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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일민민

 

.. 아빠는 무슨 까닭인지 알지 못해서 日日悶悶했는데 귀국 후 들으니 아빠 때문에 네가 급우들로부터 심한 조롱을 받았다는 사실을 듣고 다시금 暗然했던 것이다 ..  《김종필-J.P.칼럼》(서문당,1971) 65쪽

 

 "귀국(歸國) 후(後)"는 "돌아와서"나 "한국에 돌아와서"로 다듬고, '급우(級友)들로부터'는 '반 아이들한테'로 다듬습니다. "심(甚)한 조롱(嘲弄)을"은 "모진 놀림을"이나 "모진 손가락질을"로 손보고, "사실(事實)을 듣고"는 "이야기를 듣고"로 손보며, "暗然했던 것이다"는 '까마득했었다'나 '아찔했었다'로 손봅니다.

 

 ┌ 일일민민 : x

 ├ 일일(日日) = 매일

 │   - 일일 연속극 / 인류 일일의 생명이 행복하건 불행하건 /

 │     일일 달라지는 농촌의 모습

 ├ 민민(憫憫/悶悶) : 매우 딱하다

 │   - 잠시 민민한 심사를 달래 볼 수도 있겠으나

 │

 ├ 日日悶悶했는데

 │→ 날마다 매우 딱했는데

 │→ 날마다 매우 갑갑했는데

 │→ 하루하루 몹시 답답했는데

 └ …

 

 나이든 정치꾼 김종필 님은 '일일민민'도 아닌 '日日悶悶'을 이야기합니다. 사람들 앞에 내보이는 글이라기보다 혼자서 가슴앓이를 하다가 딸아이한테 보여주려 한 글이었으니, 이와 같은 글월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말이 아닌 한문으로 세상을 익히고 살피며 살았던 분이라서, 이처럼 글을 쓰는 일은 마땅한 듯 보이기도 합니다.

 

 '일일민민'이든 '日日悶悶'이든 쓰고픈 분들은 얼마든지 쓸 노릇입니다. 붓글씨를 쓰든 글월을 쓰든 수필을 쓰든 논문을 쓰든 시조를 쓰든, 마음껏 쓸 노릇입니다. 그런데, 혼자서 즐거이 쓰는 '일일민민' 같은 네 글자 한자말은 우리 생각과 삶을 얼마나 밝혀 줄 수 있을는지요. 얼마나 우리 멋을 살리며, 얼마나 우리 문학을 빛내는 말이 될는지요.

 

 ┌ 날마다 하는 연속극 / 하루하루 연속극 (o)

 └ 일일 연속극 (x)

 

 우리는 왜 '일일'이나 '민민' 같은 한자말을 가르쳐야 했고 배워야 했을까요. 우리는 왜 아직까지도 '일일'이나 '민민' 같은 한자말이 쓰이도록 팔짱을 끼고 있어야 하나요. 우리는 왜 우리한테 넉넉히 있는 말을 돌아보거나 헤아리지 못할까요.

 

 '날마다'와 '나날이'와 '하루하루'를 잊거나 잃으면서 '매일'이나 '일일'을 쓰는 일이 한결 나은가요. '일일공부'니 '일일연재'니처럼.

 

 '딱하다'와 '가엾다'와 '불쌍하다'와 '안쓰럽다'를 잊거나 잃으면서 '민민'을 쓰는 일이 한결 좋은가요. "잠시 민민한 심사"라는 말을 누가 하고, 이런 말을 누가 알아들을는지요.

 

 ┌ 한동안 매우 딱한 마음을 달래 볼 수도 (o)

 └ 잠시 민민한 심사를 달래 볼 수도 (x)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일일민민' 같은 글월은 정치꾼 김종필 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썼는지 모릅니다. 이제부터는 더는 쓰일 일이 없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참말 모르는 일이라, 〈교수신문〉 같은 데에서 해마다 '올해 고사성어'라 하여 이와 같은 네 글자 한자말을 버젓이 되살려 쓸 수 있습니다. 기자들은 아무 생각 없이 고스란히 받아쓰기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또한, 무슨 뜻인지 영문도 모르고, 이런 말을 왜 써야 하는가를 하나도 헤아리지 않으면서 그예 받아먹기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깜냥껏 우리 삶을 북돋우면서 우리 말을 북돋우는 길을 찾을 수 있는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우리 재주것 우리 삶터를 갈고닦으면서 우리 글을 새로 태어나도록 하는 길을 다질 수 있는 우리들이기도 합니다.

 

 낡은 정치를 몰아내고 새 정치를 뿌리내리게 할 수 있는 우리들인 만큼, 낡은 글월을 쫓아내고 새롭고 싱싱한 우리 말을 뿌리내리게 할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낡은 정치를 조금도 못 느끼면서 우리 삶과 터전을 낡아빠지게 내버릴 수 있는 우리들인 만큼, 우리 말이고 글이고 죄다 낡아빠진 채로 허덕이도록 망가뜨릴 수 있는 우리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요. 앞으로 우리들은 어느 쪽으로 가려 하나요. 이제부터 우리들은 어느 자리에서 누구와 함께 삶을 가꾸며 아름다움을 빛내고자 하는가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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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한자#우리말#한글#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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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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