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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보통의 다른 여자아이들과 달랐다. 몰래 루즈, 즉 립스틱을 발라 보다가 어머니께 들켜 혼난 경험이 있을 법한 어린 시절, 나는 어린 마음에 화장이란 것은 왠지 나쁜 짓을 하는 것 같았다. 유치원 학예회 때조차 굳이 어머니께서 화장을 해 주시겠다고 해도 거절했던 나였다.

그러던 내가 '화장'의 세계에 입문하게 된  중학교 3학년때였다. 화장이 뭔지도 몰랐던 내가 한 화장이라는 것은 당시 10대 전용 파우더와 어설프게 시내에서 산 마스카라를 발라보는 것이었다.

어설픈 화장을 마친 나는 친구들에게 "나 화장하니까 예뻐?"라고 묻기보다, "나 화장한 것 같이 보여?"였다. 나도 이제 화장을 할 수 있을 만큼 '어른'이 됐다는 것을 강조하기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중 3때 처음 화장한 나, 화장의 세계에 빠지다

 화장하면 연아도 달라보인다. 짙은 마스카라와 반짝이는 입술이 눈에 띄는 화장한 연아. 청순한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보인다. 이래서 화장을 하는 거겠지.
화장하면 연아도 달라보인다. 짙은 마스카라와 반짝이는 입술이 눈에 띄는 화장한 연아. 청순한 이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어보인다. 이래서 화장을 하는 거겠지. ⓒ 라끄베르 홈페이지 캡처
대학생이 되자, 화장의 의미는 나에게 사뭇 달라졌다. 용돈을 벌고자 화장품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게 결정적 계기가 됐다.

클렌징 크림(화장을 지우는 크림)이 뭔지도 모르던 나는 화장품 밑에 있는 조그만 제품 설명을 커닝해가며 고객들에게 설명하느라 땀을 빼야했다. 그렇게 석달 남짓 화장품 가게에서 일하다보니, 화장품의 종류가 무궁무진하다는 걸 알게 됐다.

내가 아는 파우더나 마스카라뿐만 아니라, 스킨·로션·에센스·크림 등등의 '기초화장품'과 아이 섀도우·마스카라·아이라이너 등 '색조화장품' 등. 또한 이것들 모두 바르는 순서가 있고 각각의 기능이 있고, 심지어 바르는 도구가 따로 있다는 것도 배우기 시작했다.

그동안 내가 했던 화장은 같이 일하던 언니들에 비하면 '쌩얼'에 가까웠기 때문에 출근할 때마다 화장품 가게 사장님에게 "화장 좀 진하게 하고 와"라는 성화에 시달렸다. 그럴 때면 같이 일하는 언니들이 나의 화장을 도와주기도 했다.

"너 어제 영화에 나왔던 게이샤 같다"

"화장 좀 진하게 하고 와"의 압박이 심해서였을까. 그 후 내게 화장이라는 것은 화장한 '티'가 나는 화장이어야 한다는 게 되어 버렸고, 종종 첫인상으로 "화장이 진해 보인다"라는 말을 듣기 시작했다.

소위 '쌩얼'이라는 내 맨 얼굴을 본 친구들은 예의상이었는지 화장한 것과 많이 다를 게 없다고 말해주기는 했지만, 어느 날부터 시작된 "화장이 진해 보인다"라는 말이 꽤 거슬린 건 사실이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지인이 영화 <게이샤의 추억>을 보고 왔다고 하기에, 나도 같이 그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꺼낸 한 마디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런데 너 보니까 어제 영화에 나왔던 게이샤 같다."

후에 그 지인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해명하긴 했지만, 나는 그 말로 인해서 나의 화장법에 대한 심히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아마도 이때쯤이 내 화장의 과도기가 아니었나 싶다.

병사가 갑옷 안 입고 전쟁 나가는 거 봤어?

ⓒ 소니 픽쳐스 릴리징 코리아(주)
나는 내가 왜 화장을 하는 것일까? 하고 곰곰히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예뻐지고 싶어서 했다.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서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아침에 졸린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여러가지 화장품들을 순서대로 바르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화장을 하고 나가지 않으면 친구들에게서 "예의없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서로 좋은 화장품을 공유하는 것이 친구들끼리 수다의 화제 거리가 되기도 한다. 어떤 날은 화장이 예쁘게 되어서 자신감이 한층 상승할 때도 있었다.

이제 화장은 이제 나의 생활의 일부, 나를 표현하는 방법, 또한 공식적인 자리를 갈 때 나름대로의 예의를 지키는 방법이다. 나름대로 나의 화장품에 대한 예찬론을 펼쳐보자면, 나에게 있어서 화장품은 집 밖을 나갈 때, 병사가 갑옷과 무기를 갖춰 무장하는 것과 같다.

사람이 항상 감정대로 얼굴에 드러내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사람들은 자기 감정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간혹 '어른스럽지 못하다'라거나 '프로답지 못하다'라는 말로 비난한다. 아프거나 힘든 일이 있을 때 화장을 하는 것은 나에게 그런 감정들을 조금 감추면서 사람들을 '프로답게' 대할 수 있는 방패와도 같다.

화장 안해도 예쁘다는 말, 이제 뭔지 알겠네

얼마 전 <대한민국 화장품의 비밀>이란 책의 관련 기사를 읽어보았다. 읽을 당시에는 약간의 충격이 있었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효과가 있든 없든 스킨과 로션 각종 기초화장품을 바르고 있다. 이쯤 되면 화장품은 나의 마음의 위안을 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종종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들을 보면 그녀들은 화장을 하지 않아도 한없이 빛나보일 때가 있다. 아니, 나는 그들의 순수함과 때묻지 않은 젊음이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건대, 제일 좋은 화장품은 아마도 젊음과 자신감이 아닐까.


#화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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