후배들에게 맡기고,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거나, 조문을 마친 사람이 방명록에 서명하는 일을 도와드리곤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문을 했습니다. 소식을 듣고 일부러 분향소를 찾는 사람들도 있었고, 지나가다가 깜짝 놀라듯 반색을 하며 조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차를 몰고 가다가 분향소를 본 탓에 근처 적당한 곳에 차를 놓고 걸어와서 분향을 사람들도 많았고, 차를 타고 지나가며 차창 밖으로 손을 내밀어 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선 영정을 바라보고 조문을 하는 이들 가운데는 영정을 오래 바라보는 이들이 많다.
우선 영정을 바라보고조문을 하는 이들 가운데는 영정을 오래 바라보는 이들이 많다. ⓒ 지요하

 그리고, 분향을 하면서 눈물을 짓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이 눈물을 짓곤 했습니다. 그들의 눈물짓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고마움과 숙연함 속에서 가슴이 뭉클하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분향소를 찾고, 분향을 하면서 눈물을 짓는 것일까. 그것에 관해서는 이제 아무 말도 필요 없습니다. 느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아는 일이고, '거대한 공감의식'이 공유되어 있는 상황이니 말입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슬픔 속의 기쁨'을 확인합니다. 노짱의 죽음은 너무도 의미롭고 의롭습니다. 그는 끝내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의 죽음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신사'에 일대 분수령을 이룰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슬픔의 눈물 속에서 기쁨을 얻기도 합니다. 그래서 노무현은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우리 고장에도 노짱의 분향소가 차려진 것에서 행복감을 얻습니다. 우리 고장의 수많은 사람들이 분향소에서 조문을 하고 눈물짓고 하는 모습에서 무한한 '희망'을 얻습니다. 그래서 노짱에게 감사하는 마음이기도 합니다.

 

 고장의 원로 민주화운동 선배 한 분은 분향소를 복잡한 길거리에 놓지 말고 태안군청이나 문예회관 등 좀더 정중한 자리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습니다만, 사람들이 가장 많이 소통하는 곳, 중심지이면서 사통팔달인 곳이 더 적합하다는 다수의 의견에 따라 현재의 자리를 계속 고수하기로 했습니다.

 

분향소 안의 회의  고장의 분향소 설치와 운영에 참여하는 이들이 근무 조 편성과 순번 등에 관해 의논을 하고 있다.
분향소 안의 회의 고장의 분향소 설치와 운영에 참여하는 이들이 근무 조 편성과 순번 등에 관해 의논을 하고 있다. ⓒ 지요하

 나는 월요일부터 어제까지 오후에는 분향소로 나갑니다. 두세 시간 정도 그곳에 머뭅니다. 내가 머물 때 진태구 태안군수, 자유선진당 변웅전 국회의원과 도의원들, 이용희 군의회의장과 군의원들이 다 다녀갔습니다. 어제는 미국에서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며칠 전 귀국한 문석호 전 국회의원이 와서 오랜만에 반가운 인사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24일에는 800명 정도 다녀갔는데, 25일에는 1200명이 넘었고, 26일과 27일에는 1500명이 넘었습니다. 오늘과 내일은 더 많은 분들이 조문을 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참여연대'와 '동학혁명기념사업회' 등 분향소 설치와 운영에 관여하는 이들은 조를 짜고 순번을 정해서 24시간 교대 근무를 합니다. 나는 글 작업 때문에 오전에는 집에 머물고, 오후에나 가서 두세 시간 정도 머무는 것이 미안하기도 합니다.

 

 게다가 오늘과 내일은 내가 우리 고장의 분향소에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오늘 오후 서울에 갑니다. 저녁 7시 명동성당에서 거행되는 추모미사에 참례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일 오전 11시 경복궁 앞에서 거행되는 영결식과 서울광장에서 갖는 노제에 대학생 아들녀석과 함께 참석하려고 합니다.

 

 거대한 인파 속의 한 점으로, 그 각별하고도 귀중한 시간과 장소에 함께 하고 싶습니다. '거대한 공감' 속의 한 개체로, 그 역사적인 시간과 장소에 기꺼이 동참해야 스스로 위안이 되고, 떳떳해질 것 같습니다.

 

 우선 오늘 저녁 7시 명동성당에서의 추모미사에서 우리의 진정한 벗이요 동지이며 영원한 이웃인 노무현 유스토 형제의 영혼을 위해 진심으로, 온 마음 다해 기도할 것입니다.

 

고장 분향소 안 영정 앞에서  충남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 중앙통 사거리에 설치된 분향소 안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다시 한번 우리 고장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안았다.
고장 분향소 안 영정 앞에서 충남 태안군 태안읍 남문리 중앙통 사거리에 설치된 분향소 안에서 사진을 찍으면서 다시 한번 우리 고장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을 안았다. ⓒ 지요하

 

덧붙이는 글 | 지난번 글 <봉하마을에서 연도를 바쳤습니다>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천주교 세례명 '유스토'를 '유스티노'로 잘못 표기하였음을 밝힙니다.  


#노무현 서거#분향소 조문#충남 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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