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천안역 광장의 고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에 헌화하는 시민들.
천안역 광장의 고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에 헌화하는 시민들. ⓒ 윤평호

1.

 

전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죽음의 배경과 이유를 둘러싸고 많은 이야기들이 오가지만 모두 살아 있는 자들의 말과 생각. 죽은 이는 말이 없다. 그저 가족들에게 남긴 짧은 유서를 단초삼아 죽음까지 결행한 고인의 심정을 헤아려 볼 뿐이다. 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학창시절 국어 시간이면 교과서 속 시 들에 밑줄을 그어가며 숨은 의미를 해독했다. 전직 대통령의 서거 이후 그때의 선생님처럼 방송과 신문은 유서의 단어 하나, 문장 한줄 한줄마다 의미 부여와 설명에 분주하다.

 

같은 시라도 교사에 따라 시의 해석은 천양지차였다. 동일한 유서라도 언론의 입맛에 따라 유서의 독해는 제각각이다. 특히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구절.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하나의 배후세력으로 지목되며 지탄을 받고 있는 거대 재벌 언론은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구절을 헤드라인 삼아 화해와 통합을 선전하기에 여념이 없다.

 

 

2.

 

루쉰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본명은 저우수런. 루쉰이라는 필명으로 <광인일기>, <아큐정전> 등을 쓴 중국 문학가이자 사상가. 1881년에 태어나 1936년 56세로 사망했다. 고인이 된 노무현 전 대통령 보다도 짧은 생애를 살았다. 임박한 죽음을 예감했을까. 지병으로 사망하기 한달 전 쯤 루쉰은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유서에 갈음하는 글을 남겼다. 그 유서에도 '원망'과 관련된 구절이 나온다.

 

"서양인은 임종 때에 곧잘 의식 같은 것을 행하여 타인의 용서를 빌고 자기도 타인을 용서한다는 이야기를 생각했었다. 나의 적은 상당히 많다…… 멋대로 원망하도록 하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 일컫는 영남대 박홍규 교수. 루쉰이라는 인물에 매료돼 <자유인 루쉰>이라는 전기도 펴냈다. 책에서 저자는 앞서 소개한 루쉰의 유서 대목을 소개하며 이렇게 적어 놓았다.

 

"루쉰의 시대 이상으로 이 땅에도 적은 많다. 관용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다. 중용이니 객관이니 하는 말도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물에 빠진 개는 계속 두드려 패야 한다."

 

 

3.

 

80여년의 시간차가 있지만 죽음을 떠 올리며 쓴 전임 대통령의 유서와 루쉰의 유서는 공통점이 많다. 전임 대통령이 '화장'과 '작은 비석'으로 소박한 장례를 강조했듯 루쉰도 자신에 대한 성역화를 경계했다.

 

"1.장례식을 위해 누구한테도 한 푼도 받아서는 안 된다-단, 친구들만은 이 규정과 상관 없음. 2.즉시 입관하여 묻고 뒤처리를 해버릴 것. 3.여하한 형식으로든 기념 비슷한 행사를 하지 말 것. 4.나를 잊고 자기 생활에 충실할 것-그렇지 않다면 진짜 바보다."

 

루쉰은 중국 저장성의 샤오싱에서 태어났다. 샤오싱은 상하이에서 2백60㎞ 정도 떨어져 있다. 자신의 기념사업을 하지 말라는 루쉰의 유언은 후세 사람들에게 지켜지지 않았다.

 

물이 많은 소도시인 샤오싱은 오늘날 루쉰의 고향임을 자랑하며 관광상품으로 개발되어 광장과 길, 그리고 한국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과 중학에도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 루쉰의 생가도 보존되어 있으며, 그 집 옆에는 샤오싱 루쉰 기념관도 있다. 갑작스레 서거한 전임 대통령의 고향 마을도 몇 년 뒤에는 이렇게 변모할까.

 

변변찮은 국어 실력 탓인지 내게는 자꾸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말이나 "멋대로 원망하도록 하라"는 말이나 표현은 다르지만 결국 속 뜻은 같은 유언으로 읽힌다. 책하지 마라. 어차피 죽은 이는 말이 없다. 다만 루쉰의 유언에 나오는 또 다른 구절을 곱씹는다.

 

"타인의 이나 눈을 해치면서 보복에 반대하고 관용을 주장하는 그러한 인간은 절대 가까이 하지 말 것."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미디어충청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노무현#루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