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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우 날 앞마당 풍경. 앞마당 화초들도 곡우 비를 흠뻑 맞아서 그런지 생기가 돋습니다.
곡우 날 앞마당 풍경. 앞마당 화초들도 곡우 비를 흠뻑 맞아서 그런지 생기가 돋습니다. ⓒ 조종안

겨우내 꽁꽁 얼었던 시냇물이 흐르고 햇살이 따사해지면서 시장에 온갖 봄나물이 등장하고, 나물 향에 취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제가 봄의 마지막 절기인 곡우(穀雨)였지요. 농가에서는 곡우를 전후해서 모판에 볍씨를 뿌렸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옛날보다 날이 따뜻하고 기술이 발달해서 5월 중순이 넘어야 모내기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더구나 올해는 5월에 윤달이 들어 모든 곡식의 파종도 늦고 여름도 길다고 하더군요.

곡우가 지나면 기온도 올라가고 조금씩 더워지기 시작합니다. 언제부터인지 설거지를 하거나 샤워할 때 차갑게 느껴지던 수돗물이 시원하게 느껴지더군요. 우리나라도 아열대 기후로 접어들고 있다고 하지만, 온 산야를 1년에 네 번씩 옷을 갈아입히는 4계절은 아직 우리와 함께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학창시절에는 추운 겨울에 추위를 막아줬던 교복이 덥게 느껴지고, 날이 풀리면서 나타난 파리들과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때이기도 했는데요. 운동장에서 조회할 때 검정 교복을 파고드는 햇볕이 장난이 아니었고, 파리들이 까까머리에 달라붙어 무척 성가시게 했습니다.

삼복더위가 지나면 시원하게만 느껴졌던 물이 차갑게 느껴지듯 곡우가 지나면 냉장고에 보관해놓은 숭늉을 마시면 속이 시원하게 뚫리는 것 같지요. 아침마다 샤워하는 저도 요즘은 찬물로 하는데요. 기분이 상쾌하고 몸도 한결 가벼워지는 것 같더군요.

더불어 먹고 남은 된장국이나 찌개를 이틀만 놔두면 부패하기 때문에 음식관리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시기입니다. 자연의 변화는 참으로 오묘하고 경이로운데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자연보호와 환경오염의 심각성을 떠올리게 됩니다.

모판에 볍씨를 뿌리고, 조기어장이 형성됐던 곡우(穀雨)

 물이 흥건하게 고이기 시작하는 군산 나포 십자들녘. 건너편 아스라이 보이는 산은 충청남도 서천, 화양 부근입니다. 날이 맑고 소음이 없는 날에는 강 건너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요.
물이 흥건하게 고이기 시작하는 군산 나포 십자들녘. 건너편 아스라이 보이는 산은 충청남도 서천, 화양 부근입니다. 날이 맑고 소음이 없는 날에는 강 건너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요. ⓒ 조종안

 모판에 물을 대는 경운기. 농부가 할 일을 경운기가 대신해주고 있는데요. “하루 종일 걸어가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뭐지?”라는 수수께끼가 생각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모판에 물을 대는 경운기. 농부가 할 일을 경운기가 대신해주고 있는데요. “하루 종일 걸어가도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뭐지?”라는 수수께끼가 생각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집니다. ⓒ 조종안

24절기에서 여섯 번째 절기인 곡우(穀雨)는 청명과 입하의 가운데이며, 양력 4월20일경(음력 3월 중)에 들고, 봄비가 내려 백곡(百穀)이 윤택해진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제가 사는 마을에도 나흘 전에 땅을 촉촉하게 적시는 비가 내리더니 곡우 날에도 상당량의 비가 내렸습니다.

