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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길이 보이지 않아도 아무런 걱정이 없다. 아버지가 끌고 가는 손만 붙잡고 가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가 차오르는 젊은 시절에는 모든 것을 제 판단으로 헤집고 나가야 한다. 진정 성숙한 젊은이는 그렇다.

 

그때의 판단은 다른 책이나 외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한다. 그치만 자기 아버지로부터 보고 배운 것들이 큰 지침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세대와 많은 세대에게 또 다른 교훈이 된다. 내적인 등불은 그렇게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박도의 〈길 위에서 아버지를 만나다〉는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직접 보고 듣고 배운 인생살이와, 자기 자신이 직접 겪은 인생살이를 자기 자녀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 땅 모든 자녀들에게 참된 인생의 지침으로 전해주고 있다.

 

모름지기 6·25한국전쟁을 겪은 아버지 세대와 70-80년대를 지나 온 아버지 세대는 그야말로 먹고 사는 일이 인생의 전부였다. 그 분들은 전쟁이 가지고 왔던 폐해를 온 몸으로 받아들여야 했고, 소작농이로 사는 게 얼마나 고단한 삶인지 맨살로 이겨내야 했다.

 

박도의 아버지는 그렇지만 그 시절 꽤나 부유한 조상 덕에 고급 승용차까지 굴릴 정도였고, 급기야 그의 아버지는 국회의원까지 출마했다. 그런데 그에 낙선하게 되자 급격히 가세는 기울었다. 더욱이 5·16쿠데타가 일어날 무렵에는 정당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교소도에 끌려가게 되었으니, 그 집안 꼴은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때 박도는 경북 구미를 벗어나 낯선 서울 땅에서 고등학교를 다녀야 했는데, 입학금이 없어서 이대로 죽어버릴까, 가출해 버릴까, 차라리 낯선 시골로 가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할까,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터에 종로 탑골공원에서 두 다리가 끊긴 채 고무판을 내밀며 구걸하고 있는 예순 살 노인을 본 순간, 이제까지의 원망과 한탄이 비겁한 일임을 깨닫고,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나자고 다짐했다.

 

"나는 청소년 시절, 청년 시절에 불만이 많았다. 왜 아버지는 재산을 다 없애고 우리 남매들을 고생시키나? 왜 어머니는 일찍 떠나셔서 자식들에게 마음에 깊은 상처를 주셨나? 왜 나는 하필이면 최전방 부대로 배치되어 5분 대기조로 늘 긴장 속에서 밤낮이 뒤바뀐 군 복무를 해야 하나? 왜 하필 나는 박봉의 교사가 되었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든 게 불평불만이었다."(220쪽)   

 

다른 이야기들도 많지만 이 부분이 내게 와 닿는 이유가 뭘까? 시골 농촌 출신인 나 역시 아버지가 중학교 때 급작스레 떠난 까닭에 가세가 기울 수밖에 없었고, 그야말로 집안 기둥뿌리가 빠져 나간 듯 어머니는 매일 눈물로 지새웠고, 남들처럼 도시로 나가 공부하고 싶었지만 그럴 꿈은 엄두가 나지 않아 나 역시 한탄하기에 급급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를 일찍 여읜 탓에 내 자식들에게만큼은 더 자애롭고 따뜻한 아버지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에 다짐을 하게 되고, 내 나이 30살이 되기까지 여러 공사판을 돌며 늦깎이 대학을 나왔으니 내 자식들에게도 자립에 대한 삶을 일찍부터 새겨줄 수 있어서 좋지 않겠나 싶다. 

 

박도 역시 젊은 날 불평했던 것들이 지금은 감사가 된다고 한다. 아버지가 재산을 없앤 것이 참된 인생의 묘미를 조금 일찍 맛볼 수 있었고, 어머니와의 이른 이별이 내적 성숙을 더 빨리 가져오게 되었고, 최전방의 군복무가 분단의 현장을 좀 더 가까이에서 체험케 되는 계기가 되었고, 교사가 되었기에 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여러 제자를 만날 수 있었던 게 그것이란다.

 

그 밖에도 이 책에는 젊은 시절에 품어야 할 꿈과 신념과 교양을 비롯해, 시간과 돈을 대하는 자세와 쓰임새, 그리고 혼인에 대한 살아 있는 이야기들로 꼼꼼히 들어차 있다. 물론 그 모두는 박도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일들이니, 이 땅의 자녀 세대들을 향한 참된 등불이지 않겠나 싶다.

 

혹여 부모세대로부터 좋은 것 하나 물려받지 못했다고 한탄하거나, 걸어가야 할 길이 막막하고 답답해서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하거나, 인생을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고 하소연하는 젊은이들이 있다면, 이 책 속에 등장하는 그 아버지로부터 참된 등불 만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길 위에서 아버지를 만나다 - 사랑하는 딸과 아들에게 보내는 아버지의 선물

박도 지음, 말글빛냄(2009)


#박도#아버지#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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