예로부터 곡우 무렵이면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가 내리고 그 물로 못자리를 했지요. 물이 꼭 필요한 곡우 때 비가 내리지 않으면 "곡우에 가물면 땅이 석 자나 마른다"고 걱정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곡식에 꼭 필요한 비가 내리는 곡우에 못자리하기 때문에 곡우는 농사에 가장 중요한 절기 중의 하나였고, 따라서 나라에서는 백성에게 볍씨를 내어주며 못자리를 권장하고 파종이 있는 날에는 죄인들도 잡아가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더군요. 지리산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곡우에 약수제를 지내왔고, 조정에서 파견된 제관이 지리산 신령에게 다례차를 올리며 태평성대와 그해 풍년을 기원했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이때쯤부터 조기잡이가 시작되어 서해안 한구마다 북적거렸는데요. 흑산도에서 겨울을 보낸 조기떼가 북상하여 충청도 격렬비열도 근처까지 올라와 풍어를 이루었는데 이때를 '곡우사리'라고 했고, 연평도까지 올라가는 5월 조기어장을 '입하사리'라고 했습니다.

곡우 무렵은 나무에 물이 가장 많이 오르는 시기여서 깊은 산으로 '곡우물'을 마시러 가는 풍속이 내려오는데 자작나무나 박달나무 등에 통을 매달아 구멍을 내어 수액을 받아 마셨습니다. 특히 해발 1000m 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생산되는 수액일수록 미네랄 성분이 우수하고 당도가 더 높다더군요.

경칩의 고로쇠 물은 여자 물이라 해서 남자에게 좋고, 곡우 물은 남자 물이라 해서 여자들에게 더 좋다고 하는데요. 특히 수액이 많은 자작나무는 지리산 아래 구례 등지에서 많이 나며 그곳에서는 곡우 때가 되면 전통을 따라 약수제까지 지낸다고 합니다.

'곡우물'과 '고구물'의 추억

마흔아홉 살 되던 해에 사경을 헤매다 극적으로 생명을 구하신 어머니는 의사가 알려준 음식조절을 철저히 하며 건강관리를 했는데요. 해마다 곡우(穀雨)를 전후해서 집을 2-3일씩 비웠습니다. 진안·장수로 '곡우물'을 마시러 다녔거든요.

초등학교 6학년 시절로 기억합니다. 당시 열일곱 살이던 막내 누님이 부엌살림을 책임지고 있었는데요.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오니까 막내 누님이 "어머니가 주조장 아줌니랑 '고구물' 마시러 감서 반찬 사먹으라고 돈을 주고 갔다"라고 하더군요.

누님 얘기는 며칠 동안은 어른들 눈을 의식하지 않고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는 것과 마음껏 뛰놀 수 있다는 해방감 외에는 놀랄 게 없었습니다. 그런데 궁금한 게 하나 있었는데요. '고구물'이란 게 도대체 얼마나 좋으면 첩첩산중이라는 진안·장수까지 마시러 가는지 어린 마음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곡우라는 절기를 모르던 시절이었고 평소 무엇을 보면 궁금한 게 풀려야 시원했던 성격이라서 더했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에게 물어보면 귀찮다는 듯 "몸에 좋은 '고구물'이 마시러 가지 머더라 가!"라는 답변뿐이었고, 학교 담임선생님에게 여쭤도 모르신다고 해서 궁금증은 더해갔습니다.

'고구물'의 궁금증은 풀기 어려운 숙제였는데요. 어머니가 부잣집 아주머니들하고만 마시러 다니는 것을 보고 "아하, 부자들만 마시는 '고급물'을 '고구물'이라고 잘못 얘기허는 개비다"라며 제 생각이 맞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제가 '고구물'이라고 하니까 담임선생님도 알아듣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요.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옵니다. 어머니 살아계실 때도 그 얘기를 하며 웃었고, 지금도 막내 누님을 만나면 '고구물' 얘기를 하면서 웃곤 하지요.

'곡우물'의 추억이 떠오를 때마다, 흥부가의 한 대목이 떠오르는데요. 동생이 부자 됐다는 소문을 듣고 심술보가 뒤틀린 놀부가 달려가 온갖 수작을 부려 얻은 '화초장'을 등에 지고 오면서 다리를 건너다 이름을 잊어버려 '초장화', '장화초', '고추장', '된장' 이라고 되뇌던 대목이 떠올라 더욱 웃음이 나옵니다.

곡우에 맞춰 단비가 내린 틈을 놓치지 않고 논으로 나서는 농민들을 보면서 마음을 추슬러봅니다.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묵묵히 일을 하다 보면 꽃피고 열매 맺는 그날은 반드시 오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으니까요.


#곡우#곡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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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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